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2. 06. 12. 강건해야 하는 이유(엡 6:10-12) | |
작성자 : adminstrator | 작성일 : 2022-06-18 |
(10-12)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
유대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도나이, 또는 핫쉠’이라고 말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빼고, 하늘나라로 바꾸어 넣기도 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이름 주의에, 울타리를 치는,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그중 하나가 신적 수동태다.
이는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능동태 문장을 수동태로 바꾸고, 하나님의 이름을 빼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서술할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셨다고 말해야 한다. 이를 수동태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일으킴을 받으셨다고 말하면, 신적 수동태 문장이 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서술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는 신적 수동태 문장이 자주 나온다. 따라서 성경을 읽다가, 수동태 문장이 나오면, 혹시 주어인 하나님을 생략한,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구약 성경은 중요한 순간들에 “내가 했다가 아니라,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되었다.”는, 수동태적인 설명을 보게 된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성경은 수동태의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끄신다고 표현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야 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언제 풀릴지도 알 수 없는 옥에서, 기약도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불안해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하지 않았다.
(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만을 붙들었다. 그것이 노예의 위치든, 죄수의 신분이든, 아무 관계가 없었다. 억울함을 풀려고, 여기저기 호소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자 애썼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었다. 살다보니 내 뜻대로 산 것 같지만, 하나님 뜻대로 살았다고 고백한다면, 신적 수동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이다. 요셉의 형통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신적 수동태에서 시작된다. 노예가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다 잡혔는데, 죽이지 않는 주인은 없다.
보디발도 요셉에게 거절당한 수치와 분노로, 죽여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옥에 가는 수준에서, 이 일이 정리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을 본다. 요즘말로 이런 대표적 고백이 ‘주하’, 주님이 하셨다는 고백이다.
1. 강건하여지라(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강건하여지고’는 신적 수동태이다. 하나님에 의해 강해지라는 말이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연약한 존재다.
성도가 강해짐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그의 힘이 능력으로, 덧입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강건해지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계획에 바라보고, 맡기고,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성도가 강건하게 되는 비결은, 우리 구주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능력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즉 성령으로 충만해지라는 말이다. ‘성령이 임해야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의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에는, 2가지 차원의 믿음이 있다. 내가 믿고자 하는 믿음과,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내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참 믿음을 받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성령을 받고, 성령 하나님이 주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는 상황이나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불같은 체험으로, 성령을 받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성령 받은 줄도 모르게, 성령이 임하는 경우도 있다. 본인이 언제 받았는지 잘 모른다고, 성령 받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느냐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며, 삶으로 증언하는 것을 통해, 성령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삶으로 증명한다는 말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다.’ 라고 고백하며, 내 삶으로 증언하는 것을 말한다. 가정에서, 이웃과 모든 공동체 가운데,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회식자리, 제사문제, 반기독교 정서, 본인의 잘못된 생활) 등으로, 내 삶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예수 믿는 신앙고백이, 내 삶 가운데 잘 드러나기 바란다. 그러기에 성도는 성령 충만해야 한다. 그러면 왜 성령 충만해야 하는가? 이전에, 성령 체험을 했다고 해서, 계속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니다.
내 죄와 허물로 인해, 성령이 소멸되기도 한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이것은 성령이 임했다가, 떠났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 희미해지고, 소멸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위해, 항상 힘써야 한다. 여기에는, 각자의 열심과 결단이 필요하다.
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간계는, “꾀, 음모”보다 강한 뜻이다. 자신과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능력이다. 마귀의 간계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모든 핍박과 유혹을 가지고 온다. 이러한 것들을 이기고, 물리치기 위해, 성도는 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전신 갑주는 온 몸을 덮는 갑옷은 물론이고, 공격용 병기까지 말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호하고, 무장해야 한다.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믿음의 방패,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신, 이와 같이 모든 것을 갖추고, 항상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말한다.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나 자신을 위해, 교회를 위해, 가족을 위해, 사역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는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 충만함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구원의 확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성령님이, 믿음의 방패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 된다.
또 주의 평안을 주셔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한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어떤 영적 싸움을 했는가를 돌아보자. 근심과 걱정, 염려가 물려와,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는 공격을 받았는가? 누군가가 미워지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여, 화를 냈는가? 혹시 음란한 생각에 빠지는 유혹을 받았는가?
돈의 유혹을 받았는가? 술에 취하고, 방탕함에 빠지는 유혹을 받았는가? 생각하건대 이 모든 것이, 마귀가 나를 넘어뜨리고, 죽이려고 유혹하며 공격한 것을 깨닫게 된다. 마귀가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는 것은, 내가 연약하고, 만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 성도가 되었기 때문임을 믿기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승리하기 원하시어,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다.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와 담대함을 준다.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과 권세로, 승리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란다. 성도의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한국교회가 성령 충만하여, 뜨겁게 부흥하려면,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교회마다 성도마다, 주님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성령 충만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 하자 성령 충만하여, 승리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 위함’이다(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영적 전쟁이다.
영적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이 아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서, 불순종의 영이며, 악한 영인, 마귀 사탄이다.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마귀의 종이었다. 악한 영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러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내 삶에 구주로 영접하고, 주인이 바뀌었다. 마귀의 종이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그런데 마귀는, 끝까지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마귀는, 예수님을 대적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이미 마귀는 패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셨다. 마귀는 예수님을, 대적하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공격한다. 마귀는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박해나 환난과 핍박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도록 한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핍박과 박해는, 기독교 역사 속에 무수하다. 붙잡히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돌에 맞고, 나무에 달리고, 불에 태워지고, 칼과 총에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사탄 마귀는, 결코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상황에서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고난 가운데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마귀의 공격을 이겨냈다. 초신자가 갑자기 병이 나거나, 집안이 어려워지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때 초신자들은, 믿음이 연약하기에, 흔들리기 쉽다. 혹시 나는 예수를 믿으면, 안 되는가? 예수를 믿어서, 가정이 더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이때 곁에서, 붙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사랑으로 돌보고, 함께 기도하고, 위로와 격려로 일으켜, 세워주어야 한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돕고, 서로 사랑함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이 다운 교회에 성도로, 우리들을 묶어주셨다. 마귀는 성도를 유혹하며, 공격한다. 마귀는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예수님께 빵으로 유혹하였다.
마귀는 다윗을 밧세바를 통해, 음란한 영으로 유혹하여 넘어뜨렸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미혹되어 넘어졌다. 오늘도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유혹한다. 음란과 돈에 집착하게 하는 유혹으로, 목회자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흔들고,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한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들을 틈타고 들어와서, 집요하게 공격한다. 갈등과 미움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 사이를 이간한다. 세상의 안일함과, 즐거움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목회자에게도 마귀의 유혹이 있다. 마귀의 유혹은 은밀하면서 집요하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려면,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혹시 내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다 하더라도, 이제 다시 일어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면, 강건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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