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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40825 그릿의 훈련(왕상17:2-7)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4-08-28
  첨부파일:   그릿의 훈련(주일).hwp(91K)

  (2-7)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어느 날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나아가, 나라의 정사를 맡은 자들 앞에서, 큰 소리로 당당하게 외쳤다. (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를 향한, 의로운 선지자의 힘 있는 외침이었다.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빛나는 등불처럼 보였다.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을 향해, 희망의 빛을 비추는, 위대한 사람의 외침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멋지게 출발했지만, 본문을 보면 도망가서, 그때로부터 3년 동안을 몰래 숨어서 산다.

  큰소리를 한번 외치고, 도망친 민망한 모습이 되었다. 엘리야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떠나 숨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2-3)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도망가서 숨으라고 하셨나?

①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아합왕에게 선포했기에, 엘리야를 보호하기 위해, 피신시켰을 것이다. 앞으로 3년 동안 계속될 기근 속에서, 엘리야를 보호해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렇게 피신시켰다고 볼 수 있다.

② 엘리야를 훈련하려는, 하나님의 목적 때문이었다.

엘리야 생애의 절정은, 갈멜산 위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1로, 싸운 결투다. 18장은 통쾌한 장면이다. 이들의 난동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갈멜산 결투 전에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17장 마지막은, 17장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끝난 뒤에 내려진 결론이다. 한 여인이 고백한다.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17장의 사건들 끝에, ‘이제야’라고, 엘리야를 평가한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여러 가지 사건과 과정들로, 훈련 시켰다.

  단순한 엘리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되도록 훈련 시켰다. 단순히 엘리야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로 만들기 위해서 훈련 시켰다. 그것은 17장부터 시작해서, 3번에 걸친 사건을 통한,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

  본문의 그릿 시냇가는, 하나님의 훈련장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훈련받는 훈련장이었다. 이것은 마치 요셉이, 애굽이란 고난 훈련장에서,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모세가 미디안 광야라는 고독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처럼, 훈련받았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이스라엘 전역을 도망 다니면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군림할 준비와 훈련을 했던 것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등장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았던 과정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엘리야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주신 사명을 감당할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이러한 훈련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단번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가 될 수 없다. 꼭 필요한 과정이 있고, 훈련이 있다.

  그 훈련은, 우리 삶에서, 이미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하나님이, 그 훈련 현장을, 지금 준비해 놓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훈련장을 거쳐나가면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신 훈련을 엘리야처럼 잘 받고, 통과해야 한다.

1. 훈련이 필요한 이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순종의 훈련을 시키셨다(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말씀이 순서적으로, 1절에 나와야 할, 말씀이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선지자니까, 하나님 말씀을 받은 후에, 행동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먼저 말씀을 주시고 나서, 그 말씀을 선포해야 원칙이다. 그런데 (1下)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외쳤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는 의로운 분노를 느꼈다.

  (왕상19:10)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라고 했다. 그는 가슴이 굉장히 뜨거운 사람, 열심이 유별난 사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이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에, 왕에게 나와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다고 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경고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인간이 열심을 내면, 여러 사람이 힘들어진다. 그릿 시냇가로 갈 때, 혼자된 사르밧 여인에게로 갈 때, 엘리야는 자기의 뜻으로 가지 않았다.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해서 갔다.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자기가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갔다.

  엘리야가 어느 날 갑자기, 우상 숭배의 현실을 참을 수 없어서, 850대 1로 종교전쟁을 하지 않았다.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하나님께 훈련받고, 영적 전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계속 말씀을 주셨다. 그런데 (17:1)에는, 이런 말씀이 없다. (18:1)은, 3년 동안 기근이 있었다고 했고, (눅4:25)과 (약5:17) 보면, 3년 6개월이라 했다. 그러면 6개월의 공백이 생긴다. 그 6개월 동안, 엘리야는 기도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이 땅에 지금, 비가 내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바알 귀신의 세력을 무찌르고, 살아계시는 진정한 신이 되심을 보이기 위해, 비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도록 보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과연 그 기도대로,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자, 엘리야는 확신을 가지고, 아합에게 나아가 선포했다. (1)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선포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훈련 시켜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나아갔던 엘리야였다. 물론 그것이,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그는 깨우쳐야만 했다.

  자기 뜻, 자기 말, 자기 능력으로, 다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허락해야 함을 알도록,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선포하는 순종의 훈련, 이것이 엘리야에게 필요한 훈련이었다. 이것은 너무 단순하지만, 엘리야에게 꼭 필요한 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열정에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

2. 훈련 내용은 무엇인가(3-4).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엘리야의 심정으로, 이 구절을 보라.

  엘리야는 불타오르는 열정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아합왕에게 찾아갔다. 만일 아합이, 그의 말을 듣자마자, 칼을 든 자들에게 “저놈의 목을 베라.”해서, 단칼에 목이 떨어져도, 후퇴할 사람이 아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용기 있게 아합왕에게 홀로 나아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용기를 가지고 나아갔던 엘리야에게 “너는 거기서 떠나,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 있어라. 그러면 내가 까마귀들을 보내서, 너를 먹여주리라.” 말씀하셨다. 엘리야가 먹고살겠다고 이 일을 했는가? 떡과 고기를 못 먹어서, 목숨을 걸었겠는가?

  하나님을 위해, 자기 일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지금 이런 말씀을 했나? 더구나 숨어 살라고 하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말인가? 거기서 순교하라면, 순교할 텐데,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다. 이해가 안 된다면, 주님을 위해, 멋있게 죽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을, 엘리야는 배워야 했다. 왜 그런 말씀이 주셨는가? 순종은 자기의 생각을, 잘라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릿’은 카라트(잘라내다.) 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내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과 자존심을 잘라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 순종할 수 있기에, 받는 훈련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반드시 지키고, 받아들여야 할,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훈련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은, 짓궂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을 하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수6: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그때 장면을 상상하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갑자기 여리고 성문이 열리고, 창칼을 든 군사들이 나오면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반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해야 했다.

  일국의 국방부 장관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알몸으로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근동 지역을 지배하던 아람의 장관 나아만에게 (왕하5:10中)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하자, 나아만은 자기 생각을 들먹이며 거절했다. 몸을 돌려서 분노하여 떠났다.

  그때 그의 종들이 (13)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겨우 설득하여 순종하자, (14)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순종할 때 역사가 나타났다. 내 마음에 맞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받아들이고, 그 뜻을 따름이 순종의 기본 원리이다. 순종은 내 상식과 논리에 맞지 않지만, 주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해야 한다. 내 뜻과 의지와는 달라도, 주님의 뜻과 의지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름임이, 바로 순종이다.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그릿 시냇가에서 배웠다.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그가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었는데,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다는 뜻이다. 순종의 훈련을 통과해야만, 위대한 인물이 된다.

3.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신뢰하는, 믿음의 훈련(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이런 시냇가로 왜 하나님은 인도하셨나? 시냇가가 아니라, 큰 강물로 인도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릿 시냇가는, 일종의 조그만 실개천이다. 그릿은 요단강의 지류로, 워낙 작아서, 지금은 어딘지도 모른다. 이왕 강물로 인도하셨으면,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7下)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시냇물이 말라버렸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하시려는, 훈련이기에 그릿으로 인도하셨다.

  그릿은 단절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 세계와 완전히 끊어진 채, 아무도 없는, 그 작고 고독한 광야의 시냇가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훈련장이, 바로 그릿 시냇가다.

  상상해 보라.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 저쪽에서 까만 까마귀가 날아와, 무엇을 떨어뜨린다. 두 손을 벌려 받으니, 떡과 고기다. 그것을 맛있게 먹는다. 저녁에 해가 질 때, 까만 까마귀가 날아온다. 다시 엘리야의 손에, 떡과 고기를 떨어뜨린다.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하고 노래한 시편 기자처럼, 엘리야는 하늘의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의 훈련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떼돈을 벌 수 있게 만들지 않는다. 아무 수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멋진 모습으로, 자녀가 자라나도록, 그렇게 만들지 않으신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신다. 저는 교회를 개척한 후, 까마귀들이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로 살아봤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와서, 헌금을 해주셨다. 그것이 바로 (히11장)에 나타나는 믿음의 장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은 나타난다. 그러면 왜 까마귀를 보내셨을까?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을 통해 공급하셨으면, 금방 들통날 수 있다. 그러나 까마귀가 그러면,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바로의 딸 손에 자랄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또 많은 까마귀를 통해, 몇 달을 먹을 양식을 보낼 수도 있지만, 매일 먹을 수 있는 양식만 보냈다.

  광야에서 만나도 40년 동안 먹었지만, 며칠씩 먹을 양식을 주지 않았다. 그때그때 하나님은 양식을 주셨다. 이는 저금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이, 양식을 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신다.

  이런 귀중한 원리를 알고, 그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삶을 맡겨드리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놀라운 섭리가 펼쳐진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믿음의 훈련을 강도 높게 받았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훈련장이 있다.

  그릿 시냇가는, 하나님의 훈련장이다. 하나님은 이런 훈련장에서, 우리를 훈련한다. 세상과 단절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훈련장이다. 이런 훈련을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잘 마쳐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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