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3월 22일 - 서기관들을 물리친 예수님(막12:28-3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3-22 |
첨부파일: 서기관들을 물리친 예수님.hwp(21K) |
서기관들을 물리친 예수님(막12:28-34)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 무리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 광경을 보고, 유대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은 예수님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그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기를 원해서, 함께 모의했다.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3가지로 계략을 세웠다. ① 바리새인들이 나서고, ② 사두개인들이 나서며, ③ 서기관들이 나서기로 했다. 차례대로 예수님께 나아와서, 시험하는 질문을 던졌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하여 물었다.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에 관하여 물었다.
바리새인들의 정치적인 질문도, 사두개인들의 신학적인 질문도,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지를 못했다.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율법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략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했는가?
1. 서기관들의 시험(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한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나아왔는데, 즉흥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사두개인들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리새인들이 또 다시 모였다(마22:34). 앞에서 바리새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에게 보냈지만, 그들의 계략은 실패했다.
뒤이어 사두개인들이 나섰지만, 그들의 계략도 실패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이 나섰다. 당시 제사장들은, 사두개파였다.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였고, 성경을 베끼는 일을 했다. 당시에는 인쇄기나, 복사기가 없었기에, 성경을 다 손으로 써서, 베껴야만 했기에, 성경을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바리새파 서기관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마22:35) 말씀은, 그를 율법사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서기관들 중에서도, 율법에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에게 잘 대답한 줄을 알았다. 예수님은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음을 밝혔다.
그러므로 바리새파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을 옳게 여겼지만,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나아왔다. 이를 위해, 이러한 질문을, 예수님에게 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출20장)에는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십계명에 사용된, 히브리어 글자의 수가, 613개이다. 따라서 유대교 랍비들은, 율법을 613개의 계명들로 구분했다. 그 중에는 “하라”는 계명도 있고, “하지 말라”는 계명도 있다. “하라”는 계명들, 긍정적인 계명들의 수는 248개다.
사람의 몸에 있는, 지체의 수와 동일하게 정리했다. 반면 “하지 말라”는 계명, 금지하는 계명의 수는, 도합 365가지다. 1년의 날의 수와 같도록 압축했다. 그런데 613가지나 되는 많은 계명들을, 모두 다 기억하며 지키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랍비들은, 더 중한 계명들과, 더 경한 계명들을 구분하기 위해, 많은 토론을 했다. 그들은 더 중한 계명일수록, 마음에 더 깊이 새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서기관은, 자기들이 늘 토론하던 문제를 들고 와서, 예수님에게 물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의 질문은,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했다(마22:35).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서, 무리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도록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때 던진 서기관의 질문이, 어떻게 예수님을 시험하는 계략이, 될 수 있었는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모세가 절대적인 인물이었다. 모세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모세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같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씀했기 때문이다(출33:11).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나자, 사람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출34:35).
하나님이 모세와 직접 대면하여 말씀했기에, 모세가 쓴 5권의 책보다도, 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고 여겼다. 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도, 똑같이 5경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모세를 반대하며, 율법을 폐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했다(마5:17). 따라서 이 때, 서기관들의 계략은 예수님 자신이, 모세보다 더 높이기를 바랐다. 또한 그들은 내심 예수님이, 모세의 글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가르침을 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붙이고,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 당연히 열광하는 무리를, 예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헛된 일들을 꾸몄을 뿐이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따라서 인간의 어떠한 꾀도, 예수님의 지혜 앞에는, 모두다 무용지물이다. 서기관들의 계략은, 오히려 예수님의 신성을, 더욱 밝히 드러내었을 뿐이다. 성도들은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신앙의 첫째가 무엇이라고 말씀했는가?
2. 예수님의 대답(29-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무도 부정할 수 없게, 온전한 대답을 했다. 예수님은 말씀이기에 온전히 말씀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이미 말씀한 대로, 서기관들은 내심 예수님이, 모세의 글과는 달리 말씀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모세가 쓴, (신6:4-5)을 인용했다. 유대인에게는 이 말씀이 너무 친숙한 구절이다. 유대인은 (신6:4-9)을 “쉐마”라 했다. 히브리어 첫 단어가 “쉐마”였기 때문이고, “들으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이 말씀을 암송했기에, 잘 아는 말씀이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무리 앞에서, 율법과는 다른 가르침을 준다는 사실을, 보이기를 원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세의 글을 인용하면서, 모세와 일치됨을 보였다. 그러니 서기관들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잠시, 첫째가 되는 계명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모세가 신명기를 기록할 당시, 이방 나라들은 제각기,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은 죄다, 헛된 신들,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이었다.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다.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신들이 여럿이라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신만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다해야 할 것이 4가지가 있다. ① 마음을 다해야 한다. 마음은 전 인격을 말한다. 마음에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② 목숨을 다해야 한다. 목숨을 다 바쳐, 사랑해야 한다. (요15:13) 말씀과 같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다. 이처럼 우리도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③ 뜻을 다해야 한다. 사랑하려는 의지가 확고해서, 어떠한 형편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④ 힘을 다해야 한다. (요일3:18) 말씀처럼, 말과 혀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 되기 때문이다.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곧이어 예수님은, 둘째 되는 계명을 밝혔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은 모세의 (레19:18)을 인용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는, 서기관들의 계략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은, 자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중히 여기고, 아끼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아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 아침이면 누가, 우리 얼굴을 씻기고, 옷을 입히는가?
누가 우리 입에 음식을 넣어주나? 이미 우리는, 자신을 세밀하게 돌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는 우리가, 이웃의 필요에도, 민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롬12:20) 말씀과 같이, 심지어 우리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해야 한다. 우리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31절 끝에서, 결론적으로 이와 같이 말씀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확대시키는 일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씀이다. (마22:40) 말씀과 같이,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말하자면 이 두 계명은, 벽에 박힌, 두 개의 못과 같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 곧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계명이, 다 걸려 있는 것과 같다. 십계명을 예로 들어보면, 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다. 아울러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내 부모를 공경할 것이다. 살인하지 않을 것이다. 간음하지 않을 것이다.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켜야 계명들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아주 단순하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된다. 또한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다.
3.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물리쳤다(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서기관은 다소 실망했다. 자기가 바라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했다. 예수님이 성경대로, 모세의 글대로,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선생님이여 옳소이다.”하면서, 예수님이 말한 “쉐마”의 말씀이, 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쉐마” 말씀에 그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신4:35) 말씀을 덧붙였다. 자신을 그는 돋보이게 했던 것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했지만, 계속 자기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 나름대로의, 주를 달아서 대답했다. 먼저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목숨을 다하고”를 뺐다. 그런 다음에 “뜻을 다하고”를 “지혜를 다하고”로 바꾸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덧붙여서, 첫째와 둘째 계명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 했다.
서기관이 한 말은 옳았다. 하나님은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보다도,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함을, 더 기뻐하기 때문이다(미6:7-8).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은 그 서기관이,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았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게 말했기에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고 했다. 언뜻 생각하면, 그 서기관은 예수님에게서,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은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했는가? (마23장)을 보면,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공격한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일곱 번이나 똑같은 말씀을 반복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하는 서기관들이었다. 외식은 겉에는 있는데, 실제로 속에는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듯했지만, 실제 속으로는,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 같았다. 회칠한 무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했지만, 실제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방인을 미워하고, 같은 동족인 세리와 죄인도 미워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마23:4).
이렇듯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분명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끝맺음을 했다.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물리쳤고, 그 다음 사두개인들을 물리쳤고, 마지막으로 서기관들도 물리쳤다. 이로써 3가지 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약하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내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약하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기를 간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죄를, 용서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더 사랑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날로 우리에게 넘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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