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4월 5일 - 무화과나무 잎 옷과 가죽 옷(창3-10, 21)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4-05 |
첨부파일: 무화과나무 옷과 가죽 옷1.hwp(23K) |
무화과나무 잎 옷과 가죽 옷(창3:7-10, 21)
바울은 (골2:2)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그리스도다.”라고 했다. 예수님도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했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경의 주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피로 물들어 있다. 구약성경을 짜면, 짐승의 피가 나온다. 신약성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 이처럼 성경은, 피의 책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인간 구원의 방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해결했다. 예수님의 피가, 인간을 구원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에덴동산을 지키며, 다스리며 살도록 복을 주셨다.
그러나 마귀가 그들에게 와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만들었다. 이것이 아담의 범죄요, 인류 최초의 죄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아에카)”고 부르셨다.
이때 죄를 지은 아담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런데 숨은 이유가 이상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으면, 말씀을 듣지 않았기에, 면목이 없고, 두려워서, 숨었다고 해야 맞는데 (10)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다. 명령을 어겨서, 벌 받을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통일교나, JMS처럼, 간음해서, 숨은 것이 아니다.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서, 두려워, 숨었다고 했다. 여기에서 (벗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롬”인데, “아람”(벌거벗다, 교활하다, 간교하다)라는 말에서 왔다. 자신의 “교활하고, 간교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1. 아담은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께 드러나자, 부끄러운 모습을 깨달았다(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더니, 정말 눈이 밝아졌다.
자신들이 발가벗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을 깨달았다. 그래서 벌거벗은 것이, 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귀의 말대로, 무엇이 좋고, 나쁜지,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마귀의 말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마귀의 말이 맞는다. 그러면 마귀가 무엇이라고 말했나?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되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무엇이 알았다. 즉 무엇이 죄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되기는커녕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고, 두려워서 숨었다.
그들에게 찾아온 감정은, 죄책감, 죄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허둥지둥 만들어낸 것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로, 인류 최초의 옷이다. 죄지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자신의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기에, 죄를 지으면, 부끄럽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죄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죄를 해결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마귀는 죄지은 인간이, 감추고 숨도록 만들지만,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들이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 옷을 만들어 입었다. 여기서 치마는 “하고르”이다.
“하고르”는 “허리 띠, 앞치마”다. 온전하게 자신을, 절대로 감출 수 없는 옷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옷은, 한 부분만 가릴 뿐이지, 전체를 가릴 수는 없다. 일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자, 무화과나무 잎 치마로는, 부끄러움을 모두 가릴 수 없기에,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
이들이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치마 옷은, 불완전한 옷이다. 베이컨이란 성경학자는, 에덴동산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무화과나무 치마를 만들어 입어보았다. 더운 열기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말라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 조금만 닿아도, 찢어졌다. 정말 불안하기에, 짝이 없는 옷이었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려고 하면, 낮에만 10벌 이상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옷을 만드는 수고만 더할 뿐이었다. 무화과나무는 “테에나”라 하는데, “아벤”이라는 말에서 왔다. “아벤”은 “헛됨, 거짓, 우상”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손으로, 옷을 지어서 입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소용이 없었다.
헛된 노력이고, 실패로 끝났다, 우상이 이와 똑같은 모습이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이, 어떻게 죄와 부끄러움을, 다 가릴 수 있겠는가? 미흡할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기려는 헛된 행동들이, 바로 종교, 도덕, 선행, 철학, 교육, 과학 등, 인간적인 모든 행동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로는, 죄를 감출 수가 없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는, 미흡한 무화과나무 잎의 옷은, 부끄러움이 모두 드러나 버리고 만다.
(계3:17-18)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시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죄지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을 곳을 찾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감출 수 있나?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우리를 부르신다.
2.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한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아예카”라는 음성은, 책망의 음성이 아니다. “아이”(어디에) + “카”(너), 죄지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사랑이 넘치는,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의 죄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나오면 된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안타까워하며 말씀한다. 이때 히브리의 모음만 변화되면, “에이코”가 되는데, “에이”(어디에) + “코”(이와 같이) = “어떻게, 어찌하여”라는 의미다.
“내가 너에게 기회를 주는데, 어떻게 이처럼 숨을 수 있느냐?”는 음성이다. 인간의 배신을 한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죄는 이미 세상에 들어왔다. 참 보기 좋은 세상이,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하나님은 한탄하신다. “사랑하는 사람 아담아! 어찌하여 이렇게 불안하여, 떨고 있느냐?”고 말씀한다.
죄지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을 곳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부르심은,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기 위한 부르심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실 때, 변명의 기회로 삼지 말고, 어떻게 내가 떨어졌는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 육체가 있을 동안에는, 돌아올 수가 있다. 그런데 “아예카”를, “에이카”로 모음만 변화시키면, 또 다른 의미로 변화되어 “슬프다.”는 말이다.
구약성경에 예레미야 애가가 있다. “애가”는 슬픈 심정을 읊은 노래인데, 히브리어로 “에이카”이다. “호이”(아아, 화로다) + 카(당신)이다. “네가 화로구나.”고 하는 말이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물로 지켜보며, 슬픔과 눈물로 쓴 시다.
예레미야는 처참한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고, 에이카(아아 슬프다!)라고 비탄의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예레미야 애가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시는 소리는,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소리이다. 네가 떨면서 숨어있다니, 어째서 이렇게 되었느냐? 범죄한 인간은, 죽음의 병에 걸렸다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형벌을 주셨다.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고 하셨다(16). 아담에게는 평생에 수고를 하여야, 먹고살도록 만드셨다(17).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18) 했고, 흙으로 돌아가리라(19)고 하셨다.
3. 죽음에 이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는 땅에서, 무화과나무 치마 옷은, 아주 부적합한 옷이다. 자주 찢어지고, 상처가 나는 옷이다.
죽음에 이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는 죄지은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고, 온전하게 가려주는 것이다. (창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여기서 “역청”은 (코페르)이고 “칠하라”는 (카파르)다.
그 뜻은 “덮다, 속죄하다, 용서하다, 지워버리다, 화목을 이루다”는 말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드러내 보여주는 율법이나, 거울과 같다.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고, 죄를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죄를 덮어주거나, 용서할 수는 없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을 수 있지만, 덮어줄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도덕과 종교, 교육과 철학을 통해서, 선과 악을 깨달을 수도 있고, 선악을 다 구별할 수도 있다. 율법을 가진 사람은, 율법으로 자기의 죄를 깨닫는다. 그러나 죄를 발견되었을 때, 해결하지는 못한다.
불교는 죄가 드러나면, 공양미를 드리거나, 절하고, 참선하고, 방생하고, 선행과 고행을 강조함으로, 죄를 덮으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손으로, 무화과나무 옷을 만들어, 입는 행위에 불과하다. 아담은 자기 손으로, 무화과나무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없었다.
무화과나무 옷을 해 입고도, 하나님 앞에 두려워서 숨어 버렸다. 무화과나무 옷으로는, 죄를 덮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행으로도, 죄를 덮을 수 없다.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벌거벗은 것을 본 이상, 내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만들어 입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온전히 가려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치마를 만들어 입어, 자신을 가리려는 아담을, 먼저 부르셨다.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여, 불완전해진 사람은, 불완전한 옷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한 후에,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범죄하고 나면, 부끄럽다. 자꾸 가리고 싶고, 숨기고 싶다.
그래서 범죄 한 인간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는가? 이렇게 그들이 만든 무화과나무 치마를 입고, 큰 나무 뒤에 숨어버렸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가 오죽하겠는가? 아이들 소꿉장난하는 풀로 만든 치마였다. 감추려던 것이 금방 오그라들면서, 모두 다 드러났다.
또 다시 만들어서 입어 보아도, 잠시잠깐 뿐이었다. 아담이 느낀 수치심, 죄책감이었다.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불쌍한 이들을 내려다보신 하나님은, 불완전한 아담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벗기셨다. 동산에 있는 짐승, 아마 양으로 생각된다.
어린양을 잡아서, 하나님이 친히 가죽옷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입혀주셨다. 어린양은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서, 어린양이 희생되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가죽옷을 입은 후에야, 죄는 가리어지고 해결된다. 가죽옷은 일생을 입어도, 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혔더니, 수치도 가리고, 오랫동안 입을 수 있었다. 마음도 편안해졌다. 인간이 만든 치마를 가지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음을 뜻한다. 죄의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죄를 범한 인생을, 구원하는 방법은, 누군가 대신 속죄의 피를, 흘려야만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다. 하나님이 동물을 희생시키고, 피 묻은 가죽을 손수 벗겨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다. 무화과나무 옷으로는 안 되기에, 피 흘린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옷은 “케토네트”(긴 옷)이다. 전체를 가릴 수 있다. 부분적인 일리가 아니다. 전체를 가릴 수 있어야 진리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끄러운 죄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가려질 수가 있다. 바로 이 가죽옷은, 예수님의 피 흘림을 상징한다.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피를 흘린 옷을 입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옷이다. 그래서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했고, (고후5: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피 흘린 옷을 입어야만, 하나님 앞에서 죄 많은,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22장)은 천국 잔치에서,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은,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던졌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13)고 하였다. 무화과나무 옷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예복,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심을 믿는, 피 흘림의 옷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다.
죄지은 모든 인생은,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신 예수님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내가 만든 무화과나무 옷은 절대로 안 된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피의 옷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감히 부끄러워서, 설 수 조차 없다. 이처럼 아담 하와에게 은혜로 주신, 가죽옷은 예수님의 피로 만든 옷이었다. 피로 만든 옷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온전히 가려주는 은혜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 죽였다. 그러나 아담이 만들어 입은, 무화과 잎 옷은, 피 한 방울도 묻지 않은 옷이다. (히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다. 이처럼 피 옷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죄인 된 순간부터, 하나님은 사람에게, 피 묻은 옷을 입히기 시작하셨다. 이 가죽옷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피의 모형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수많은 짐승이 피를 흘려야 했고,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피를 흘려야만 하셨다.
가죽옷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음은, 나의 공로나 노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가죽옷 선물로 된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한다.
가죽옷은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은혜이다. 가죽옷을 입으려면, 피를 흘려야 한다. 가죽옷을 입으려면 죽어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분이요,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신 분이고, 대신 죽으신 주님이시다.
지금도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라는 무화과나무 잎,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라는, 무화과나무 잎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기술로, 그런 무화과나무 잎 옷을 만들어서,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죄인의 피는 효과가 없다. 죄 없는 인간의 피만 효력이 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에, 피를 흘려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요, 약속이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부르실 때, 변명하지 말고, 주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나가자. 죄지은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 더욱 더 나아가는 자가 되자. 그리고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더욱 주님께 나아가,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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