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2. 05. 01.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창5:21-24) | |
작성자 : 윤관 | 작성일 : 2022-05-18 |
(21-24)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창5장)에는 아담의 족보, 계보가 나온다. 이 계보를 보면 “○○는, 몇 세를 살고 죽었다.”로 끝난다. 그러나 에녹은, 예외로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에녹은 히브리어로 “하녹”(봉헌된)이라 하는데, 구약의 ‘나실인’처럼, 하나님께 “봉헌된 자, 전수자”라는 뜻이다. 에녹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았다.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이다. 에녹은 그 당시 사람들보다, 훨씬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직접 하늘나라로 옮겨졌다.
에녹의 승천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인간이 가야 할, 천국이 있고, 인간의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 영원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에녹은 장차 들림 받는, 성도들의 모형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 무조건 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눈물도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삶이, 더욱 중요하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동행”(히트할레크)은 단순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맞추어, 그 뒤를 따라 걸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에녹의 뜻이 되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면, 에녹도 싫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에녹도 기뻐했다. 즉, 에녹은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했다. 이처럼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순종해야 한다.
혹시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기도할 수 없고, 예배할 수도 없을 만큼 바쁘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1. 하나님이 심판하심을 믿었다(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에녹이 살던 시대는, 홍수심판 바로 직전이었다.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시대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둡고 타락했던 그 때, 어떻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나? 에녹도 우리처럼, 죄짓고 살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에녹은 65세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했다.
(22-23)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에녹은 365세를 살았는데, 그중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65년 동안은 그렇지 못했다는 말이다. 아들 므두셀라가 태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은 이후에, 에녹의 삶은 달라졌다. 그러면 무엇이 에녹의 삶을,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되었는가? “므두셀라”는, 무트(죽다) + 솰라흐(보내다) = 즉, “그가 죽으면 (홍수심판)을 보내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어느 날 에녹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했다고 상상해 보자.
“에녹아! 정말 세상이 심히 악해져, 거룩하고 의로운 나 여호와가, 더 이상 죄악을 용납할 수 없다.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심판의 징표로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 해라.” 그래서 에녹은 아들이 태어나자 “므두셀라”라고 지었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볼 때마다 “저 아이가 죽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했는데…”라고, 하나님 말씀을 떠올리며, 경고의 심판을 생각했다. 이렇게 에녹의 변화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깨달았던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에녹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처럼 자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았다.
특별한 자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가 아니어도, 그 누구라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엄중히 받아들일 때,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평생에 지은 죄가, 하나님 앞에 모두 다 드러남을 믿고 산다면, 심판이 두렵고 떨려, 주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애쓰게 된다.
‘위기의 신학’으로 잘 알려진 “라인홀드 니버”는, 현대인이 심각한 부도덕에 빠지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한 마디로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믿는다면, 아니 그 심판이, 오늘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이 시작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 정말로,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홍수의 심판이 있었는가?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8-29上)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187+182=369, 노아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 므두셀라의 나이였다.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최고로 장수한 자로, 969세를 살았다.
그런데 (7:11-12)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 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있었다. 므두셀라가 969세로 죽던 해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는 369세였다.
노아가 600세에, 므두셀라가 죽자, 그의 이름의 뜻대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쏟아지는, 노아의 홍수 심판이 시작되었다. 에녹은 아들을 볼 때마다, 장차 올 심판의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2. 심판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믿었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우리 삶을 보면, 사람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부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다투고 싫어져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었나?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과, 은혜의 삶이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았는데,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에녹은 아담의 7대 손으로(유1:14), 경건한 셋의 후손이지만, 똑같이 아담의 7대 손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던, 가인의 후손은, 정반대의 삶을 살면서, 이렇게 외쳤다.
(창4:23中)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뽐내며,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었다. 하나님을 떠난 죄악 된 삶, 타락한 삶의 결과, 그들은 노아 홍수 때, 모두 죽었다.
그러나 에녹은, 세상에 물들거나, 세상에 빠지지 않았다. 에녹은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에녹도 65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지만,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올바른 신앙생활은 할 수 없다.
(시14:1上)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존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직 세상과 자신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없다’ 하며 살고 있다.
사람이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이 세상에만 온통 관심을 쏟으면, 그 무엇도 볼 수 없고, 어떤 음성도 들을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세상 욕심과 이기심으로 살기에,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도 않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다. 결코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하나님과 동행하면, 상을 주신다(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동행하다.’는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행동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어떤 상을 받았나?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 (히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①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다. 죄의 삯인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는 놀라운 복을 받았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성도에게 주시는 상급이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큰 복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복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원하는 복을 바라지만, 하나님이 없는 복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은,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주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강도는 (눅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그 날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갔다. 강도는 심판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자신을 믿음으로 맡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에 많은 불신자들이, 지옥으로 던져지지만, 성도는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진다. (살전4:17)을 보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믿는 자들은 공중에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다. 육체적인 죽음을 보지 않고, 홀연히 변화된 몸이 되어, 공중에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다.
②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칭찬을 받았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칭찬을 받은 것은, 정말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옛날에는, 왕을 위해 목숨을 버려 충성한 자를 “충신”이라고 하고, 부모님께 효도한 자를 “효자”라 하고, 남편을 지극히 모신 자를 “열녀”라고 부르며, 그들의 행실을 칭송하고 누각과 비를 세워서 기념하도록 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칭호가 주어졌으니, 이보다 더 큰 명예는 없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상 주신다는 믿음으로, 일해야 한다. 육신으로 사는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충성한 만큼, 상을 받는다.
(고전3:8中)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또한 (잠8:17中)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시고,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간절히, 전심으로 찾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은 상을 주시기 바란다.
결론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부부의 날, 스승의 날…, 많은 기념일이 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에녹’은 “봉헌한 자, 드려진 자, 전수자”라는 뜻이다. 에녹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자녀들에게 신앙의 삶을 전수했다.
지금 나는 자녀들에게, 어떤 삶의 자세를 보여주며, 어떻게 신앙을 전수하고 있는가?/ 에녹은 자녀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지만, 자녀를 낳은 후에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래서 에녹의 자녀들은 태어나고 부터, 아버지의 경건한 삶의 모습을 보았고, 어릴 때부터 이 경건의 삶의 훈련을 받았다.
지금 내 자녀는, 부모인 나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이제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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