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30910 낙심을 극복하라(느4:4-5) | |
작성자 : 윤성은 | 작성일 : 2023-09-13 |
첨부파일: 낙심을 극복하라(주일).hwp(88K) |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영과 진리로 올려드리는,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저희 심령과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과 멀어지고, 예배가 소홀해지고, 기도의 간절함이 식어진 모습을 회개하오니, 긍휼히 여겨주시고, 새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우리 삶에 당연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저희들의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법도와 율례를 힘써 지키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알고,
결코 그 본분을 잃어버리지 않는 성도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그 은혜를 갈망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하오며,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4-5)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터에서 죽은, 미국 군인은, 약20만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 본토에서 자녀를 전쟁터에 보내고, 근심이 깊어져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약1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방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보다, 근심하다가 죽은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근심은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삶을 무너뜨린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앞을 향해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먹고 사는 것 때문에 근심,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근심, 어디 아플까 봐 근심…, 근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근심, 또 근심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성전과 성벽 공사를 할 때, 기쁨이 넘치고 행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방해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뜻있고 좋은 일, 귀하고 보람 있는 일을 하다, 반대에 부딪혀서, 낙심한 경험이 있는가?
낙심은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의욕을 잃게 만든다. 말도 하기 싫고, 밥맛도 잃게 된다. 만사가 귀찮고, 아무 일도 생각도 하기 싫어진다. 기운이 빠져, 어깨가 늘어진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아주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이렇게 낙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병이 될 수 있다.
낙심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신앙인도 낙심할 수 있기에, 우리는 낙심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다가, 중단할 정도로, 낙심한 적이 있다. 따라서 낙심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1. 유다 백성은 왜 낙심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대적들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산발랏은 예루살렘 성이 재건됨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크게 분노하고 비웃었다. (2中)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며, 이 엄청난 일이, 이루려고 하는데,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라며 조롱했다.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이 더 문제인데, 그는 약 올리려고 빈정거렸다.
여우가 올라가서 무너질 성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악한 감정을 품고, 그들이 행하는 일을 비판했다. ‘판단’과 ‘비판’을 구별해야만 한다. 판단은 좋은 뜻으로 쓰이고, 비판은 언제나 나쁘게 쓰인다. 성경은 판단을 장려하지만, 비판은 금한다.
우리는 구분하지 않고 ‘비판’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판은, 생산적인 비판과 파괴적인 비판으로 나눌 수 있다. 성경은 생산적인 비판을 장려하고, 파괴적인 비판을 경고한다. 생산적인 비판이란 무엇인가? 비판은 동기가 사랑이며, 비판의 목적이, 긍정적으로 남을 돕기 위해, 올바른 수단과 방법으로 한다.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안목이 열려 있어야만, 똑바로 행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비극은, 지도자들이 생산적인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안목이 없다. 생산적인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문제가 된다. 생산적인 비판은 좋지만, 파괴적인 비판은 경고한다.
그릇된 동기로 하는 비판, 부정적 목적을 위한 비판,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비판이다. (마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들은 성 쌓은 일을, 파괴적인 비판,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벽 건축만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돕고 허락하신 사역을 비판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비판했다. 또 산발랏과 도비야에게서 시작된 비판은, 점점 주위로 번져서, 비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괴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주변에는, 항상 비난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렇기에 (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면, 불행한 인생이다. 파괴적인 비판에 동조하는 사람은,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못살게 하는 사람이 된다. (11)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이런 악한 생각을 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유다 동, 남, 북의, 삼면의 대적들이, 조롱하고 멸시하고, 위협하며 방해하자, 유다 백성은 낙심하게 되었다.
우리도 대적에게 둘러싸여 방해받으면, 낙심하게 된다. 마귀의 전략 중에 하나가, 김 빼기 작전이다. 사탄의 가장 큰 무기는 낙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새 힘을 부어준다. 위로의 하나님이다. ‘보혜사’는 ‘위로하기 위하여, 내 곁에 오신 분’이라는 말이다.
(2) 할 일이 너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적들에게 둘러싸인 백성은, 조롱과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들의 눈에 흙무더기가, 아직 많이 남았다고 보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눈앞에 남아 있는 일은, 더욱 많아 보인다. 일이 많아 보이면 낙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성을 건축할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아, 그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낙심하게 되었다.
(3)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10下).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유다 백성들은, 흙무더기를 옮기는 일꾼들의 힘이, 다 빠졌기에 낙심했다.
대적들은 방해하고, 아직 할 일은 산더미 같고, 육신의 힘마저 빠질 때, 낙심하게 된다. 짐이 문제가 아니라, 육체의 힘이 빠짐이 문제다. 고치기 어려운 병이 문제가 아니다. 힘이 빠짐이 문제다. 그래서 두려움 가운데 포기하면, 우리는 병에게 지고 만다. 사명을 끝내지 못할 수 있다.
2. 유다 백성처럼 낙심할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
(1) 합심해서 기도해야 한다(4-5).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유다 백성들은, 대적들이 조롱하고, 멸시하는 상황에서,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였다. 대적들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낙심을 극복할 수 있다. 대적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낙심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대적들이 우리를 욕한다면, 우리를 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노를 격동시키는 일임을 기억하면, 낙심을 극복할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울분을 터뜨리기보다, 우리 힘과 방패가 되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합심하여 기도할 때 낙심을 이길 수 있다.
(2) 현재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느헤미야는 기도만 하고, 게으르게 누워 있지 않았다. 기도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전념하였다.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대적들이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백성이 최선을 다해 일할 때, 얼마 안 가서, 성벽 전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엄청나 보이는 일도, 힘써 일하면, 놀라운 속도로 진행된다.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힘써 일하면, 대적을 놀라게 할 수 있다. 대적이 얼마나 방해하느냐? 할 일이 얼마나 많으냐? 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얼마나 힘써서 하느냐에 있다. 대충하면 중도에 포기하고 낙심하기 쉬우니,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
(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기도하며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취약 지구 경계를 방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3)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그들은 현재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기도는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일했다. 기도와 일을, 분리하지 않았다. 참된 기도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문제를 놓고 기도했으면,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서로 협력해야 한다(12).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대적들이 생명을 위협할 때, 대적의 근처에 사는 유다 사람들이 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10번이나 도움을 요청하였다. 느헤미야가 그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했다. 한 손으로는 일하며,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게 했다.
다 각자의 위치에서 일했고, 자기 위치에서 일하다가도, 나팔 신호가 들리면, 즉시 모여서 다 함께 대적을 막았다. 유다 백성이 느헤미야의 지휘를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 대적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들이 서로 돕고 협력할 때, 위기와 낙심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우리도 낙심을 극복하려면, 서로 협력해야 한다. (전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4)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유다 백성은, 대적들의 방해를 생각할 때, 낙심되었다. 그들의 위협을 볼 때는, 겁이 났지만, 크시고 전능하신 주님을 기억할 때는, 용기를 얻어,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울 수 있었다. 우리 하나님은 크시고 두려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애굽의 신들을 벌하고, 자기 백성을 양 떼같이, 인도하신 하나님이다.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군사들은 물에 잠기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우리 짐을 대신 지시는 구원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낙심을 극복할 수 있다.
유다 백성처럼 합심해서 기도하고, 일하고, 이웃과 협력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대적들의 훼방과 위협과 업신여김과 조롱을 물리쳐야 한다. 느헤미야의 설교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바라보았다. 나라와 가족을 위해 싸우겠다.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15-16上)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그 때로부터…”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한 그 순간으로부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크시고 두려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묵상한 그 순간부터, 문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승리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문제가 무엇인가? 억울한 소리를 들었는가? 낙심하여 대응하기가 두려운가? 기도하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라.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외치라. (시18:1-2)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현실에 속에 당하는, 온갖 종류의 낙심을 극복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믿음을 키우라.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비전을 이루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역사하신다. 이런 은혜가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하나님이 주신 소명인, 성벽 재건을 훼방하는 대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앞에 토설하며 기도한 느헤미야를 보며, 우리도 억울하게 비난받을 때, 분노하며 대응하지 않게 하시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토설하는 기도를 드리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지 않도록, 악한 대적의 방해를 물리치며, 한마음으로 서로 협력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하나님의 일은, 느헤미야 혼자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힘을 합해, 함께 하였던 일임을 보며,
하나님의 일에는, 누구라도 예외가 없음을 깨닫고, 헌신과 충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그런 성도의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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