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2. 07. 24. "교만과 겸손"(눅18:9-14) | |
작성자 : 윤관 | 작성일 : 2022-07-29 |
첨부파일: 교만과 겸손(주일).hwp(32K) |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주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하오니, 교만하여 주님께 순종하지 못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신, 내가 누리는 모든 것, 감사하며 더 낮아지고 섬기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어떤 힘든 상황 중에서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으로, 천기를 분별하고, 다가올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믿음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 시간 교회에서, 또한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께 영육 간에 강건케 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영국의 단편 작가 ‘스티븐슨’의 작품 가운데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킬’ 박사가 있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며, 자비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여기면서, 존경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밤만 되면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나타나, 온 동네를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흉악범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능욕하고 약탈을 일삼아, 온 동네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이드’라는 흉악범을 잡아서, 동네의 화근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보안관의 총소리가 울렸고, 하이드가 잡혔다는 소식이, 동네에 퍼졌다.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드디어 하이드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 순간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하이드’는 바로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였던, 지킬박사였다. 이 단편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는 선하고,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하면, 한편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못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착함 뒤에는 음흉함이, 겸손 뒤에는 교만함이 숨어 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갈등은,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교만과 겸손함이 동시에 나타난다. 따라서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제어하지 않으면, 하이드의 본성이 나타나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들음으로, 겸손한 삶을 살기를 축원한다.
1. 지금 이 시대는 영적 침체기다.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면, (행28:26)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또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 기도와 예배가 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했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과 주고받는 교제가 없다. 일방통행만 있을 뿐이다. 이 시대의 최고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는데 있다. 과거에도 교회에는 문제가 있었다. 문제가 없는 시대는 없다.
그렇지만 영적 감각이 살아 있었기에, 회개와 기도를 통해 다시 회복했다. 말씀이 선포되면 식어진 가슴에 불이 붙었다.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그러나 요즘, 아무리 말씀을 외쳐도 듣지 않고,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적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영적으로 무뎌지는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감각이 마비되었다. 머리는 있지만, 가슴이 말라버렸다. 차디찬 비판은 있지만, 생명의 뜨거운 감격은, 경험하지 못해서, 분석은 하는데, 장애를 돌파할 힘은 없다. 더 이상 죄를 향한, 진지한 접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죄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며, 죄를 극복하려고 눈물 흘리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죄를 가볍게 보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죄악이라는 단어가 실종했다. 죄 대신 ‘내적인 혼란’, ‘환경에 대한 부적응’과 ‘정서 장애’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미국 헤몬드 침례교회, 잭 하일스 목사님은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강하게 설교했더니, 죄를 지적하는 말이 듣기 싫었던 어떤 사람이, 견딜 수 없어서, 목사님을 향해 총을 쐈다. 그래서 방탄유리를 설치했다고 했다. 이 정도로 죄에 대하여, 말하기를 싫어하는 세상이다.
이 시대가 영적 침체를 벗어나, 다시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원한다면, 죄에 대해 정직하게 직면해야 한다.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의 교만을 지적하신다.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은, 기도할 필요를 느끼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두 사람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서서 기도했다. 바리새인은 종교적으로 헌신을 많이 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백성에게 존경 받는, 종교지도자였다. 경건한 종교심으로, 로마식민지에서 회복해야 한다는 신본주의자였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와 기도가 되었다. 그 이유는 교만했기 때문이다.
2. 바리새인은 어떻게 교만했나?(9-12).
(1) 자기가 옳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했다(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자신을 존중하며, 소중히 여기는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자신만 사랑하면, 죄가 된다.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 나머지,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음모와 술수를 쓴다면, 자존감에서 벗어난 범죄가 된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할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기에, 교만은 일종의 자기 숭배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함”이, 가장 크고, 무서운 죄다. 그런데 이 죄는, 그 옛날 바리새인들만 행한 죄가 아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있는 죄다.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 자기를 괜찮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낱낱이 드러내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죄다.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너무 잘 들여다보는, 독수리 같은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죄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속을 보셨다. 그들의 속은 더러웠다.
겉만 깨끗하게 보이고, 내적이고 영적인 삶은 무시하는, 형식적으로 겉치레만 했다. 왜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이중성이 나타났을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타락한 자와 자신을 비교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과 비교하면, 스스로 자만에 빠지기에, 타락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봐야 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삶이다. 이런 삶을 살기를 축원한다.
(2) 담을 쌓는 삶을 살았다(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바리새인은 세리와는, 같이 기도하기 싫어서, 다른 자리에서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성도는 세상과는 달라야 하지만, 그들과 담을 쌓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담을 쌓았다. 우리는 이웃과 달라야 하지만, 담을 쌓아서는 안 된다. 교제할 때, 교제의 폭을 지나치게 좁게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과는 교제하지 않겠다며, 특별한 사람끼리 파벌을 만들기 시작할 때, 그 배후에는 무서운 우월감, 교만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마라. 이웃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는 조심해야 한다. 나는 누구와 같지 않다는 생각이, 항상 문제가 된다.
성경은 주님 안에서, 하나 되라고 하신다. 잘 믿는 사람은, 서로 하나 되어야 한다. 신분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지만, 주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너하고 같지 않다고 하기에, 갈라질 대로 갈라진다. 이스라엘은 백성은, 우리는 선민이다. 그래서 너희와 같지 않다고 했다. 이방사람과 같지 않고, 사마리아인과 같지 않고,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함으로 버림받고 말았다.
(마23장)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자라고 말씀했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면서, 무섭게 정죄하셨다. 성도는 다리를 놓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끊어진 다리를 놓기 위해 오셨다.
제사장이란 말은 다리를 놓는 자들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였으니, 다리를 놓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나 때문에 이웃이 화목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3) 회개하지 않는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공통적인 죄는, 회개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예수님을 비판하고 반항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절대 회개하지 않는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 치고, 죄를 회개한 사람은 없다. 너무나 불행하고, 너무 무서운 일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 사함과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할 줄 모르는 죄다. 그런 사람은 마지막 심판 때, 강제로 무릎 꿇게 된다.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음이 죄다. 자기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교만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감추고, 자기를 속이는 죄를 범한다.
겸손함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을 말하고, 교만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겸손과 교만의 차이는,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차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영원히 살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늘의 비밀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비밀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3. 교만의 결과(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놓으면 죽는다.
어느 연못에, 기러기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물이 말라,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하고, 이사 가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나아갈 수 있는 기러기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고, 비행하는 방법이었다.
떠나기 전 이들은,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약속했다. 이들이 공중을 날 때 이를 본 농부가 “누가 저렇게 기가 막힌 생각을 했을까?”라고 감탄했다. 그러자 개구리는 “내가 했지”라고 대답했다. 개구리는 그만 떨어져 죽었다.
교만의 결과는 죽음이다. 반면에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더욱 높여주신다. 그래서 벧전5:5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지만,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준다고 하였다.
바리새인의 죄, 3가지를 말씀드렸다. ①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죄다. ② 다른 사람과 담을 쌓고, ③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지 않는 죄다.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비판만 하는 불행한 사람이다. 죄를 용서받지 못해, 구원의 은혜도 받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이, 예수님 앞에 무릎 꿇었다. 물론 자발적으로 무릎 꿇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의인 중의 의인이었던 사울은, 자기를 가리켜 ‘죄인중의 괴수’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이방인들과 죄인들을 멸시하던 사울이, 나중에는 이방인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다. 주님이 그의 가슴에, 눈물과 사랑을 부어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예수님은 바리새인처럼, 자만하고, 위선적인 우리들을 찾아와서, 우리 이름을 부르신다.
우리는 귀를 틀어막았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않고, 무릎 꿇지도 않고, 죄인임을 고백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바리새인처럼, 위선적인 의인으로 남겠는가? 아니면 차라리 세리가 되고,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겠는가?
교만은 많은 지식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겸손은 적은 지식으로도, 풍요롭게 한다. 오만한 마음에는, 더 이상 채울 것이 없으나, 겸손의 그릇은 늘 비어 있어서, 채울 준비가 되어있다. 오만의 그릇은 쏟아 보면 나올 것이 없으나, 겸손의 그릇은, 빈 그릇에서도 지략이 철철 넘쳐흐른다.
결론적으로 음악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이야기로 마치겠다.
모차르트가 결혼한 후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많은 빚으로 가정형편이 쪼들리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서 가정 교습을 하였다. 모차르트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차르트는 모여든 문하생들을 두고,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과,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 2그룹으로 갈랐다.
그리고 음악을 조금 안다는 사람에게는, 월200 쉴링을, 전혀 모른다는 사람에게는, 월100 쉴링을 교습비로 징수하였다. 200 쉴링을 내야하는 부모들이 항의하자,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좀 아는 사람을 가르치기가, 모르는 사람보다 두 배나 어렵다고 하였다.
왜 그렇게도 오래 믿었는데도, 우리는 변화가 없을까?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교만한 자인가? 겸손한 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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