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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40818 어둠 가운데도 담대하라(왕상17:1)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4-08-23
  첨부파일:   어둠 가운데도 담대하라(주일).hwp(93K)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어두울 때, 빛은 더 빛난다. 엘리야는 어두운 하늘에, 홀로 떠오른 북극성과 같은 존재였다. 혼란과 혼돈 속에, 어지럽던 흑암의 시대에서, 어떤 삶이 의로운 삶인지 보여주었다.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이었다.

  본문은 엘리야가 처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엘리야가 살던 시대는, 분열 왕국 시대에, 북이스라엘을 무대로 활동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줄줄이 악한 왕들이었다.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아합왕이 통치했다.

  아합은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이다. (왕상16:30-33)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 땅에 여호와를 향한 순결한 예배 흔적은, 순식간에 다 사라진, 악하고 추한 모습이었다.

① 바알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선택하여, 온 나라를 죄로 몰아갔다.
②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에 건축하였다. 하나님은
(수6:26中)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고 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한다. (왕상16:34)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처럼 가장 어두운 시기에, 가장 걸출한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무대에 나타난다. 사탄이 온통 지배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때 하나님은 강력한 선지자를 어두움 가운데 일으키셨다.

1. 엘리야의 출현(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이 짧은 한마디가, 엘리야의 프로필이다. ‘엘리야’ = 엘(하나님) + 이(나의) 야(여호와의 준말) =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뜻이다.

  성경은 중요한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많은 분량의 약력을 제공한다. 모세는 그의 출생 과정에 대해, 아주 극적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사무엘도 한나에게 일어나는 사건부터, 출생 과정, 성장하는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다. 침례 요한, 요셉, 다윗, 다니엘, 바울, 베드로… 대부분 다 그렇다.

  하다못해 그들의 직업, 혹은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는지에, 간단한 배경만이라도 소개한다.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아무런 소개가 없다. 출생 배경, 가정환경, 성장 과정에 대해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인물이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요르단지역)에 있다. 길르앗은, 갓 지파와 므나세 지파, 두 지파 사이에, 걸쳐 있었다. 그곳은 거칠고 울퉁불퉁한, 바위 지대다. 그 지방의 언덕들은, 우거진 숲들로 덮여 있고, 산들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뿐이다. 그 지역 계곡들에는, 사납고 거친 짐승들이 출몰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이라는 정보만 밝혔다. 요단강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 길르앗, 그러나 길르앗은, 엘리야의 고향이 아니다. 그곳에 단지 거주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모세처럼 왕궁에서 훈련받은 인물이 아니었고, 바울처럼 학문적인 수련도 없었다.

  신학교에서 발탁된 인물은 더욱 아니었다. 길르앗 한 촌구석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디셉’(티스비, 토솨브, 거주하는 사람, 의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그를 발탁하셨다. 그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와 같이, 출신이 좋지 않다.

  출신이 좋은 사람은 반드시, 아버지와 조상들의 이름이 쭉 나오는데, 그러한 말씀은 나오지 않는다. 영적 전쟁에는, 잘 싸워 승리하면 되기에, 가문이 좋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성자들은 대체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다.

  세상이 어둡고 힘들면, 무속신앙이 판치기에, 엘리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성도는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인물을, 생각하지 못한 때, 하나님의 일군으로 예비하고, 불러 세운다. 다윗은 한낱 목동에 불과했다. 베들레헴 촌구석, 8형제 중에 막내를 선택하셨다.

  따라서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 가정에서, 놀라운 인물이 자라고 있는지 모른다. 철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엘리야, 다윗 같은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은 곁길로 가서, 부모의 속을 조금 끓게 만드는 아이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로 자라고 있는지 모른다.

  조그만 교회에서 그런 인물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상상하지 못하는 인물을 부르고, 세우시는 분이다. 따라서 나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 저도 목사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목사가 되었다.

2. 엘리야의 신앙고백(1中)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주 짤막하지만, 위대한 신앙고백이다. 그 시기는 온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바알을 신으로 섬기던 시대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마치 죽은 신처럼, 거짓 우상에게 조롱받고, 무시되던 때였다. (18:13)을 보면,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찾아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조리 죽이던 시대였다. 바로 그때 엘리야가 나타나, 아합과 이세벨 앞에서 선포하는 고백이, 바로 본문 말씀이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말에 3가지 뜻이 있다. 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상인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다.
② 하나님은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 관념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하나님이다.

③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위대함이 있기에, 이름이 엘리야다. 요즘 들으면, 그리 대단한 이름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엘리야가 살던 시대에는, 백성들이 우상만을 섬기던 때였다.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 바알이라고 해야 할 만큼, 어둡고 악한 시기였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일군으로 부르고 세우시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의지하는 사람, 주님을 온전히 섬기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고,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신다.

  세상과 타협하고, 사람의 비위나 맞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정한 일군이 아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삶의 목표가 오직 하나님인,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 (대하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어둡고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엑스레이와 같은 시선으로 사람의 마음을 샅샅이 살피시며, 찾으신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만 바라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찾으신다. 나중에 갈멜산에서 결투할 때, 모여든 백성들을 향해 외쳤다.

  하나님과 바알을, 한 손씩 같이 잡았던 자들에게, (왕상18:21中)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삶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다. 우리 신앙은 장식품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취미활동이나, 친목 모임도 아니다. 전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가슴 벅찬 일이, 신앙생활이다. 복을 받을 때는, 즐거워하지만, 고난이 찾아오고 힘들어지면, 금방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은, 진정한 신앙생활이 아니다.

3. 엘리야의 선포(17:1下).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가 말한 내용은,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말이다.

  우리나라처럼 때를 따라,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는, 이 말이 실감 나지 않지만, 팔레스타인같이 삭막한 광야에서, 3년간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무서운 경고다. 이스라엘 지역은 여러 달 동안, 계속되는 건기에는, 비도 내리지 않지만, 밤이 되면 촉촉한 이슬이 내려서, 식물들이 자라난다.

  그런데 만약,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여러 해 동안 그렇다면,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 아닐 수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순식간에 가뭄과 불모의 땅이 되어, 기근과 죽음을 낳게 된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바알 숭배자들에 대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한 경고였고, 선전포고다.

  시골 출신에, 초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왕 앞에 나서는 일은, 가장 용감한 사람조차, 숨쉬기조차 어렵다. 더구나 그 왕의 왕비는, 자기 뜻에 어긋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죽이는 무서운 여자다. (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실제로 그녀는 하나님의 종들을, 여러 명을 죽였다.

  바알은 당시 온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고 있던, 잡신들 가운데 하나였다. 다신교의 숭배 대상이었다. 팔레스타인에는 바알, 아세라, 밀곰, 몰록 등, 많은 신이 있었다. 그중에 우두머리가 바알이다. 그들은 바알을, 폭풍과 비를 몰아다 주는 신으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농사의 필수조건인, 비와 이슬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이것은 저들이 섬기는, 바알의 권위를 완전히 실추시키고, 바알 숭배의 실질적 두령인 왕과 왕비에게, 선전포고함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과 절대 권력자인, 아합과 이세벨을 상대로, 엘리야는 홀로 서서, 선전포고했다. 누가 그를 따르고, 도와줄지 엘리야는 모른다. 지금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외로운 용사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도 엘리야를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오직 한 사람 엘리야가, 저들에게 도전장을 냈다. 하나님은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을 찾으신다. 그 한 사람이 또 한 사람, 또 그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이렇게 거룩한 세력은 형성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너무 다르다.

  인간의 논리로 보면, 아합의 군대와 싸우려면, 하나님의 군대, 강철부대를 보내야 원칙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용기를 가진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기로 각오한다면, 바로 그 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군중이라도 사용하지 않는다. 온전히 준비된, 한 사람을 사용한다. (삿7장)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 정의감과 애국심에 불타는, 3만 2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 가운데,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중에서 300명만 남기고, 다 돌려보내셨다. 3만 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진짜 헌신하는 300명이 필요하다. 교회가 3천, 3만의 출석 인원을 자랑함이, 중요하지 않다. 진정 헌신 된 300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온전히 헌신 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군대는,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군대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합지졸들의 집합이 아니고, 자신을 헌신하고 불태우기를 소원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어두운 시대를 밝힐, 한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가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란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진정한 용기를 가진, 확신에 찬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약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②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이라고 했다. 여호와는 살아계신 분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 보였지만, 엘리야는 대중의 의견과 형태에 휘둘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다.

③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 안에 임재하여 있음을 깨달았다. 아합 앞에 섰을 때도, 그는 이 세상의 어떤 왕보다도 강대하시고, 가장 존귀한 분이, 함께 함을 신뢰했기에,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결론이다. 의로운 분노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담대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이를 확신한다면, 엘리야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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