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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 정우연 집사(24.04.14) 조회수 : 141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4-04-16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공원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는 조선시대 양화 나루터를 수비하던 양화 진영이 1860년 외국인 묘지로

조성되어 조선 고종 때부터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선교사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중에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은 1885년 6월 부터 서울 북장로회 선교회 알렌 의사,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활동하게 되는데

선교사로서 경험이 부족한 20대 청년들로, 이들은 선교 정책, 정체성 인식, 성격 차이 등으로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개척기로 의사였던 알렌의 공으로 병원(제중원)이 설립되었는데 알렌은 법의 허용범위 내에서

활동하면서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를 기다리자는 현실론자였는데 왕실의 호의와 정부의 협조는 선교 초기에 필수적이라는 논리로

미국 선교부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에 반해 언더우드와 헤론은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척기에는 불법적인 전도가 차선책이 되어, 박해를 받더라도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가면 선교의 문이 열린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심한 갈등 끝에 1887년 7월 알렌이 미국에 한국공사관 설치를 돕기 위해 떠나면서 갈등은 일단 해소되었습니다.

알렌이 떠난 후 제중원과 왕(고종)의 진료는 헤론이 맡게 되었는데 왕실을 드나들며 관리들과 대화하며 정세를 파악하게 되면서

헤론도 알렌처럼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직접 전도에 대해 신중론자로 변했습니다. 언더우드는 헤론의 이런 태도를

‘과거 알렌의 병’이라고 부르며 서로 대립하며 비판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헤론이 이질에 걸려 병상에 있을 때 언더우드가 극진히 간호하면서 화해했고 헤론은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언더우드도 정치 중심지 서울 생활이 늘어나고 감리교의 사회학적 선교를 이해하게 되어 직접, 간접 전도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헤론은 알렌을 비판했으나 이해하게 되었고, 언더우드와 가까왔지만 멀어졌고 다시 화해했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는 다양한 의견과 여러 갈등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 헤론의 태도처럼 상대방을 이해하며 화해하는 정신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하는 더욱 성숙한  성도님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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