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4월 19일 -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창4: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4-19 |
첨부파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1.hwp(22K) |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창4:1-7)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께도// 그리고 영상을 통해, 각 가정에서, 온라인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성도님들께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주시고, 죄를 덮어 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입혀주셨다. 그리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다. 죄 지은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생은 고통스럽다.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행복할 수 있는데, 그런데 죄로 인해 분리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죄인들을 만나주시고, 용서해주신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배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만을 구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모여서 행하는, 예식도 아니다.
죄인들이,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이 땅에서의 삶과 연결될 때, 우리는 힘을 얻고,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사라진 예배는, 사람 중심의 형식적인 예배가 되어서,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능력도, 생명력도 받을 수 없는, 예배가 된다.
때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렸지만, 방금 전 들었던, 설교의 본문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교회 문을 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교회는 없지만, 항상 예배가 끝나자마자, 예배당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을 만난/ 예배를 드림에, 성공자라고, 할 수 있는가?
혹시라도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고, 예배드리지 않으면, 왠지 찜찜하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예배드리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예배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배도 있고, 도리어 책망을 받는 예배도 있다. 또한 영적 예배와, 육적 예배로도 구분할 수 있는데, 교회에 나와 예배드린다고 해서, 모두 올바른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진정 올바른 예배이며, 영적 예배이다.
보여주기 위한 예배, 육적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 올바른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 예배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가인의 예배와, 하나님께서 받으신 아벨의 예배가 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참으로 하나님이 받으신, 그런 아벨의 예배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1.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나?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감찰하신 후에, 그 예배를 거절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예물을 언제나 감찰하신다. 그리고 예배를 받기도 하시고, 거절하기도 하신다.
(1)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은 이유)는, 땅의 예배였다(2下).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농사하는 자”(오베드 아다마)는 원문으로 직역하면, 땅에게 예배하는 자, (땅에게 봉사하는 자)로도 해석된다. (3:17中)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했다.
가인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땅을 예배했다.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그 땅의 소산(열매)을 드렸다. 여기에서 “제물”(민하)은, “선물, 소제”로도 번역된다. 그래서 가인의 제물은 소제이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는 분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죄 짓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기에, 소제를 드릴 수 없었다. 소제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이 드려야 하는, 온전한 헌신의 제사다. 또 소제는 반드시, 고운 가루로 제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단에서 불살라야 한다(레2:1-2).
소제를 드리려면,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려야 한다(2:14).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가인은 하나님께 쫓겨나와, 하나님이 저주하신 땅의 열매로, 예물을 그냥 드렸다. 가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죄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죄를 용서받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과 죄인이 된, 자신 사이에, 중재자가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가인만이 아니다. 가인 이후의, 지금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려주신 그 대속의 피로, 죄사함을 받지 못한 예배는, 땅의 예배이다.
때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보혈이 없이, 영적 역사만 강조하는 예배도, 올바른 예배는 아니다. 요즘 뛰어난 장비와, 기술을 갖추고, 예배시간마다, 좋은 음향, 좋은 배경을 연출해서, 예배자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예배는,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예배이다. 내 마음대로, 내 감정에 치우쳐, 예배드려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생명력이 넘쳐나는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그런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
(2) 자신을 드리지 않는 예배였다(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여기서 가인은, 땅의 소산만 드렸지, 자신을 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자신을 드리지 않자, 그 예물도 거절하셨다. 자기 자신을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예물만, 기뻐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자신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에, 형식적인 예배가 된다.
진정한 예배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에,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드리는, 희생과 헌신이 없는 예배는,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예배요, 공허한 예배일뿐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내가 죽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제사 드리는 자는 “제물을 잡아서 드려야” 진정한 예배의 모습이다.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올바로 예배드리면, 반드시 내가 제물로 죽는, 역사가 나타난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으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는, 내가 죽든지,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죽이려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내가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제일 두려운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교인이라고 말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교회를 훼방하게 된다. 죄가 죄를 낳기 때문이다. 올바른 예배를 드리면,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자아가, 다 죽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내 심령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고집, 내 의지, 내 신념, 내 욕심,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충돌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 앞에 죽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예배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내가 복음의 핍박자, 훼방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7下)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가인은, 시기와 증오를 이기지 못해, 결국은 들에서, 동생을 쳐 죽였다(8). 성도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도, 왜 분내고,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나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원하시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아벨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고, 원하시는지를 알았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자신을 드리는 예배다(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아벨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 자신을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려면, 자신을 예물로 드려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해, 예배하는 경우가 있다. 찬양할 때도, 나의 감정을 기쁘게 하려는, 그러한 찬양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찬양이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날 교회에서 부르는 많은 찬송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내 감정을 따라서,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아야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은, 십자가에서 잘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나타나는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져야하는 십자가는,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올바른 예배가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나 자신이 바쳐진 헌신과, 희생의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아무리 많은 제물과, 좋은 것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먼저 나를 드리지 않으면, 그 제사를 받지 않는다(사1:11-17).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기 전에, 자신을 드린, 아벨의 예배를 받으셨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기에서 더 나은 제사는, 자신을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자신을 믿음으로 죽여 드리는 예배다. 예배라는 단어 worship은, 가치를 뜻하는 worth에서 나왔다. 우리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한다. 아벨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최고 가치, 우선순위를 두었다.
(2)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예배였다(4)
아벨은 “양의 첫 새끼들”(브코로트)을 드렸다. 하지만 가인은, 첫 열매를 드렸다는 말은 없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 새끼를 드림은, 하나님을 최고,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는 의미다(출23:19, 신26:2).
또 아벨은 첫 새끼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양의 기름”(헤레브)을 드렸다. 구약시대에 기름은, 가장 좋은 것을 의미했다. 지금 우리는, 영양을 과잉 섭취하여,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을까 고민하기에,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아직도 기름을, 소중하게 여기는 종족과, 지역들이 많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는, 여인들이 살이 조금 있어야, 미인으로 여긴다. 살이 없고 마르면, 인기가 없었다. 구약 시대에 기름은, 가장 좋은 것을 의미했다(레1:8, 8:20 민18:17). 신약 성경에서도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하는,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한다(마7:3, 눅11:13).
(3) 하나님의 방법대로 드리는 예배였다(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그들에게 제사 제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아담에게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그리고 죄지은 아담에게, 새 언약을 제시했기에,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르쳐 주신, 언약에 근거한 제물이었기에, 즉 피의 제물이기에, 받으신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사실을 너무 분명하게 증언한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양을 잡아서 제단을 쌓고, 가인은 자기 마음대로, 제물을 선택하여,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했다. 아벨이 바친 양의 첫 새끼는, 장차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었다(요1:29, 1:36, 벧전1:19). 양을 잡을 때 나오는 피는, 장차 그리스도의 피를, 보여준다. 그래서 (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흘리신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상징한다. 아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믿음을 보였다. 그러나 가인은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고,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거둔 열매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
오늘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하나님 말씀을 기준삼아, 예배드리나요? 하나님은 자신을 드리는 제물과, 피의 제물을 보셨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까?
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나요?/ 먼저 나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온전한 피의 예물을 드리셨나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자의 모습이며, 예배드림에 성공자가 맞습니까?
(대하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요4:23中)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가 온전한 예배드리는, 성공자가 되면, 하나님은 올바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상을 베푸신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고 나아가, 성령님과 말씀 안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 예배에 성공자가 되시기 바란다. 우리는 세상의 일에도, 성공자가 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배에 성공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세상의 일에도, 열심을 내야 하겠지만, 예배에 더 힘쓰시기 바란다.
특별히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주일에 예배당에 다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 한국교회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경험하고 있다. 하루속히 이런 상황이 종식되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배에 성공하는, 다운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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