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30820 웰빙 웰다잉(눅16:19-31) | |
작성자 : 윤성은 | 작성일 : 2023-08-22 |
첨부파일: 웰빙 웰다잉(주일).hwp(95K) |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저희들이 올려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사람이 죽은 후에 반드시 가게 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고, 이 땅에서 생명이 있을 동안, 그날을 준비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임을 알게 하시고, 죄 가운데 잃어버린 생명을 찾게 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 예배를 통해 복음 전도와 선교의 열정으로 뜨거워지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 그래서 요즘 웰빙(well-being)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웰빙’은 Well(좋은, 건강한, 만족스러운)+Being(삶)으로, 사전엔 “복지, 안녕, 행복, 번영”을 뜻하지만, 웰빙을 설명하면,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잘 먹고 건강하게 살자”는 뜻이다.
19절에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사는, 어떤 부자가 나온다.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 ‘즐겼다’(유프라이노, 행복해하다, 마음과 몸이 기분 좋은 상태에 두다, 잘 되어 갔다)는 뜻이다. 부자는 잘 먹고 살게 되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행복했다. 웰빙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 가운데, 몸부림쳤다. 그는 웰다잉(well-dying)하지 못했다. 잘 먹고 잘사는 게, 죄는 아니다. 아니 성도들도,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잘 죽어야 한다. 그러나 부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죽음 후의 또 다른 삶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몸이 다 헐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나사로는 인간적으로 볼 때, 정말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그는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위로받았다. 인생이 역전되었다.
어떤 삶이 진짜 행복할까? 이 세상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이다. 100년을 행복하게 살고, 지옥에 갈 것인가? 아니면 천국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인가? 100년과 영원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죽은 후의 영원한 삶이, 진짜 행복이다.
1. 그러므로 웰다잉을 해야 한다. 잘 죽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면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미래의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본문 앞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데,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다가, 쫓겨날 위기에 처하지만 쫓겨난 다음을 생각해서, 주인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준다. 자기 돈도 아닌데, 막 탕감해 준다. 남의 돈으로 인심을 썼다. 그는 분명히 잘못된 청지기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결과를 두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 준비하지 못한 자는,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고 한다. (눅12:20)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러면 어떤 삶이, 영혼을 위한 삶인가? 호화로운 무덤과 화려한 장례 행렬을 준비해야 하는가? 아니다. 부자는 좋은 무덤에 묻혔지만, 음부에서 고통을 당했다. 이집트에 가면, 거대한 피라미드를 볼 수 있다. 인도에 가면 타지마할이라는, 아름다운 무덤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웰다잉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죽음을 맞이했어도,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당한다면, 웰다잉이 아니다. 부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렇게 말했다. (24)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다른 준비가 모두 다, 잘되어 있어도, 자기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준비가 잘못되었다면 행복한 죽음이 아니다. 반면 거지처럼 불쌍한 인생을 살았어도, 죽음을 준비한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이기 때문이다.
마귀는 “지옥이 없다.” 말한다. 마귀에게 속으면, 자기 나름대로, 지옥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산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이 있다고 말한다(마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9:43, 45, 47, 눅12:5, 약3:6, 벧후2:4).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최후의 웃는 자가 된다.
(마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또한 지옥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지옥 가라’고 해도, 정말 화를 낸다. 없는데 왜 화를 내는가? 그것은 양심이 지옥이 있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2. 지옥은 어떤 곳인가?
(1)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곳이다(24下).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너무 뜨거워, 괴로움 가운데 몸부림쳤다.
불꽃은 가장 뜨거운 곳이다. 뜨거운 불에 조금만 데어도, 고통스러워 소리를 지르는데, 꺼지지 않고 계속 타는 불꽃 가운데 던져짐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원래 지옥은 헬라어로 ‘게엔나’다. 히브리어 ‘게 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됐다. 힌놈의 골짜기는 365일 동안 쉬지 않고, 각종 쓰레기가 타고 있고, 인간이 제물이 되어 태워지기도 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타는 곳이 지옥이다.
(2) 목마름의 고통이 있는 곳이다(24中).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물 없는 곳에는, 동물도 식물도 살 수 없다.
생명이 살 수 없는, 고통만 있는 곳이다. 물 한 방울을 외치는, 부자의 목마른 고통을 상상해 보라. 그렇지만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이 목마른 고통이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목마름을 대신하여 (요19:28) “…내가 목마르다…”하며, 이 고통을 대신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3) 조그만 소원도,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이다(24, 27-28).
지옥에 간 부자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24)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얼마나 애절한 소원인가? 매정하게 뿌리치기에는, 너무도 간절하다. 저라면 물을 마음껏 부어 주겠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 소원도,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곳이다. (27-28)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지옥에서, 그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자신은 이제 늦었지만, 남은 식구라도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는 곳이다. 이런 간절한 소원도, 조그만 소원도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이 지옥이니, 절대 지옥에 가서는 안 된다. 반면에 천국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위로하다.’(파라칼레오) = 파라(곁으로) + 칼레오(부르다) = ‘곁으로 부르다.’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갈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접해주고,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수고하였느냐면서, 위로해 주신다. 세상에서의 고난, 환란, 눈물, 슬픔… 대하여, 충분히 보상받으며, 위로받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떤 곳에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에 들어갔지만, 어떤 고통도 당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에, 머리카락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다.
생명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과 단절된 곳이 지옥이기에, 긍휼과 희망이 없는 곳이다. 위로가 없고 고통만 있는 곳이 지옥이다. 위로 없는 가정을 생각해 보라. 서로 아내와 남편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가정은, 소유가 많아도 지옥과 같다. 가난해도 위로가 있으면, 견딜 수 있다.
3. 웰다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부자이기에 지옥에 갔고, 거지기에 천국에 갔나? 아니다. 부자라고 지옥 가는 법은 없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다윗도 부자였다. 부자는 어떻게 지옥에 갔나? 웰다잉을 하려면, 부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1)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0).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자기 입으로, 지옥에서 회개에 대하여 절규한다.
만일 선행을 해야,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남은 식구들에게 가서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나는 착한 일을 하지 않아서, 지옥에 왔으니, 너희가 이곳에 오지 않으려면, 선행을 많이 해라…” 이렇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선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내가 천국에 도달하는 그날, 나는 천국 문에서 하나의 현판을 볼 것이다. 그 현판에는 ‘오직 회개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서 죄를 회개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
(2) 믿음이 없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부자는 혈통과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세와 선지자로 말씀하신,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증언해서,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다.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들은 살아있을 때,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해준, 성경 말씀 내용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웰다잉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5:46-47)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더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인데, 부자의 이름은 없다. 부자는 이 땅에 살 때,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베풀던 유명한 사람인데, 왜 이름이 없는가? 부자들은 이름 한번 내보려고, 많이 노력한다. 그래서 부자들은 세상에서 다 유명하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무명하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무명한 자 같지만 유명한 자다(고후6:9). 예수님은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셨다(눅10:20).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3)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지 않았다.
부자는 물질로 살았다. 즐거움으로 살았다. 명예로 살았다. 자기 뜻과 힘과 능력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이름이 그렇다. 나사로(λάζαρος)는 히브리어로 (엘아자르), (엘, 하나님) + 아자르(돕다, 구원하다)다. 따라서 ‘나사로’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이다. 부자는 자기 뜻과 힘으로 살았다. 이 땅에서 마음껏 살았는지 모르나, 죽어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나사로는 이 땅에 비참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기에, 죽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어, 구원해 주셨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 있나요? 내 힘으로 살고 있나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나요?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사는 성도가 되자.
결론이다. 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지 말고, 회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② 하나님 약속과 말씀을 믿어야 한다. ③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결단이 믿음이다. 부자는 너무 중요한 영적 원리를, 늦게 깨달았다. 지옥에서 깨달았다. 지옥에서 깨달으면, 때는 너무 늦다.
이 땅에 있을 때가 기회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항상 함께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부자는 이 땅에서 호화롭게 낙을 누리며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영생도, 전도의 기회와 중요성도 알지 못하고, 죽고 난 후에, 지옥에 가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음을 보며, 지금 내 삶을 철저히 돌아보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타는 듯한 목마름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뜨거운 불이 있는 곳!, 결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이 땅에서 내 생명이 있을 동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은혜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죽은 후에는 구원받을 기회도, 또 내 가족 내 이웃들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음을 깨닫고, 지금 힘써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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