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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31008 생명의 말씀은 사랑이다(요일1:1-4)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3-10-11
  첨부파일:   생명의 말씀은 사랑이다(주일).hwp(93K)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영과 진리로 올려드리는, 저희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삶 가운데 연약함으로 흔들리고, 어리석어 넘어지는 저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결실의 계절, 10월을 맞아, 주 안에서 결심하고 계획했던 모든 일들 돌아보게 하시고, 영육 간에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어떤 형편과 상황 가운데도, 내 모든 삶의 자리에서, 성도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복음 전도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 예배 가운데,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큰 은혜와 기쁨이 임하기를 원하오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세종 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셨다. 한글을 창제하신 이유는, “나라의 말이 중국과는 달라, 문자(한자)와는 서로 맞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세종 대왕은 백성을 사랑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 백성이 한문을 모르기에,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 잘못되는 경우가 많아,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편지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엔, 교회 안팎으로 믿는 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정치권력자들이, 믿는 자들을 핍박했고, 내부적으로는 이방 세속문화가, 교회 문화를 혼탁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핍박받으면서, 동시에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교회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가?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어려운 시대, 소망 없어 보이는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현실은 비록 어렵고 힘들고, 소망이 보이지 않아도, 교회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전하며, 이길 수 있다고 전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할 때가 많다.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든 생각에 숨는다. 그 속에서 어려운 현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지만, 해결되는 것이 없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 죄를 해결하심으로, 이미 영생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현실의 어려움, 핍박, 혼란을 영생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영생이 이미 우리에게 있으니,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영생이 무엇인가?

  (요일5:20中)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영생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이 있다.

1.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도 요한은 이 ‘생명의 말씀’을, 크게 2가지로 이야기한다.

①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에도 계신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신다. 어느 곳에도 있고, 항상 신실하신 주님이, 항상 함께하기에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불신하고, 삶과 환경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늘 바뀌고 변하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수시로 바뀌기에, 어느 것 하나, 믿고 의지하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도, 가장 믿어도 변하기에, 당황하게 되고, 믿지 못한다. 인간은 변하기에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신뢰할 수 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진리다.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

  과거의 문제로, 지금 힘들어하는가? 우리의 모든 과거를 알고 계신, 예수님을 신뢰하라. 내 과거의 아픔들을 모아서, 성숙하게 만들어 가는,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 미래가 불안하면, 과거에도 나와 함께 계셨던 주님이, 미래에도 함께한다고 신뢰하기를 원한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빈 그물만 걷었다. 배에는 잡은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다. 예수님은 그 배에 올라 (눅5:4)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믿고 순종하자,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고, (마4:19)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한마디로 인해 빈 그물, 빈 배만 몰고 다니던 어부 베드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놀랍게 쓰임을 받는 사도 베드로로 변화되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울은,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가는 도중 다메섹에서 (행9:5)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음성을 듣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이후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안의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생명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빈 배와 같은 삶,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던 삶이 바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우리를 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2.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② 생명의 말씀은 우리와 함께했다. (1中)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봤다고 했다.

  영원토록 변함없는 생명의 말씀이, 문자,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듣고 보고 직접 체험한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실체를 믿는 종교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 단순히 누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 아니다.

  (요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사도 요한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었다. 요한은 실제로, 예수님의 호흡을 느끼고, 박동을 느낄 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할 때, 사도 요한을 통해서 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고, 심장의 박동을 느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높고 위대한 그곳에만, 계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실제로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같이 먹고 마시며 울고 웃으며 함께 계신다.

  사도 요한의 증언은, 그림으로 본 것도 아니요, 영화로 본 것도 아니다. 자신이 직접 안긴 예수님을 체험한 그대로 선포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다. 생명은 직접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인할 수 없는, 너무 뚜렷하고도 온전한 증거를 보여주고,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세종 대왕은 작은 초가집을 짓고 평복을 입고, 백성들과 고통을 같이 나누었다고 한다. 몰래 민정 시찰하면서, 백성들의 아픔을 친히 느꼈다고 한다. 보고 듣고 만지는, 체험이 중요하다.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며, 우리를 다시 소생시키기를 원하신다.

  (사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많고, 허물 많은 우리에게 오셨다.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오셨다. 그분은 누구나 외면하는,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화려한 예루살렘에서 수난당하고, 많은 군중 가운데 갈보리 언덕에서 죽었다.

  주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 상처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그분이 오셨다. 살았으나 죽은 것처럼,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인류 최대의 이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도 요한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나와 사귀자는 말씀보다, 더 위대한 언어가 또 어디 있겠는가?

  태초부터 계신 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찾아와, 친구가 되자고 했다. 친구는 인간이 가진 관계 중, 가장 아름다운 관계다. 친구는 모두 내어줄 수 있는 관계다. 우리는 어떤 친구와 교제하는가? (삼상18장)은,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아름다운 친구의 관계로 이야기하고 있다.

  (삼상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음은, 서로 생명처럼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생명을 나눠주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친구는,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친구다. 자기를 포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친구가 되어, 모든 것을 주셨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났다고 하자.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시 살아났고, 삶이 변했다. 삭개오, 세리 마태, 남편 다섯 있는 여인, 제자들이 그랬다. 오늘 우리도 그랬다.

3.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사랑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통한, 회복의 은혜가, 온 땅과 세계로, 흘러넘쳐야 한다고 말한다. 사귐은 사랑이다. 사귐은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고, 희생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무엇을 나누어 주고, 무엇을 채워줄 수 있는가? 예수님과 사귐을, 나누어주라.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면, 무엇을 전하고, 나눠줄 수 있는가?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내 인생이 빈 통인데,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경험과 사랑은, 나눌 수 있다.

  예수님으로 인한 사랑과 은혜, 용서의 체험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기가 불가능하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쉽게 좌절한 적이 있는가? 믿음이 싸구려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가? 예수님과의 만남에,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스치듯 만났기에, 주님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심코 넘기는 책장처럼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위해서, 나의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겠는가?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깊이 체험해야 한다. 그분만이 나를 용서하는 온전한 분임을 경험해야, 온전히 용서할 수 있다.

  내 인생의 믿음의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이런 영적 체험 없이, 무엇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을 듣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랑의 영적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시간이 갈수록, 그 깊이와 넓이가 더해지기를 바란다.

  순간마다 사건마다 상황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우리를 불같이 일으켜 세우고, 이끌고 가기를 축원한다.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참된 기쁨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진정한 사귐은, 완전한 기쁨을 선물로 준다. 우리는 진정한 사귐을 통해, 주님께 인정받고, 사랑받게 된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음은, 매우 기쁜 일이다. 우리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알 수가 없는 기쁨이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다. 예수 안에 참된 사귐을 누려야 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기쁨이 우리 안에 흘러넘친다. 예수 안에 참된 기쁨이 있고, 참된 생명이 있다. 생명의 예수님이, 우리 삶 중심에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 이 삶을 누려야 한다. 한글을 사용하고 누려야만, 얼마나 편리한지 알게 된다.

  예수님과 깊은 사귐이, 온 땅으로 흘러넘쳐, 온 땅을 회복하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과 이 백성이 생명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

  교회에 환란과 핍박이 심하고, 이단사상이 만연할 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 충만한 기쁨을 누리라는, 오늘 말씀을 굳게 잡고, 담대히 나아가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뜨겁게 경험하고, 받은 은혜를 전하며, 생명을 살려내는데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과 누림으로, 언제나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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