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11월 22일 -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시122:1-9)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1-09-08 |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시122:1-9)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아침,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저희들의 예배를 기뻐 받아주시옵소서.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나라 안팎으로, 어둡고 힘든 위기 가운데,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오니, 저희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두려움과 염려가 크지만, 이 모든 상황도, 오직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 아래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교회로!’ 이 땅의 교회가 회복되고, 부흥하며, 모든 예배가, 온전히 세워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나, 영상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성도 모두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이 시는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다.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돌아와서, 그때의 감격을 회상하며 지은 시로,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부르도록, 지은 노래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매년 세 차례, 정해진 절기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야 했다. 예루살렘 순례는 일 년에 세 차례, 무교절(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추수감사절)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신16:16-17)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은, 걸리는 시간과 비용 등, 걸어서 이동하는, 당시 형편으로는, 힘들고 부담되는 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자신에게 큰 기쁨이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신앙고백과 찬양으로 지어진 시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부제가 붙어, 시편120-134편까지 15편이 있다. 지금 코로나가 또 다시 확산되며,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올려서, 교회 출입이 제한되는 상황이다.
어떤 어려움과 박해 때보다도, 지금이 교회 위기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모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본문에, 시인은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가?
1. 예루살렘 순례에 대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1-2).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다윗은, 사람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순례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로 인해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말했다. 왜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일이, 이토록 큰 기쁨이 되었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성전이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순례를, 그토록 기뻐했던 것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함이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지만, 예배자 자신이, 복을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왕국 시대의, 역사를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라의 분열로 인해, 북왕국 이스라엘은, 성전예배가 자유롭지 못했다. 북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왕들은, 백성에게 성전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하면, 정치적으로 큰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례를 금하고, 대신 북쪽에 단을 쌓아, 그곳에서 우상을, 숭배하도록 했다. 그래서 분열왕국 시대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은, 성전 예배가 금지되었고, 남왕국 유다에서만, 성전 예배가 지속되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유다는, 같은 민족이었지만, 성전 예배의 유무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다.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모두 부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왕국 유다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유다가 이스라엘보다 더 거룩한 영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는 성전 예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남왕국 유다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는 것은, 그곳에 건전한 신앙의 전통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성전 예배는, 모세 시대부터 내려온, 신앙의 전통이다. 이와 같은 전통은, 신앙에 있어서, 외적 요인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신앙을 이끌어 주는, 기초가 되었다.
성전 대신에, 우상을 위한 단이 있었던, 북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황폐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나중에는 이방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폐허가 되어 버렸다. 성도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
시인은 이처럼, 예배의 축복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이 복을 누리도록, 허락해 주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하는 것이 큰 기쁨이었기에, 거기서 한참동안 서있었다. 진정한 부흥은, 예배의 회복, 신앙의 회복에서부터 비롯된다.
2.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3-5).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예루살렘을 ‘잘 짜여진 성읍’이라고 했다.
‘짜여졌다’(하바르) ‘결합되다, 동맹하다.’로, 하나로 잘 연결되었음을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를 연결하는 영적 통로이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황폐해진 성읍을 묘사할 때, 그곳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고,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사람의 웃음소리를 대신했다.
이를 비추어볼 때, 예루살렘 성을, 잘 짜여진 성읍은, 그 성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곳임을, 말해준다. 예루살렘에는 절기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각 곳에서 모여든,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믿음으로 온전히 하나 될 때,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견고해질 수 있다.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왔다. 예배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판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었다. ‘판단의 보좌’는 ‘왕의 보좌’이며, 이 보좌로부터, 공의가 시행되었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왕의 보좌가 있는, 국가의 수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오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공의가 시행된다.
3.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평안이 있기를 구했다(6-9).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인이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기 원했던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유롭게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에, 평화가 있기를 구했고, 그 성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이웃에게, 그리고 왕궁에 평화가 있기를, 구했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는, 다윗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던, 모든 시대의 성도들도, 언제나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을 권고했다.
(딤전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평안한 가운데, 경건의 생활을 하기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시인이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을 때, 성전 예배가 지속될 수 있고, 순례가 보장되어야만, 그들로 하여금, 예배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① 그들은 은혜를 사모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복을 받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기도가 응답되고, 가정이 평안하고, 직장이 안정되고, 자녀들이 잘되고, 질병과 고난 없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와 똑같다.
그들도 평안과, 형통한 삶은 원했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시대를 초월해서 다 같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거나, 신앙심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노래하는 이들의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② 이들은 먼저, 자신의 평안을 구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했다. 그들은 성전을 위해서, 복을 빌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지 모른다. 우리는 내가 먼저,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성전이, 먼저 복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영적 순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복의 통로, 교회를 통해 주시기에, 교회가 먼저, 복 받아야 한다. 이상하게 여기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가 평안하지 않으면, 내 신앙생활도, 결코 평안할 수 없다. 교회 안에, 작은 문제가 있어도, 곧 깨달을 수 있다. 교회를 사랑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교회를 비판하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의로운 신앙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내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면 더 조심해야 한다. 성도는 어느 때든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영적으로 유익하고, 복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교회를 복을 구하기 바란다. 교회를 더 많이, 사랑하기 바란다. 인생이 평안하기를 원한다면, 교회가 평안하도록, 먼저 기도하기 바란다. 그것이 내가 평안하고 복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복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면, 영적 지도자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의 영적 권위를, 존중하기 바란다. 그리고 함께 신앙 생활하는, 모든 성도를 축복하기 바란다. 이것이 교회 사랑이다. (6下)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다.
그리고 그것이, 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임을, 믿기 바란다. 그 옛날 성전을 위해서, 기도했던 순례자들처럼 말이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주님을 만나기 위해,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때로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기도 하고, 성도들과의 교제 가운데, 주님을 만나기도 한다.
지금 여럿이 함께 모이는 것이, 힘들어진 현실이지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에, 언제 어디서든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외칠 수 있다. ‘여호와의 집’으로, 달려가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누구든지 내 심령 안에 거하시는, 여호와의 집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다.
다윗은 사람들이 함께, 예루살렘에 오르기를 기뻐했고, 예배드리러 가자는 말에 기뻐했다.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기쁨이, 최고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기쁨을 빼앗으려고, 끊임없이 역사한다. 예배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새 힘을 얻게 만든다.
(슥8:21-22)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들어와서, 감격했다. 그곳은 가난한 자, 부한 자, 높은 자, 낮은 자가 차별 없이, 구원과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잘 짜여 진 성으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예루살렘성에 모일 때마다,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했다.
서로 다른 지역, 다른 직업, 서로 다른 환경에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집에 모여, 예배드릴 때, 한 피 받아, 한 성령으로, 한 가족을 이루어, 완벽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기도하며,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의 심령은,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평온하다. 무슨 일을 만나도, 형통한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형통’은, 내가 원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지고,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형통함이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것,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복이다.
(시122편)은, 다윗이 쓴 시이다. 다윗은 양을 치는 목자였지만, 가장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고, 가장 축복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다. 본문 말씀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하고 노래했다. 왜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하는가?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교회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평안의 복과, 형통의 복을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오늘 우리가 교회에 오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다.
예배에 성공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과, 평안의 복을 누릴 수 있다. 공적 예배에, 열심을 내시기 바란다. 성공적 예배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기 바란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과 척도는, 영과 진리로, 얼마나 예배를 잘 드리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결론이다. 다윗은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고, 가장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노래했다. 하나님은, 평안과 형통의 복을 주신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우리 교회가, 주님이 거하실만한, 거룩한 집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평화를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참으로 ‘예배는 내게 주신, 선물이다.’고, 고백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쁨으로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예배드리게 하시고, 그곳에서 참 평안과, 형통함의 복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여호와의 보좌를 두신 곳, 그곳에서 날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곳, 교회에 나와,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형통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시고, 주님의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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