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40505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님 (막 10:13-16) | |
작성자 : 윤성은 | 작성일 : 2024-05-08 |
첨부파일: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님(어린이 주일).hwp(90K) |
(13-16)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어린 시절은, 건물의 기초와 같다. 기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홀히 여기면, 무너지게 된다. ‘아름다운 비행’(Fly Away Home)을 보면, 거위 새끼들이, 자기들을 부화시킨 소녀(에이미)를, 어미 새로 착각하고, 그 뒤를 따라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아버지와 10년 만에 만나, 다시 고향을 찾는다. 엄마를 잃은 슬픔과 좁혀지지 않는 아빠와의 거리 사이에서, 에이미의 작은 방황이 시작된다. 학교 수업이 있을 시간, 개발업자들의 횡포로, 속이 훤히 드러난 늪 주위를 거닐던 에이미는, 미처 부화하지 못 야생 거위알을 발견한다.
조심스럽게 집으로 옮겨진 거위알들은, 에이미의 따뜻한 손길 속에, 귀여운 새끼 거위들로 태어난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본 에이미를, 어미 새로 알고 있는 거위들은, 오로지 에이미 곁에서 쉬거나 그녀의 행동만 따라 한다. 서로 엄마가 없는 상황에서, 에이미는 16마리 거위의 작고, 소중한 엄마가 된다.
야생 거위를 집에서 키우면 불법이라며, 경관이 찾아오자, 에이미의 아빠는 거위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기로 한다. 어차피 이 거위들은 철새이기에, 추위가 몰아치기 전,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에이미만 따르는 거위들에게, 아빠의 경비행기는 덩치 큰 물체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아빠는, 에이미를 위한 또 하나의 경비행기를 만들고, 하루하루 어려운 실습을 익혀간다. 드디어 경비행기와 거위들이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하늘을 보면 감동한다. 거위는 알에서 태어나면서 처음 보는 것을 어미로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이를 imprinting(각인)이라고 말한다.
거위나 오리는, 아무리 환경을 바꿔주어도, 태어나면서 처음 본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맹자 어머니가 3번씩 집을 옮긴 이유는, 어린 자식의 뇌에 각인을 걱정해서였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의 삶에, 어떤 자국을 남기느냐가 중요하다.
처음엔 아주 작은 새가 밟고 다녀도, 발자국이 날 정도로 물렁물렁한 땅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 아주 단단한 돌이 되어, 지금은 큰 코끼리가 밟아도, 발자국은 생기지 않고, 깨지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여리기에, 굳어지기 전에는 물렁물렁하다. 누가 무슨 자국을 남기든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어린 시절 좋지 못한 게임이, 뇌에 각인되었기에 일어난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철저히 교육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은 새 발자국이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모습이 있다.
어린아이들의 가슴에, 어떤 자국을 남기겠는가? 예수님은 바쁜 중에도, 어린이들을 사랑해서 축복해 주셨다. 따라서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잘 자라기를 바란다. 어떻게 해야 축복을 받고, 자라게 되는가?
1.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만져 주다.’(핲토마이)는 ‘소속하다, 관계 맺는다. 하나로 묶인다.’이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만져 주심은 축복이다.
예수님이 만져 준 사람마다, 복을 받았다. 맹인의 눈을 만져 주시니, 눈을 떴다(마20:34). 나병환자도 고침을 받았다(막1:41). 귀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혀를 만져 주자, 혀가 풀렸다(막7:33). 따라서 우리의 자녀가,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본문에 나오는 부모들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이, 부모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급선무다. 자녀들도 커지면, 부모님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아이들을 어려서, 예수님께 데려온 부모들은, 참 지혜로운 사람이다. 사실 지혜는, 얼마나 배웠느냐에 있지 않다.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을 만나고, 연결될 때 지혜가 생긴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를 믿음으로 기른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자란다면, 시련의 가뭄이 와도, 환란의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성공적으로 자라게 된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예수님이다. 따라서 우리 자녀들이 지혜의 근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학문을 알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무지한 자다.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은, 절대로 돈이 아니라 예수님이니, 예수님께 자녀들을 데리고 온, 부모님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부모님은 자녀들이, 복의 근원 예수님께 나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신령한 복을 자녀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부모님이 신령한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 대표적 사건이, 한나와 엘리 제사장이다. 엘리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녀로 키우겠는가? 한나처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겠는가?
우리는 둘 중에,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선택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축복받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 ‘꾸짖다’는 ‘조용히 해라…’ 이런 뜻이 아니다. ‘꾸짖다’(에피티마오)인데,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으실 때, 사용된 말이다.
예수님은 ‘귀신아, 물러가라.’ 하듯이 소리치며 꾸짖었다. 이처럼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꾸짖자, 어린아이들은 무서워 떨었다. 그만큼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하찮게 여겼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무시함은, 유대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야, 의로움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 품에 안긴 어린아이들은, 선악은커녕 좌우도 분별할 수 없으니, 무슨 의를 행할 수 있는가? 그래서 엄격하게 금하고, 꾸짖었다.
2. 어린이의 인격을 인정하시는 예수님(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는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어린이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당시 관습으로 볼 때, 제자들은 크게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관습을 뛰어넘어서, 아이들을 어른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했다. (14下)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는 깨끗하고, 죄가 없기에, 천국에 간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다(공경하여 모시다, 소중히 대하다) 받아들이지(데코마이)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잘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은, 0%라는 말이다.
어린아이들은, 잘 받아들이기에, 그대로 배우고, 유괴하기도 쉽다. 받아들임이 믿음이다. 어린아이는 착한 일을 할 능력도 없고, 잘 배우지도 못했다. 베풀어 주는 은혜를, 기쁨으로 순수하게 잘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스펀지처럼, 그냥 받아들인다.
이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다. 따라서 영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함은, 교회만 왔다가는 믿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 들음이 신앙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어도, 아직 마음 문을 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 아니다.
따라서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마음이 어린이에겐 있다. ‘찰스 브론디’라는 줄타기 곡예사가, 장대 하나만 가지고, 나이아가라 폭포 이쪽과 저쪽 끝에 줄을 걸고, 줄 위에서 관람객에게 말했다. “내가 이 줄을 타고,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물론 믿지요.”
“그러면 내 어깨에 사람을 앉혀서, 함께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할 수 있지요.” “그러면 내 어깨 위에 앉아, 함께 이 줄을 건너갈 사람 나오세요.” 그 순간 사람들은 침묵하고, 어느 한 사람 나서지 않을 때, 한 소녀가 일어나서, 브론디 앞으로 나아갔다.
곡예사는 그 소녀를 어깨에 태우고, 반대편까지 무사히 건너갔다. 바로 이 소녀는, 곡예사 브론디의 딸이었고, 아버지를 믿었기에, 어깨에 올라탈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고 따른다.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3.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예수님(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은 먼저 아이들을 안아주셨다. 또 그들 위에 안수하셨고, 축복하셨다. 우리도 이 방법을 배우고, 실행하기를 바란다.
(1) 안아주라.
안아주었다는 말은, 두 손 벌려서, 가슴에 품어 주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넓고, 가장 푹신한 품은, 주님의 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따뜻한 품은 주님 품이다.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의 자녀들은, 주님 품에 안겨 산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키움은, 주님 품에 안기도록 하는 일이다. 자녀는 부모님의 따뜻한 체온에서, 사랑과 평화를 맛본다.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가 실험한 결과다. 2마리 어미 원숭이 모형을 만들었다.
하나는 차가운 철사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따뜻한 헝겊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철사로 만든 어미의 목에, 젖병을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새끼 원숭이들은, 젖병을 매달아 놓은, 철사 원숭이에게 가지 않았다. 오히려 젖병은 없는 헝겊으로 된 원숭이에게만 갔다.
어쩌다 젖을 먹을 때에도, 몸은 헝겊 어미 쪽에 두고, 목만 길게 빼서, 젖병을 끌어당기곤 했다. 이 실험으로, 자녀가 부모에게 사랑을 느낌은, 접촉에서 오는, 따뜻한 사랑 때문임을 증명했다. 사랑으로 안아줄 때, 자녀는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낀다. 자녀들을 자주 안아주고, 다독여 주기를 바란다.
(2) 안수해 주라.
예수님은 승천했기에, 직접 손을 얹으실 수가 없지만, 당신의 종들을 통해 얹어서, 아이들을 축복한다. 그러면 아이들에게 안수하는 권한이, 그러면 목회자에게만 주어졌나요? 아니다.
부모, 조부모에게도 주어졌으니, 안수하기를 주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자주 하시기를 바란다. 손이 닳도록 자주 얹고, 축복해 주기 바란다. 부모는 자녀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는 예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안수는 부모님의 사랑을, 손에 얹어서 표현한다.
권위 있는 부모님이 되고 싶다면, 자녀의 머리에 자주 손을 얹기를 바란다. 순종하는 자녀로 키우고 싶다면, 자녀에게 자주 안수하라. 꼭 안수기도하지 않더라도, 자녀에게 자주 손길을 주라. 식물조차도 자기에게, 손길을 자주 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사람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랑을, 손으로 표현하기를 바란다. 미움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미움을 배우며 자란다. 매를 맞으며 자란 아이는, 폭력을 행하게 된다. 놀림을 당하며 자라난 아이는, 수줍음을 타게 된다.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용서받은 아이는, 남을 용서할 줄 알게 된다.
관용 속에 자란 아이는, 참을성 있는 사람이 된다. 격려를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신감을 느끼면서 자란다.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는, 감사할 줄 안다. 공정한 대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올바름을 배우게 된다. 안정 속에 자란 아이는, 믿음을 갖게 된다. 기도로 자란 아이는, 희망을 꿈꾸는 사람이 된다.
축복 속에 자란 아이는, 남을 축복하며 자라게 된다. 우리의 자녀가 이 세상을 품고, 이 세상을 축복하는 아이들이 되기를 바란다.
(3) 축복해 주라.
축복하다는 ‘율로게오’다. ‘유’(좋은) + ‘로고스’(생각, 말) = 칭찬하다, 축복하다, 번영을 빌다, 감사하다, 찬양하다는 말이다. 칭찬을 하나님께 사용되면, 찬양한다는 말이다.
마음껏 계속 축복해 주셨다. 축복은 부모의 사랑을, 입술로 표현하는 내용이다. 가장 거룩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님이다. 꼭 눈을 감고 기도하지 않아도, 자녀를 축복하는 말을 하라. 자녀의 가슴에 상처 주는 말은, 삼가기를 바란다. 의도적으로 축복의 말을 하려고 하라.
롤프가복은 “하루에 한 번씩, 자녀를 축복하라.”고 했다. 우리 자녀들에게, 매일 축복하는 말을 하라. 그래서 그 축복의 말이, 자녀의 비전이 되게 하라. 사랑을 입술로 표현하기 바란다. 꾸지람 속에 자란 아이는, 비난하는 것을 배운다.
말씀을 맺겠다. 우리가 부모로서 해야 할 첫 번째 사명은, 우리의 자녀가 축복의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해야 한다. 최고로 효과적인 방법은,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길이다. 그렇게 하러면, 우리가 먼저, 말씀 위에 확고하게 서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신령하고, 거룩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란다.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라. 예수님이 자녀들을 축복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를, 자주 안아주고, 우리 손이 닳도록, 안수해 주기를 바란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축복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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