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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40908 계속되는 시련과 훈련(왕상17:17-24)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4-09-10
  첨부파일:   계속되는 시련과 훈련(주일).hwp(93K)

  (17-24)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한 사람이 귀하고, 빛나는 인생으로 세워지는 일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 혼자 힘으로 열리는 열매가 없고, 됨됨이 있고, 성숙한 인격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과 성장 단계가 있다. 보잘것없는 한 인생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대한 인생이 되는 그 비결은, 훈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엘리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에는 많은 고난과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훈련이 끝난 후에, 비로소 엘리야는 한 여인의 입을 통해,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모든 훈련을 마친 뒤에, 비로소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임을 내가 인정한다.”라는 멋진 말을 듣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꾼이 되는가?

1. 시련은 끝나지 않는다(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이 일 후에’(아하르 하드바림 하엘레)는, ‘이러한 일들(사건들) 후에’라는 뜻이다.

  그동안 엘리야에게,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합왕에게 나아가, 담대하게 기근을 예언한 일, 그릿 시냇가로 갔던 일, 사르밧으로 갔던 일이다. 이 모든 사건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보이지만,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반복되는 훈련이었다.

  그릿 시냇가에서, 자기 생각과 경험, 지식, 또 분노를 다 내려놓고, 순종하는 훈련이었다. 세상에서 붙잡고 있는 줄을 끊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만을 절대 신뢰해야 한다는, 믿음의 훈련을 받았다. 사르밧에서는, 용광로 속에서 자존심의 불순물을 걸러내어, 순수한 사람, 온전한 순종을 배웠다.

  순종이 순종을 낳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며, 참된 순종에는 반드시, 희생적 헌신이 뒤따르는, 헌신의 원리도 배웠다. 하지만 그러나 또 다른 하나님의 시련과 훈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시련과 훈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충분하다고 생각하실 때까지,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며, 다른 훈련을 하신다. 믿음의 사람은 다 그런 과정을 겪었다. 빛나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오늘 본문과 똑같다.

  아브라함의 삶은, (창12장)에 시작해서, 22장에 이르는 동안, 정말 힘든 과정이 많았다. 75세가 되어, 자기가 살던 정든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내가 원해서, 더 좋은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떠나야만 함이, 그의 믿음의 시작이었다.

  함께 정을 나누며 지내던, 조카 롯이 잡혀가자, 목숨을 걸고, 조카 롯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어려움 중에 구해주었는데, 조카와 땅 문제로, 결국 헤어져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또 조금 지나서, 이스마엘을 얻는 과정에서, 엄청난 가족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그 아들을 쫓아내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이런 과정들을 겪은 뒤에, 이만하면 더 이상 어려움은 없다고 말할 만한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는 엄청난 시련이 있었다.

2. 왜 훈련은 계속되는가?

하나님께서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까지는, 훈련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정말 성숙한 신앙과 인격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멋있게 쓰임 받기 위해서, 훈련은 계속된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생으로 살도록, 하나님은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까지, 시련과 훈련을 계속하신다.

  지금 어떤 훈련과 시련을 겪고 있는가? 다른 사람이 겪지 않는, 그런 어려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시련은 하나님의 훈련임을 기억하라. 우리에게 필요한 훈련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이다. 멋진 인생으로 키워나가기 위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이다.

  이 사실을 알 수 없던, 혼자된 여인에게, 너무 어려운 훈련이 있었다. 그녀에게 한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느 날 병이 들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혼수상태가 되더니, 숨이 끊어졌다. 이 과부는 소망이 되는 외아들이 죽자, 절망에 빠졌다.

  아들이 죽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 여인이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남편도 잃고, 자식도 잃은 분의 이야기다. 남편을 잃었을 때는, 뼈마디 마디가 모두 다 아팠다. 그러나 자식을 잃었을 때는, 머리카락도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선조들은, 부모는 땅에다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여인은 숨이 끊어진 아들을, 안고 울부짖었다. 찢어지는 가슴으로 우는, 여인의 눈에, 엘리야가 들어 왔다. 갑자기 그에게 외쳤다. “당신이 오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 집에 다시는 식량이 없어지지 않는다고…”고 하지 않았느냐며, 과부는 엘리야를 원망했다.

  (18)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이 여인의 심정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요? 도대체 당신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서, 내 집에 왔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먹여 살린다고요?

  떠돌이 같은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와서, 이게 무슨 일인가? 당신이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바알을 섬겼다. 그게 죄라면 죄다. 또 자식을 우상처럼 섬겼다. 나도 죄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하나님이, 내 아들을 죽게 하면 되겠는가?” 여인은 이런 뜻으로 말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면서, 많은 날을 지내왔다.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마르지 않는 그 통을 볼 때, 매일 밥상을 차릴 때마다. 하나님의 역사임을 체험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엄청난 시련이 닥쳤을 때, 지금까지 체험한 놀라운 보호와, 섭리를 모두 잊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다.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러면서도 시련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체험했어도, 또 다른 시련이 닥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하며, 다 잊어버린다. 우리의 속성이다.

  체험해도, 환경이 바뀔 때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여인은, 시련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달았다. 시련은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다. 죄인 줄 몰랐지만, 생각나게 함이 시련이다. 그래서 시련받기 전에, 말씀을 통해 돌아보고, 죄짓지 말아야 한다. 좋은 말 할 때, 잘 들어야 한다.

  시련이 닥치면, 하나님의 앞에서 과거에 짓고, 그냥 넘어간 죄가 생각나면,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한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과 책임과 잘못을, 엘리야에게 돌렸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치면 다른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역경의 원인을 찾고,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 성정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엘리야의 처지에서는, 이 여인의 원망과 미움은, 정말 억울한 일이다.

  여인의 아들을 죽이려고, 엘리야가 사르밧에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르밧으로 가라 해서 왔고, 엘리야는 이 아이를 예뻐했다. 더구나 한 끼 먹고, 굶어 죽으려고 했던, 처절한 상황 속에서, 이 여인과 아이를 살렸다. 이렇게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데, 무슨 원망과 비난을 할 수 있는가?

3. 나한테 이럴 수 있는가?

감사는커녕, 부당하게 비난하는 상황에서, 엘리야가 받았던, 훈련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때때로 마땅하고, 정당한 대우가 아니라, 반대로 못마땅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있다.

  부당한 대우와 억울함이, 엘리야가 받은, 최종 훈련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면서 받는 훈련 가운데, 가장 힘든 훈련이다. 칭찬과 상이 아니라, 오히려 부당한 대우와 오해, 근거 없는 비난을 받을 때가 가장 어렵다. 하지만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데 받는다면, 하나님과 상관이 있다. 그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고,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이러한 대우를 받으면, 너무도 억울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훈련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과정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예상하고 대비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정말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선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오해와 비난, 또 참기 어려운 모욕과 천대를 받으면서 사셨다.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오해해서,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고, 벌거벗겨, 십자가에서 추악한 죄인처럼 죽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님이 그랬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이 세상에서, 공정한 대우와, 세상의 상급을 기대할 수 없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마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나로 말미암아’ 우리 잘못이 아니고, 그럴만한 원인이 있어서도 아니다. 있다면 주님 때문이다. 주님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욕을 먹고, 박해받으며, 사람들에게 악한 말을 들을 때, “하늘에서 상이 큼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을, 반드시 복 주신다. 엘리야는 이 비밀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행했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어디다 대고, 이렇게 악하게 행동하는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서, 자기변호를 하면서, 맞서 싸울 수 있지만,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면서, 변명도 하지 않았다.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그녀의 품에 있는 아들을 달래서, 죽은 아이를 받아 안고, 그가 거하는 다락방에 들어가서, 침착하게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와 이 여인의 다른 점이었다.

  이 여인에게,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엘리야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경험했다. 그는 수준 높은, 순종과 믿음의 훈련을 받았다. 새로운 문제이지만, 하나님께 나가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야는, 그 아들을 달라고 말했다.

  이 훈련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사람은 끝까지, 온전하게 하나님만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끝까지 온전히 믿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만 끝까지 의지했다. 내 경험과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믿었다.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니.” 이 말은 ‘이스라엘 시돈 땅에, 기근이 내려, 재앙이 있음을 이해하지만, 이 여인에게도 재앙을 내리시면 곤란하다는, 엘리야의 부르짖음이다.

  (21) “그 아이 위에 몸을 3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문제 위에 자신을 얹어서, 내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림이 기도다. 문제를 자기와 동일시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임을 알기에, 간절히 매달리자, 아이가 살아났다.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이는 주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는 증거가 된다(벧전3:12). 아무 희망이 없어 보여도, 기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그녀와 그의 아들을 구했다.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이 여인의 믿음은 회복되고, 그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한 사람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이처럼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다. 그리고 엘리야는 우상 숭배자들과 결투하려고, 갈멜산으로 간다. 아무리 억울해도,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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