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7월 19일 -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3:14-18)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1-08-10 |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3:14-18)
(단3:14-18)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시며,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과, 일하신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우리는 그 믿음이 참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고난과 시련 속에서, 알 수 있다. 겉으로 볼 때는, 신앙이 꽤 좋은 듯 보인다.
그러나 시험과 환난 앞에, 쉽게 낙심하고, 믿음이 힘을 잃고, 주저앉아, 예배마저 멀리하는 경우가 있다. 고난과 실패를 당하면, 형식적인 신자는 ‘하나님이 계시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게 될까’라며, 깊은 회의 속에 고민하다가, 낙심하고, 교회를 떠나버리기도 하니, 너무나 안타깝다.
오늘 본문에는 신앙의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에 대해 말씀한다. 본문의 배경은, 남 왕국 유다가, 주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하고, 유다의 많은 인재들과, 지도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살 때의 이야기이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전에 꾸었던, 큰 신상의 꿈 때문인지, 아니면 종교를 표방해서, 권력을 유지할 목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큰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각종 악기를 불 때, 그 앞에 엎드려 절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어기고, 엎드려 절하지 않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했다.
이 때 포로로 잡혀 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상을 만들거나, 그 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대로,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았다. 이들을 시기하던 갈대아 사람들이, 이를 보고, 왕에게 고해 바쳤다. ‘풀무’는 ‘용광로’로, 벽돌을 굽거나, 금속을 녹일 때 사용되었던 가마솥이다.
고대 근동에, 화형의 형벌에도 쓰였다. 고고학 조사 결과, 거대한 용광로가 발굴되었는데, 그 비석에 ‘바벨론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화형 시키는데, 사용했다고, 성경대로, 기록되어 있다. 느부갓네살 왕이, 심히 분노했지만,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 청년을 불러다가, 직접 물었다.
1. 믿음의 사람에게 다가온 고난(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왕은 협박과 회유를 함께 말했다.
이때 세 청년은, 담대하게 대답했다. 고난 중에서도, 세 친구는 믿음을 굳게 지켰다.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 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느부갓네살은 분이 가득하여, 풀무불을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다음, 세 청년을 결박하여 던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불 속에 던져진, 세 사람이 타죽지 않고, 불 속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들을 던져 넣은 자들은, 불에 타죽었다.
(22)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5)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그들을 결박한 끈은, 다 타버렸지만, 그들의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했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세 사람이 던져졌지만, 불 속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그분은 바로, 세 사람을 위로하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 구약 속의 주님이셨다.
이를 지켜보던 느부갓네살 왕이, 세 사람을 불러냈다. 불에서 나온 그들은, 놀랍게도 머리털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고, 오직 그들을 묶고 있던 끈만, 불타 없어졌다. (2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믿음을 지켰더니, 하나님께서 그 맹렬한 불도, 그들을 태우지 못하도록,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셨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즉, 불에 타 죽을지라도, 우리의 신앙의 절개는, 굽힐 수 없고, 또 우상 앞에, 절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풀무불보다, 더 뜨거운 신앙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 불에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않고, 불탄 냄새도 없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도, 건져주시고, 불의한 세상, 권력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줄 믿는다.
(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2. (그러면) 그들이 보여 준, 절대 신앙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① 세 친구들은, 바벨론 땅에서도, 변함없이 믿음을 지켰다(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두라 평지에 세운, 금 신상의 낙성식에서, 악기소리가 울려 퍼질 때,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들만은, 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해를 당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또한 신앙을 지키다가, 박해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는, 세 친구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고, 그들을 향한 ‘질시’ 때문이었다. 포로였지만, 높은 관직을 차지한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의 법을, 잘 지켜야 하는가? 잘 지키지 않아도, 되냐는 것이다.
물론 잘 지켜야 된다.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여기서 ‘권세’는 권세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법은, 세상의 질서 유지와,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법을 제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법은 지켜야 한다.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자다. (롬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만일 나라의 권세자나 법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핍박하고, 박해할 때는, 상위 법인 주님의 권세로, 이러한 권세자와 법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고, 항거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전도를 하지 못하게, 경고하고 위협할 때,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4:19)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성도는 이 땅에 속해 살아가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
②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회유와 협박에, 흔들리지 않았다(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실, 신이 누구이겠느냐”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한편으로는 회유하고, 한편으로는 협박했다. 지금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운 사람은, 당시 세계 최대강국,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이었다. (1中) “…높이가 60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이 60규빗은 30m가 조금 못되는, 어마어마한 신상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상’이었기에, 그들은 절할 수 없었다. 느부갓네살은,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를 듣고 진노했지만, 신상 앞에 절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었다. 회유 작전을 썼다. 한편으로는 위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유했다.
때론 극한의 위협보다, 회유로 관용과 친절을 베풀면서, 다가오는 시험이, 더 위험하다. 느부갓네살의 말은, 세 친구를 더욱 마음 상하게 한다. (15下)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이처럼 느부갓네살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 나라, 피지배 민족이 섬기는, 한 지방의 신에 불과했다.
왕에게는, 다니엘의 친구들이 믿는 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호하는 민족을, 지금 자기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지금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징계하시는 몽둥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세 친구는 이제, 결단해야 했다. ‘적당히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인가?’ (16)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그들의 태도는, 단호하고, 분명했다. 생각해 볼, 가치도 없었다.
성도가 결단해야 될 때, 우물쭈물 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결단의 태도를 보신다. 신앙에는 ‘중립지대’란 없다.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그들은 느부갓네살 앞에서, 하루 이틀,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즉시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
왕도,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는 사람이요, 금 신상이 아무리 어마어마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왕명이라도, 고려할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③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하시든지, 오직 믿음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보여주었다(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능히 자신들을 구원하실 분이지만, 설령 죽음의 순간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겠다고 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이다. 때로 당장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지금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마지막 선고를 받았을지라도…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본문 (18)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를, 잊지 마시기 바란다.
‘죽어도, 우상 앞에는 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벨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원하신다면, 그것이 주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교자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세 친구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었다. ‘만약에’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고, 시험하는 것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마침내 승리한 것처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고의 신앙 가운데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이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 두렵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고통 앞에서, 실패하고 낙망하여 신음할 때도,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뛰어넘는 고백,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며, 목숨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세 친구의 신앙고백이다. 이 놀라운 신앙과,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지켜 본 느부갓네살은, 이제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호와와 같으신 분은, 없다고 말한다.
3. 고난이 변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됨(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이처럼 성도의 영광은, 나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데 있다. 비록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도,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하나님이 온 세상의 구원자 되심을 알게 된다면, 거기에 교회의 영광이 있고, 성도의 기쁨이 있다.
(고후1:8下-9)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믿음을 고백했다.
본문 말씀은, 바벨론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만 아니라,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교훈을 위해서도 기록된 것이다.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특별히 말세에 적용되는, 예언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가? 믿지 않는 사람도, 그들의 삶 속에, 무엇인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 열심히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삶 속에서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믿고 구하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다. 믿기 때문에,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끝까지 신뢰하며, 충성된 믿음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을지라도, 변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가?
다니엘의 세 친구, 이들의 빛나고, 고귀한 신앙의 모습! 지금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도 부끄럽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다. 참으로, 크고 놀라운 신앙은, 오늘 저와 성도님들 모두가,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마28:20下)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바란다. 세상의 마지막 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이 세상에 돌아가는 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점점 교회가 위축되는 것 같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위협받는 분위기를 느낀다.
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코로나에 감염될 확률이, 높지 않느냐…, 확률적으로 단편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지만, 온 교회와 성도들의, 많은 노력과 희생은, 보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 너무도 아쉽다. 교회 모임은 안 되고, 동성애자들의 축제 모임은 된다니, 악한 모습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간절한 기도와 권면뿐…, 이제 우리 신앙을, 증명해야 할, 마지막 날이, 더욱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와 같은 때에, 성도들은 두려움과, 염려 속에 있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해서,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한다.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할 때, 힘들고 어려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이 붙들어주시고, 힘과 능력을 주시고, 능히 이기게 하실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승리해서, 마침내 큰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이전글 : 2020년 7월 12일 -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하라!(행2:37-41) | |
다음글 : 2020년 7월 26일 -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6)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