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2. 08. 21. 예수 그리스도(행3:1-10) | |
작성자 : 윤관 | 작성일 : 2022-08-21 |
첨부파일: 예수 그리스도(주일).hwp(32K) |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영과 진리로 올려드리는 예배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우리 앞에, 여러 힘든 환경으로 인해, 낙심하며 좌절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으로 회복하여,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믿고 구원받은 저희들,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권능을 드러내며,
삶 속에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교회에서 그리고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하며,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1-10)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무력한 사람에게는 ‘능력’이 가장 필요하다. 병든 사람은 병 고침이, 절망한 사람은 희망이, 배고픈 사람은 음식이, 고독한 사람은 사랑이, 죄에 시달리는 사람은, 죄 용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력하고, 병들고, 절망하고, 배고프고, 고독하고, 또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이 모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능력도, 치료도, 희망도, 만족도, 사랑도, 용서와 구원도 있다.
‘예수’의 뜻은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오(기름부었다)에서 나왔고, 히브리어 ‘메시아’를 번역한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기름을 부어서 선택된 분이라는 뜻이다.
본문에, 나면서 못 걷게 된 앉은뱅이가 나온다. 그는 무력했다. 절망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다. 가난한 걸인으로, 날마다 성전 문 앞에 앉아있지만, 성전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나, 성전 안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도,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배부른 사람들이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지,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처럼 불결한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접근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는 순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40여 년 동안,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치료받고, 새로운 힘을 얻어,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먹을 것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난생 처음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의 영혼과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지자, 하나님과, 예배하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새로운 교제를 경험하게 되었다.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더 이상 고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의 도움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두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소개하고, 초대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나를 구원해 주고, 나를 새롭게 변화시켜주고, 내 삶에 소망과 능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처럼, 이웃들이 이적을 경험하며,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베드로와 요한은, 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즉, 기도 생활이 습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어디를 찾는가? 그때 내가 찾는 것이, 바로 내가 제일 사랑하는 곳이다. (시91: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하나님의 품은,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야 할 곳을 말해준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난 기적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일어났다. 성전에 사람들을 만나러 가다가,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상담하러 가다가,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에 의하여, 기적이 일어났다. 혼자 기도하러 가다가,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막11:17中)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기도하면 기적이 따른다. 예수님이 “내 집은 교제하는 집이다.” 하지 않으셨다. “내 집은 먹는 집이다.”하지 않으셨다. “내 집은 회의하는 집이다.” 하지 않으셨다.
교회에서 먹는 것도, 교제도, 회의도 좋지만, 본질은 기도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나면서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게 된 비결은,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에 의해 일어났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했다. 항상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을 교제하기에,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평생 살면서, 가져야 할 가장 거룩한 습관은, 기도하는 습관이다. 기도 습관이 영성이고, 능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는 습관을 갖기 바란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남에게 말할 수는 없다.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 없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과,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기쁨을 말할 수 있는가? 모세는 기도로 홍해를 갈랐다. 한나는 기도로 아들을 얻었다. 솔로몬은 기도로 지혜를 얻었다. 히스기야는 기도로 목숨을 연장했다. 다니엘은 사자의 입을 막았다.
능력 있는 삶을 원하고, 소망을 갖기 원하는가? 진정한 사랑을 원하는가? 주님께 무릎 꿇어,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풍성하신 영성을 통해, 우리를 향하여 도전해 오는, 삶의 거센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무리 날마다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은과 금은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기대를 넘어서는 놀라운 일들이,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2. 사람들의 필요를 볼 수 있는가?(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한 사람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갈 때, 미문에서 걷지 못하며, 구걸하는 자를 보았다. 그들은 이 걸인을 지나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그를 주목했고, 우리를 보라고 말했다. 이 걸인은 그들의 말을 듣고, 무엇을 기대했을까? 당연히 물질적인 필요를 위하여, 몇 푼의 동전을 기대했을 것이다.
현대인은 물질을 너무 사모한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의, 물신을 섬기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은, 가장 소중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어떤 보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물질을 주지 않았다.
물질이 필요하지만, 물질이 그의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물질 이상의 것이, 필요함을 알았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마침 그들의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그러나 돈이 없기에, 걸인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불안 속에 방황하는 이웃과, 이 땅의 모든 사람이 가장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었다. 물질이 신이 아니라, 진정한 신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이 응답하심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를 받고, 소망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야말로,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그것을 모른다. 이 앉은뱅이는 걸인으로, 그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몇 푼의 돈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이 세상에서 소망을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베드로와 요한은, 거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물했고, 그것은 이적을 가져왔다. 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이웃은, 왜 인생이 허무하고, 방황하고 절망하는지, 근본 이유를 모른다.
어떻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않는가?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 이웃이, 이 필요에 대해, 먼저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확신이 없다면,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이 확신이 없다면, 나의 구원을 점검해 보고, 나의 영성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협력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고, 함께 걸인을 전도했다. 협력할 때, 이적이 나타났다.
(1) 베드로와 요한은, 아주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베드로는 아주 능동적이며, 다혈질의 사람으로, 감각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저질러 놓고,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요한은, 아주 수동적인 사람이다. 우울질 사람으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영적이고 심미적인 사람이었다.
(2) 두 사람은 경쟁 관계였다.
똑같은 제자였지만, 경쟁하던 사람이다. (요21장)을 보면,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3차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에, 베드로에게 죽음을 예언하신다.
자기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들으면서, 베드로는 (21中)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은, (22)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의 장래에 대해서는 참견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다.
이렇게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멋진 협력자로 등장한다. 이들이 언제 이렇게 변했나? 성령을 체험하면서,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이제 두 사람은, 함께 기도하러 가고, 함께 성전에 올라갔다. 그리고 함께 전도한다. 또한 이 두 사람은, 함께 핍박을 받고, 고통의 자리에 함께 서게 된다.
바로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성령의 역사다. 예수님을 건성으로 알던 때의 친구가 있는가?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영성이 깊어졌으면, 그만 만나야 하는가? 아니다. 성령을 통하여, 둘이 같이 기도하고, 같이 전도하는 동역자로 발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체험해도, 그들의 성격을 아름답게 쓰신다. 베드로는 무슨 일이든지, 저질러 놓고, 항상 나중에 수습하는 삶이다. 그래서 걷지 못하는 자를 향해 (4) “우리를 보라.”했다. (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만약 그때 요한이 “아니 왜 꾸물거려요! 지금 예배 시간이 다 됐어. 어서 갑시다. 아니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어나 걸으라니, 어떻게 된 것 아니요…”했다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을까? 불행한 영혼을 붙들고,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을 때, 요한은 배후에서 말없이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본문만 아니라, 그 후 계속해서, 함께 행동하고, 함께 고난을 받는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협력 관계를 이뤄야 한다. 복음을 위해, 함께 엎드려 기도하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 받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다.
혼자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셔, 함께 일하도록 하셨다. 걷지 못하는 자가 일어나, 걷게 된 다음,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을 전했다. (행3:14-16)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자를 낫게 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자세히 소개한 후, 복음의 핵심을 전했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베드로가 선포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걷지 못하던 자를 낫게 하신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실 수 있으니, 그러므로 회개하고, 돌이켜 용서를 받으라는 것이다. 소망이 없이 살았던 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삶에 희망을 얻으라.
죄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죄사함을 받아,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
기도하겠다. 나면서 못 걷게 되어, 구걸하며 살던 인생이, 걷고 뛰게 하시고, 무엇보다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된 것처럼, 이 시간, 저희들도, 낙심하고 주저앉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하옵소서.
베드로와 요한같이 저희들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일으키는 복음의 열정과, 예수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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