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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31119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마16:13-20)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3-11-25
  첨부파일: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주일).hwp(92K)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영과 진리로 올려드리는,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믿음의 신앙고백 위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교회를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주님을 만나고, 또 그 말씀을 들으며, 부르신 소명과 사명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한마음으로 교회에 모이게 하시고, 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성령 충만한,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3-20)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세상 한복판에 세워져서, 늘 승리하는 교회다. 세상을 바꾸고 정복하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교회다. 하나님의 능력이 넘치는 교회,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변화를 체험하고, 모두 행복에 넘치는 교회다.

  본문은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하신 말씀이다. 가이사라 빌립보는, 헤롯의 아들 빌립이, 대도시를 건설하고 로마 황제(카이사르), 가이사의 이름과 자기의 이름 빌립을 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 지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황제 이름이 붙인 도시가 많았지만, 아무 도시나 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이어야만 했다. 형편없는 마을에 로마 황제의 이름을 단다면, 황제에 대한 불경이 되었다.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인구와 도시 규모가 필수적이었다. 도시 한 가운데나,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황제의 신상을 반드시 세워야만 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었다. 따라서 황제 가이사의 이름을 붙였음은, 이 도시가 조그마한 도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이 도시 한 가운데에는,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는 신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도시를 배경 삼아,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13下)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빈들 위에서, 던져지지 않았다. 황제의 신전이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를 배경으로 던져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상과 죄악의 도시 한복판에 세워지기를 원한다. 수리아(시리아)는 바알 숭배 중심지였다. 그곳에 14개의 바알 신전이 있었다.

  바알에 대한 예배는,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과, 음란한 행위들이 함께 진행되었다. 또 이 근처에는 큰 언덕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치료의 신, 판의 출생지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수리아의 바알 숭배와,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죄악이 창궐했던 곳이었다.

  거기다 웅대한 황제의 신상이,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빌립보였다. 화려한 세상 종교들 속에서, 모든 부도덕한 범죄들의 한 가운데서, 겨우 12명의 제자를 거느린, 집도 없고 돈도 없던 예수님께서 (18)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정말 놀라운 선언을 하셨다.

1. 세상에 기죽지 않는 성도가 되자.

우리는 현대교회가 부흥하고, 번성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교회에 대하여, 너무 비호의적이며, 반기독교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가이사랴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질 당시의 상황은, 이런 핑계를 무색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세계를 정복했던, 로마 황제의 신상을 바라보며, 우상의 동굴 밑에 둘러서, 가이사랴 빌립보 땅을 함께 밟고 서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13)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주님을 칭송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가이사랴 빌립보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결코 칭송이 아니다. 화려한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 마르고 초라한 옷, 거지 일행과 다를 바가 없다.

  갈릴리 빈민 출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색은, 로마 황제 신전 문지기보다, 더 못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당신과 같은 모습을 지닌 분은, 로마 황제처럼, 살아있는 신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기껏해야 이 땅에서 일했던, 유대 선지자 중, 한 명 정도로 생각한다는 의미다. 주님은 다시 물으셨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는 누구라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 신상 앞에서, 주님은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했다. (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허허벌판 위에서 행해진 고백이 아니라,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드려진 고백이다.

① ‘주는 그리스도시요’ 원문에는 ‘주’라고 하지 않았다. ‘당신’(쉬)은 그리스도다. 세상 사람이 당신을 주목하지 않지만, 당신은 그리스도이다. 저 웅장한 로마제국의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다. 비록 초라한 모습이라도, 당신이 구원자라는 의미다.

②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외관상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지, 당신은 하나님이시다. 베드로는 이것을 고백했다.

  신전에서 인간에게 추앙받고, 경배받는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 그 신전의 문지기보다 못한 옷을 입고 있을망정, 당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황제의 신전 앞에서, 옹색한 모습의 예수님을 향해서 드려졌던 고백이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당신의 가치관을 따르겠다는 고백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제의 가치관과, 로마 제국주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영원하신 당신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비장한 결단이요 각오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고백은 허허벌판이 아니라, 황제의 신전이 있는, 황제의 도시 한복판에서 했다. 따라서 주님을 향해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이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셨다. 눈에 보이는, 웅장한 황제의 도시, 신전 앞에서, 거지 같은 모습의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알고, 따르기로 고백하였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주어지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그 신앙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화려함보다, 역사의 뒤편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커다란 손길을 보지 않고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

  교회가 무엇인가?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의 가치관에 노예 됨이 없이, 그 가치관을 뛰어넘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교회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따라 살겠다는 각오와 고백이 있어야 한다.

2.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황제의 땅에서, 황제의 가치관과 황제가 주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겠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정말 기뻐하셨다.

  (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내가 시몬의 인생을 바꾸겠다. 내가 너를 변화시키겠다. 너는 이제 베드로다. 너는 지금까지 문제투성이 시몬이었다. 크고 작은 결점들, 충동적인 실수와 실패들로 가득찬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너의 신앙의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보게 된 사람들을 통해 세워진다. 약점 많고, 허물 많은 베드로지만, 신앙고백 하는 사람들 위에,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세우신다.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한 베드로이지만, 베드로는 금방 흔들렸다. 사탄에게 이용당했다.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올라가시겠다는 예수님을 가로막았다.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붙들고는, 데리고 갔다는 말이다. 항변은 꾸짖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너의 연약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의 권세로 교회를 세우겠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을 반석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이다. 교회는 인간의 연약함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인간의 연약함은 가려진다.

  교회는 우리 위에 세워진다. 연약하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고 번식되고 확장된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요 비밀이다. 우리의 축복이다. 우리가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베드로다. 우리의 집에서 목장이 모이면, 우리의 집은 영광스러운 교회다.

  예수님은 (18) “…내 교회를 세우리니…”하셨다. 예수님에게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었다.

① ‘내 아버지’(17)라고 고백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고,

② ‘내 교회’라고 불렀던, 주님의 몸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교회가, 예수님의 애정의 대상이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내 교회라고 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모든 교회를 붙들고 보호하시는, 한 주인이 나온다. (계2:1)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세상의 모든 교회를, 붙들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다.

  모두 다 변한다. 나라도, 사상도, 사랑도, 제도도, 종교도, 철학도 변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이루어 가기에, 믿음과 신뢰, 든든함이 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집에서 목장교회로 모이시기 바란다. 거기 주님이 계신다.

3.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18中).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권세’는 권위가 아니다. “대문”(퓔레)이라는 뜻이다. “음부의 대문이 이기지 못하리라.”

  지옥의 대문이, 결코 교회를 흔들어 댈 수 없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와 음부라는, 커다란 성을 그려보자. 음부에서 쏟아져 나온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교회 성을 공격한다. 엄청난 공격을 한다. 교회라는 성이, 그 공격 앞에 흔들거리며,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반석에 세워진 교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공격이 거세지고, 지속되어도, 교회는 신기하게 잘 버틴다. 예수님이 꼭 쥐고 계시기 때문이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는 2000년 동안 버티어 왔다. 전통적인 교회의 그림이지만, 예수님께서 그린, 교회 그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디자인하신 교회 그림은, 이처럼 소극적이고 수비적이고, 무력해 보이는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라는 성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와, 지옥문을 두드려 깨부순다. 교회가 세상의 공격 앞에, 수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한다.

  음부가 수비에 나서지만, 교회 공격을 견디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리신, 교회 그림이다. 성경 해석이 바뀌면, 신학이 바뀐다. 신학이 잘못되면, 삶이 잘못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세상 앞에서 쩔쩔매는, 수비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교회를 보고, 자신감 있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공격에 나서면, 세상의 어떤 견고한 진도, 깨지고 만다. 교회는 악령에 붙들린 사람들을 구원해 낼 때, 세상의 견고한 진을 파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건져낼 때,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영적 전쟁이다.

  우리가 수비적인 그림을 그렸을 때는, 전도가 겁이 난다. 그러나 교회가 공격에 나서면, 음부의 견고한 성문이 깨진다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 믿고, 음부의 성문을 깨부수러 나서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의 공동체다.

  사탄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포로 된 자들을 구원해 내는 구조대다. 공격하면 하나님이 이기도록 역사하신다. 세상의 견고한 진은, 겉보기에는 굉장해 보이지만, 막상 교회가 공격에 나서면, 벌벌 떨게 되어 있다. 예수님의 이름, 성령님의 능력, 예수님의 보혈은, 음부의 권세를 깨부수는 핵폭탄이다.

  일순간에 마귀의 성이 무너진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의 무기 들고 나가면, 음부의 문들은 모두 열린다. 성령님의 능력 앞에, 지옥의 문들이 부수어진다. 보혈의 능력 앞에, 견고한 진들이 보기 좋게 무너진다. 교회는 지옥의 대문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군대다. 이런 교회를 만들어 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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