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11월 1일 - 마른 뼈가 살아나는 종교개혁(겔37:1-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1-09-08 |
마른 뼈가 살아나는 종교개혁(겔37:1-5)
하나님 아버지, 10월 마지막 주일, 종교개혁을 기념하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희들,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빛을 비추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저희들의 모든 죄를 돌이켜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시고, 정결하게 해 주시옵소서.
어둡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우리 신앙을 개혁하고, 영적으로 부흥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 시간,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나, 가정에서 영상을 통해, 예배하는 모든 성도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1-5)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당시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에 대한,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임으로, 이것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개혁교회들은 이날을 기념하며, 교회가 항상 개혁되고, 부흥하기를 다짐하며,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주일로 지키고 있다.
바다의 보리새우는, 허물을 벗어야만, 살 수 있다. 어릴 때는 허물이 부드러워, 자주 허물을 벗지만, 시간이 지나면, 허물은 딱딱해져가고, 벗는 기간도 길어진다. 그러다가, 더 이상 허물을 벗지 못하면, 그 허물에 갇혀, 죽게 된다. 교회도, 기업도, 세상도, 허물을 벗지 못하면, 모두 죽게 된다.
허물을 벗는, 개혁이 필요하지만, 개혁하려다가, 개악하면 안 된다. 종교개혁은, 초대교회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환원운동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교회로, 돌아감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 5대 강령으로, 개혁하였다.
본문의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 가운데, 한 골짜기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른 뼈가,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널려있는 마른 뼈는, 당시 포로 생활에 절망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들은 한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부패하고 타락하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을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할 줄 몰랐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결국 나라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북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남왕국 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며, 이방 민족을 업신여겼는데, 그들의 포로가 되어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들의 절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을 보면서 ’이제 희망은, 다 사라졌다. 우리는 끝났다.‘라며 절망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자, 사람들은 굶어죽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자,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개처럼 끌려갔다. 예루살렘 성전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건장한 젊은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어졌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가, 70년 동안 계속되어, 골짜기마다, 마른 뼈들로 가득했다. 그때 에스겔이 포로로,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3上)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다시 회복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마른 뼈들의 상황은 (2中)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고 했다. 아주 절망적인 상태였다. 뼈는 땅속에 묻혀야 하는데, 지면에 널려있으니, 보기에 흉하고, 무서웠다. 장사지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때 하나님은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러한 뼈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살아나게 했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모습만이 아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을 때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하고 부패했던 모습이며, 오늘 하나님을 외면하고 불신앙 가운데, 내 멋대로 사는, 우리 시대의 모습이다. 성도들은, 이러한 나라와 교회의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며,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살려내야 할 사람들이다.
코로나 시대인, 지금이야 말로, 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나라도, 교회도, 지도자도, 국민도, 성도들도 다 개혁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저지른 행동들, 부정부패, 거짓, 음란, 권모술수 회개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회개를 외쳤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도, 지도자도, 교회도, 성도들도, 회개하지 않는다. 교회만이라도 회개하고, 다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교회들이,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개혁의 원리를 잊었다. 그러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무엇을 개혁했는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왜곡되고 변질된 교회가, 참된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고, 인간들이 세운 전통과 관습에 가려졌던 복음이, 확실히 드러났다. 종교개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면에서, 긍정적인 발전에 공헌했다.
1. 기독교 진리의 개혁
기독교 복음을 왜곡시킨,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복음, 진리를 회복하는 운동이다. 우리는 타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지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똑바로 알아야 한다.
로마 가톨릭은, 교황의 말을, 성경 말씀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는, 교황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보다 위에 두었으며, 교황은 성경을 해석할,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가톨릭교회는, 개신교가 사용하는 정경, 66권외에 외경을, 정경처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절대 권위만을 인정하며, 교황의 말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우리는 천주교의 교리적인 오류를 분명히 알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한, 기독교 진리 위에 똑바로 서야 한다.
(1)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가 없다. 천주교회의 성례에는 7성사가 있다. 그 중에 ‘고백(고해)성사’가 있는데, 사제에게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한다. 천주교는, 영세에 의해, 원죄가 사해지고, 고해성사를 통해 자범죄가 사해진다고 말한다.
천주교회에서는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기에, 일반성도들이 신부를 비난하는 경우가, 개신교에 비해 월등히 적다. 왜냐하면 개혁교회는, 하나님 앞에만 죄를 고백하기에, 사람들 앞에는 죄를, 다 숨겨놓을 수 있다. 그래서 목사 앞에서도 당당하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신부 앞에서, 크고 작은 모든 죄들을, 다 고백하고 살기에, 신부를 피해서, 도망 다니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 죄를 다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신부가 큰 잘못해도, 신부에게 덤벼드는, 천주교 신자는 없다.
로마가톨릭은 사제를 통해, 직접 죄가 용서된다. 영세를 통해 원죄를 사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의 용서가 일어난다. 지금도 이론적으로, 천주교회는, 면죄부를 얼마든지, 팔아먹을 수가 있다. 물론 지금 천주교회는, 면죄부를 팔지는 않지만, 그들의 신학적인 이론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
(2) 마리아와 관련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많은 성도가,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핵심은, 5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①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 ②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계속 죄 없는 삶을 살았다. ③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④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요, 교회의 어머니이다. ⑤ 구원 사역에 있어서, 마리아의 중재성이다. 그러면 과연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살았나? 예수님이 태어날 때는 동정녀였지만, 요셉과 결혼하여, 예수님의 많은 동생들을 낳았다고, 성경이 말한다.
(마13:55-56上)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렇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이처럼 분명한 성경 기록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그렇게 말씀했기에, 그것이 진리라고 한다.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교황 말씀은, 오류가 없다고 한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다며,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진리들을, 마리아에게 적용한다. 그러면 마리아께 기도하는 게 유효한가? 천주교회는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게, 효과가 더 있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보다 마리아가, 더 인자한 성품을 가졌다고 말한다. 성경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말한다. 인간의 행위와 교황의 말로 덧칠한, 큰 오류 외에, 이처럼 로마천주교회는, 진리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
성경의 진리가,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다면, 로마가톨릭은 사제를 통해서 용서받는, 간접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러한 잘못된 교리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다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의 진리와 교리의 개혁은, 상당부분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개혁은, 완성되지 못했고, 사역개혁은, 시도조차 못하고 말았다. 이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또 다른 종교개혁, 예배의 개혁,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2. 교회 예배의 개혁
성령으로 충만하고, 생명력 있는 교회는, 한 결 같이, 예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살고, 민족이 살아난다.
하나님은 이 시간, 잘 짜여진 프로그램과, 웅장한 예배당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자를 찾고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녀의 반응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요, 사귐이기에, 예배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예배에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이 크게 보이거나, 생각나게 한다면, 올바르지 않다. 좋은 시설도, 내가 좋아하는 유명인도,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치장한 강단이나, 강대상은, 검소하게 바꾸는 것이 좋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자도,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특별한 가운이나 장식, 박사학위를 표시하는 무늬 등은, 특별한 시간 외에는, 절제되어야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먼저, 가장 영광스런 예배자가 되어야지, 자신을 보여주려 하다가, 예배에 실패하면 안 된다.
예배하는 자리에는, 천지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임재하신다. 찬양 가운데, 기도 가운데, 말씀 가운데, 우리 영혼에, 임재하신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예수님은 피 흘린, 그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상처가 있든지, 다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 피 묻은 모습 그대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 성 삼위일체의 영광이, 예배 가운데 충만한데, 표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찬양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신 일을 열광적으로 높이고, 자랑함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마다, 입술만 움직이는 찬양은, 옳지 않다. 배에다 힘을 주고, 큰소리로 찬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성경은 주님이 오셨을 때, 기뻐하며, 환영하며, 박수를 치며, 찬양하라고 한다.
손을 들고 환호하며, 찬양하라고 이야기한다. 때로는 무릎 꿇고, 엎드려 경배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춤을 추며 경배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와 찬양을 보면, 19세기에 만들어진 복음성가가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찬송,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을 기뻐하는 찬송, 하나님이 오심을 마음껏 행복해 하는 찬송이, 많이 모자란다. 예배 시간마다 반드시,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한다. 몸을 온전히 드리고, 시간, 마음과 인격을 온전히 드려야 한다.
침묵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예배를 드리자. 마른 뼈에 생기가,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었지만, 생기가 없다면, 죽은 모습이기에(8), 생기가 생겨나도록 하였다. 생기가 넘치는 예배를, 드리기 바란다.
3. 성도들의 사역의 개혁
교회 예배가 살아날 때,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 뼈 같은 영혼들과, 교회들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 그리고 예배의 갱신과 함께, 사역의 개혁이다.
(엡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목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했다. 목사의 사역과, 성도들의 사역은 구분된다. 목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사역이다, 성도는 봉사의 일과, 그리스도의 몸, 작은 교회, 목장을 세우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목사의 사역이,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는 말은, 성도를 흠과 티가 없도록, 도와준다는 말이 아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 뼈들이 골짜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 뼈들을 자기 위치에, 정확하게 갖다 놓아,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야 한다.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성도를 구비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다. 성도의 사역은, 봉사의 일을 하게하는 것이다.
원래 봉사란 말은,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가족은 ‘오이코스’, 봉사는 ‘오이코노모스’다. 가족을 위해 일하는, 즉 배고픈 가족을 위해, 밥을 짓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또 헤어진 옷을 옷을 깁는, 어머니 손처럼, 봉사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목장에서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 주는 사역,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나의 격려와 칭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격려하는 것이다. 목장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는 활동이다. 배고픈 내 목장가족들을 위하여, 밥을 짓는 손길을 말한다.
봉사의 사역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섬겨주는, 사역을 의미한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것이다. 전통 교회에서, 이 모든 일들을, 목사들이 감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일들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열매가 없었다.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렇게 함으로, 성도들이 써야 될 면류관을, 그동안 목회자들이 빼앗아 갔다. 목사의 손에만 있던 사역들을, 성도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제2의 종교개혁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디자인한, 참된 교회의 성도들이 되었을 때에, 교회 소그룹의 지도자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직접 전도한 사람들을 모아, 목장의 지도자가 되라. 예배를 섬기는, 사역자가 되라. 남녀 선교회의 사역자가 되라. 이것이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것이 제2의 종교개혁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말씀을 맺겠다. 종교개혁은 500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오늘 교회들은, 이 시대에 에스겔로 부름 받았다. 이 시대 루터로, 마른 뼈들을 살려내라고, 영혼들을 살려내라고, 한국교회를 살려내라는 부름을 받았다.
분명히 교회는, 이 세상 어떤 곳보다, 가장 거룩하고 성결하지만, 결코 흠이 없고,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개혁이 필요 없는, 완성된 교회가 아니고, 완성을 위해 계속 개혁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기억하며, 자기 성찰을 계속해야 한다. 교회가 자만하며, 개혁을 멈춘다면, 교회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잘못된 길로 나갈,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계속 개혁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돌아가, 진리 위에 굳게 서게 해 주시옵소서. 이 땅에서 사탄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며, 삼키려 하지만, 진리로 끝까지 싸워 이기는,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흔들리거나 변함이 없는, 영원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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