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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30917 패역하고 완악한 세대(눅7:31-35)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3-09-20
  첨부파일:   패역하고 완악한 세대(주일).hwp(90K)

  하나님 아버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거룩한 주일, 찬양과 경배로 예배드리오니,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아주시옵소서.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가 소홀해지고, 기도의 능력이 힘을 잃고, 찬양의 감격이 희미해진 저희들의 심령과 삶을 회개하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너희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며, 주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은혜와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예배를 통해, 말씀과 기도의 삶, 찬양과 감사의 삶을 회복하고, 성령 충만의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31-35)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가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침례 요한의 지시를 따라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요한이 베푸는 침례를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요한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했다. 요한의 지시대로 회개하거나 침례받지 않았다. 침례받으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개할 죄가 없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늘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해서, 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요한을 비난하고 매도했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는 죄를 저질렀다. 패역하고 완악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상태를 설명해 주셨다. 물론 이 교훈은, 종교 지도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백성들을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모든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것이 비유로 설명되었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모르기에, 함께 하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장터에서 노는 아이(31-32).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스라엘 전통에 따르면,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한다. 결혼식과 장례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피리와 애곡은, 기쁨과 슬픔을 대표한다. 아이들은 장터(아고라, 회합 장소)에 앉아서, 서로 상대를 불러 초청하며 놀았다.

  그들 중에 한 무리는, 결혼식 놀이를 하기 원했고, 다른 무리는, 장례식 놀이를 원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무리에게, 자기가 하는 놀이를 하자고 했지만,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명의 소년과 소녀들이, 장터에서 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재미있게 놀기를 원했다.

  처음에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를 원했다. 결혼식 놀이를 하려면, 신랑과 신부, 연회에서 피리를 불, 연주자와 함께, 춤출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이 역할을 할 사람들을 정했다. 그러나 놀이가 시작되자, 춤을 추기로 한 아이들이, 춤을 추기를 거절했다.

  그들은 춤추는 일보다는, 슬프고 엄숙하게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슬픈 장례식 놀이를 하기로 했다. 장례식 놀이를 하려면, 시체가 되어서 누워 있을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해, 우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아이들은 이 역할을 맡을 사람들을 정했다.

  그러나 장례식 놀이가 시작되자, 울기로 한 아이들이 울기를 거절했다. 우는 일보다, 즐겁게 놀기를 원했다. 그래서 결국 아이들의 놀이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배역을 맡고서, 그 일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32中)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피리를 불었다. 복음은 피리를 부는 기쁨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가져가, 멸망에서 구출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라는 선포다.

  이 선포는 정말 기쁜 소식, 즉 희년이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기쁨에 대해서 ‘춤추지 않았다'. 또 주님의 복음은, 죄에 곡하고 울어야 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죄와 임박한 멸망을 깨닫고, 회개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완악한 이 세대는, 죄를 회개하기 위해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11:16-17).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책망했다. 바리새인들은 어떠한 미덕을 가진 선지자가 왔어도, 그 미덕을 꼬투리 잡아 비난하는, 흑색선전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을 비난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어떠한 미덕도, 비난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이웃을 잘 도와주는 사람이면, 돈이 아까운 줄 모르는, 망나니이고, 아껴서 저축을 많이 한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구두쇠라고 비난한다. 그러니 예수님이 볼 때, 얼마나 답답한가? ‘이 세대’는, 부정적 색깔의 사람들,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사는 모습이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내로남불), 우리를 보면,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뜻과 자기 마음에 들기만을 원한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는, 놀이하는 아이들처럼 함께 하지 않고,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한다. 하나님의 일과 계획은 무시당한다.

2. 어울리지 않는 세대(33-34).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이 놀이에서 함께 어울리지 못한 것처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함께하지 못했다. 장례식 놀이와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한 아이들을,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다. 장례식 놀이에서 울기를 거절하고, 결혼식 놀이에서 춤추기를 거절한 아이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말을 거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완악하여 어느 쪽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침례 요한은 이 세상에 와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회개(애곡)하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요한이 귀신이 들렸다며, 회개하기를 거절했다.

  회개하지 않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인자’(단7:13-14, 호 휘오스 안드로푸)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죄인들과 함께 음식도 먹으며 사역하셨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엄숙하고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며, 예수님을 음식이나 탐내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악한 자라고 했다.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 선포한 진리에는, 아무 관심이 없이 비난만 했다. 이것이 세상의 본질이다. 이 세상은 진리에 무관심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생트집 잡아, 배척하기 일쑤다. 세상이 악하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위해, 가장 위대한 선지자 침례 요한과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보내주셨다. 그러나 침례 요한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그분들이 전하는 메시지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요한과 예수님을 비난하고, 헐뜯으며 죽이려고 했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에는, 위대한 선지자와 하나님의 아들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목사가 피리를 불면, 성도들이 장단을 맞춰 춤을 춰야, 신이 나고 목회가 잘된다. 목사 혼자만 피리를 부는 모양새는, 보기에 좋지 않다. 장단을 맞춰주어야, 좋은 공동체가 된다.

  우리는 한 공동체다. 한배를 탄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 사람은, 왼쪽을 향해 노를 젓고, 다른 사람은 오른쪽을 향해 노를 저으면, 그 배가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 믿음이 자라나야 한다.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다운교회를 이루고 있다. 이 일은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감이 떨어져 내 입으로, 들어 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 주님은 믿음을 요구한다. 때론 우리 헌신과 희생도 필요하다. 저는 성도들에게, 피리 소리에 맞추고, 장단 맞추자는 정신을 요구한다. 우리 헌신과 인내로, 올해에는 우리 교회가 새롭게 정비되고, 크게 부흥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바라보자고 외친다.

  그런데 춤추기를 싫은데, 왜 자꾸 피리를 부는 거야? 한다면, 그 놀이는 계속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 요구와 기대를, 이루어주기 위해 오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셨다. 성도는 영적 문제에 반응이 빨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목회자를 통해서, 우리 죄를 지적하실 때는 애통해하며, 신속하게 반응하여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의 기쁜 소식에, 감격하며 기뻐해야 한다. 그래야 영혼이 살아있는, 정상적인 신앙인이다.

  숨은 붙어 있지만, 자극에 반응하지 않으면, 뇌사자로 판정되듯이, 죄를 지적해도,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어도, 반응하지 않으면, 그의 영혼은 죽어 있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 내 마음에 드는 복음은 없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야, 부활의 영광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3. 지혜는 그 열매로 인정받는다(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결론이다. ‘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이스라엘 땅에 왔지만, 오히려 배척당한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말과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그들은 절제하며, 금욕적인 삶을 사는, 침례 요한을 보고, 귀신에 들렸다고 비난했다.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을 보고, 탐욕스러운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유대 지도자의 이중적 태도는, 그들이 빛의 자녀가 아니라, 어둠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에 의해, 증명되고 나타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당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상대하며, 그들의 친구라는 명성을 얻어야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잘못을 지적하자, 그들은 원수가 되고 말았다. 이 모습은 제자들에게도, 지혜롭지 못하게 보였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는, 자기의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고 증명된다고 했다. 구원받은 자들이 증명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받아들인 자들이 구원받았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준다.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나? 그들이 자부하던 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된 지혜는 말과 행동을 통해, 선한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빛을 따르는, 지혜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산다. 복음을 믿고, 성령님을 따라 산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는, 성령님의 선한 열매가 나타난다. 그러나 어둠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녀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금식하고, 회개해야 할 때, 향락에 빠지고, 즐겁게 살아야 할 때는, 금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복음을 거부하고, 성령님의 뜻을 거부하고, 육신의 뜻대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중적인 삶을 살며, 육신의 악한 열매를 맺는다. 오늘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부와 명예, 학벌, 권력을 가져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 가장 중요한 인생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심을 받아들이라.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빛의 자녀들인가? 아니면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며, 육신의 악한 열매를 맺는 어둠의 자녀인가? 내 중심이 아니다. 십자가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것도, 나를 높이지도 않는다. 내가 죽어야, 부활의 열매를 맺는다.

  지나간 몇 년 동안, 우리는 원하지 않게, 마스크를 쓰고 생활했다. 우리가 많이 듣던 말, 거리두기, 비대면, 될 수 있으면 모이지 말라. 이러한 말들을 들은 결과, 단절, 고독, 코로나 우울증이 생겨났다. 사람은 서로 만나야 한다. 만나서 정을 나누며 살아갈 때,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은 모이기를 페하지 말라. 그래서 교회에서 모이라고 해도, 습관이 되어 모이지 않는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 교회 일에는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교회 일에 함께하는가? 이런 지혜로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예수님의 때보다 더 어둡고, 더 완악해진 지금, 함께 울지도 않고, 함께 춤추지도 않는, 이 세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엘리사가 구했던 갑절의 영감을, 오늘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옵소서.

  죄악이 더해가고, 예수님과 복음을 외면하고 거부하는 이 마지막 때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며, 더 뜨거운 사랑과 복음 전도의 삶을 사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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