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1년 1월 31일 - 성령이여 임하소서(요7:37-39)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1-09-08 |
성령이여 임하소서(요7:37-39)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하나님 앞에, 영과 진리로 올려드리는,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제한적이지만,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교회학교 예배도 드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지금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때에,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견디고 이기게 하시고,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이나, 영상을 통해 예배드리는 성도 모두에게, 성령님 임재 하셔서, 큰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성령이여 임하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다. 먼저 여기에서 ‘명절 끝날’은, 초막절을 말한다(2).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광야에서 40년 간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반석에서 생수로, 갈증을 해결해 주신 사건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절기다.
초막절은 8일 동안 계속된다. 백성들은, 광야에 초막을 치고 지내다가, ‘큰 날’이라는 마지막 날에는, 제사장이 금주전자를 들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떠다, 제단을 7바퀴 돌며, 물과 포도주를 제단에, 함께 붓는다. 사람들이 2줄로 같이 물을 길어 와서, 성전 제단에 부었다.
제단에 물을 부으며,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기를 기도한다. 물을 부으며, 비는 내려달라는 말은, 성령을 부어달라는 말이다. (욜2:28-30)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모든 예배자들은 “하나님!, 만민에게 부어주는 성령을, 이제 우리에게, 내려주소서!”라고 기도드렸다. 제사장이 금주전자에 물을 길어와, 제단에 물을 부을 때, 예수님이 큰 소리로 말씀했다.
1. 누구든지 목마르거든(37下).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영적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나가야 한다.
지금 갈증을 느끼고 있는 대지에, 비를 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릴 때, 예수님은 육체적 목마름만 생각하는 그들에게, 실물교육을 통하여, 사람이 영적으로, 목마른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셨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영적으로 목마른 상태에 있다.
이 세상이 주는 물은 마시면, 조금 있다가, 또 다시 목마르게 된다. 세상이 주는 만족은, 순간적이다. 돈도 명예도, 모두가 순간적이다. 그래서 돈도 명예도, 얻을수록, 더 갈증만 느끼게 된다. 시대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평안하기보다는, 불안하고, 갈증을 느끼게 된다.
현대인은 도태되거나, 낙오되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피곤하고, 불안한 마음과, 육신을 달래기 위해, 쉴 곳을 찾지만, 쉴 곳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어야,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예수님이 교회의 모든 예배와, 행사의 중심이 되셔야만, 갈증들이 해결된다.
서점에서 팔리는 책들 중에, 무속인들이 쓴 책이 많다. 지식인들이 쓴 책보다, 무속인들이 쓴 책을 읽으려는 이유는, 영혼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목마른 영혼은, 마실 것을 찾는데, 한국 사람들은, 수입의 많은 부분들을, 술값으로 지불한다고 한다.
독주 소비량은, 세계에서 최고다. 왜 독주를 마시는가? 이 험악한 세상을, 올바른 정신으로,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까, 술을 마신다. 영혼의 갈증을 잊어보려고, 술을 마신다. 현대인은 물질적으로, 전보다 훨씬 더 풍요로워졌지만, 좀처럼 마음에, 만족함이 없다.
마음이 공허한 사람일수록 감추려하고, 겉치레를 화려하고, 순간적인 쾌락을 주는, 독주 같은 것으로, 잊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는, 절대 채워질 수가 없다.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가, 자살한 이유는, 영혼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증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교회를 다녀도, 마음이 허전하고, 광야의 외로운 한 마리 낙타처럼, 고독함을 느끼는 이유는, 주님의 영으로, 우리 영혼을, 온전히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 영혼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주님께 나와서,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셔야 한다(37).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기에,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목마른 사람에게 도덕, 철학, 종교를 이야기한다고,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다.
답답하고 피곤합니까? 예수님만 만나면 해결되는데, 만날 수 있는 조건은, 아무 것도 없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주님 앞에 나와서, 만날 수 있다. 만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 그러므로 오늘, 영적이고,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란다.
2. 예수님을 만나면,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 말씀은, (요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렸다. 그때 군병 한 사람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주셨다. 예수님의 물과 피가,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해결한다는 말이다. 피는 우리 죄를, 물은 성령을 말한다.
광야에서 사람들이, 물이 없어서 갈증에 시달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반석을 치게 하시고, 그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갈증을 해결했다. 바울은 광야의 반석에서, 물이 나와, 갈증을 해결한 그 사건을, 반석 되신 ‘그리스도’로 설명했다.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생수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반석이 되신 예수님의 몸이, 깨짐으로 우리에게 물이 주어졌다. 예수님을 만나면, 선물을 주시는데, 그 선물이 바로 생수, 성령님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성령이 흘러넘쳐야 한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야, 다시 살아난다. 문명의 발생은, 강을 끼고 나타났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복음을 깨닫고, 무능하고, 구제불능의 사람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느끼고, 삶에 기쁨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이, 이론만 가지고 있지, 실체로 경험이 없기에, 삶이 비참하다. 목마른 사람이 찾아왔을 때, 이 물은 당신의 오장육부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생수라고 소개만 할 뿐, 생수는 먹지 못하고, 돌아가게 만든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말씀으로 충만해져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하지만, 성령을 맛보지 못한다. 말씀으로 세상을 이겨야 하는데, 말씀을 체험하지 못한다. 교회가 오아시스처럼 되어야 하는데, 오아시스가 되기보다는, 신기루처럼 되어 버렸다.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예배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림만보고 가지 말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성령님을 만나, 갈급함을 채우기를 바란다. 18세기 유럽의 교회는, 예배의 생명을 잃어 버렸다.
그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가?’ 이것을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진젠돌프’ 백작이었다. 그는 부흥을 위해 간구했고, 28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모라비안 교파가 만들어졌다. 모라비안 교파에서는, 예배드릴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모라비안 교파가 중요한 이유는, 요한 웨슬리 때문에 그렇다. 요한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와, ‘홀리 클럽’(신성회)를 만들어서, 거기서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 조지아 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돛대가 부러지고, 난파 위험지경에 도달했다. ‘그때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목사였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 이것만큼 안타까운 것이, 어디 있는가? 웨슬리는 홀리 클럽(신성회) 규칙에 따라, 열심히 성경을 암송하고, 기도했다.
그렇지만 자기 목숨을, 잃을 것 같은 공포 때문에, 그의 경건 훈련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데 큰 풍랑 가운데, 배 한구석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얼굴에는 평강이 넘쳤다. 웨슬리는 고민했다. 나는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데, 저들은 평강으로, 채워져 있구나?
웨슬리는, 모라비안 형제 ‘고틀립 스팽겐베르그’와,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형제여! 그대 가슴속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가?” 이때 웨슬리는, 대답을 못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웨슬리는 ‘물론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묻는 것은, 온 세상의 구주인 것을, 묻는 것이 아니다. 바로 당신의 구세주라고 믿느냐?’는 말이다. 웨슬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란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성경도 가르치고, 기도도 인도하며, 경건한 지도자로, 10년 간 헌신했지만, 구원받지 못했다.
단지, 각종 종교 프로그램에 익숙한, 종교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웨슬리에게 물었다. 예수님이 분명히, 나의 구주와 주님 되심을 믿나요? 그 다음 웨슬리는 충격을 받고, 1738년 모라비안 교회 처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 예배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다음 웨슬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광부들에게 나아가, 예수만 참 생명이라고 외쳤다. 성령님이 지배하는, 참된 예배의 회복 없이, 나가서 외칠 수 없다. 복음증거도 할 수 없고, 선교도 할 수 없다. 우리에게도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예배의 회복이, 정말로 일어나기 원한다.
3. 성령을 받아야 한다(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임할, 성령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들이 받을 성령님을 오해하지 말자. 성령님은 창세전부터 활동했다(창1:2, 시51:1). 그러나 우리 안에 내주하심은 없었다. 성령님의 사역은, 구약에도 있었지만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한되었다.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심은, 오순절 때부터였다(요16:7, 행2:1-4).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했다. 보혜사는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예수님처럼 보호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가르쳐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다른 보혜사를, 왜 보내주셨나?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전하는 자들에게, 권능을 부어주시고, 넘치는 기쁨과, 복을 주려는 것이다.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 죄에 대하여, 사단에 대하여, 승리를 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 위에서,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됨을 말한다.
그런데 아직, 승리의 부활, 즉 영광을 아직 받지 않으셨기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직 임하지 않았다.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수도 믿을 수도 없고, 생수의 강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령님이 임재하기 전이라, 사람들은, 초막절 행사에는 왔지만, 초막절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초막절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충분히 알려주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지금 초막절의 행사, 종교적인 갈증 때문에, 올라왔다.
종교적 행사를 통해, 환희와,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행사의 주인공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았다. 초막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해, 수군거림이 많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를, 성령 시대라고 한다. 성령이 없이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우리 심령에 만족함도 없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흘러넘칠 때, 만족하게 된다. 갈증이 해결된다. 허전한 마음이, 풍성해진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성령님을 받기 전에는, 배반하고 도망쳤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박차고 나갈만한, 용기가 없어서, 문을 다 걸어 잠그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자, 비겁했던 제자들은, 두려움은 사라지고, 담력이 생겼다.
성령님을 받고나자, 모두 자신 있고, 확신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힘껏 전했다. 성령님의 은혜가 넘치면, 이러한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고, 사망 권세도 이길 수 있다. 따라서 성령님과 성령님의 능력이, 임해야 한다.
성령님을, 사모하기 바란다. 성령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임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다, 성령님을 사모하기 바란다.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한다.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의 예배가, 온전히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성령님, 우리 안에 거하시며, 역사해주셔서, 예배가 회복되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역사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자, 성령이 역사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악한 것들과 싸워 이기며, 음부의 권세를 멸하는, 능력의 성도가 되도록 붙드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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