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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0년 3월 15일 - 사두개인들을 물리친 예수님(막12:18-27)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20-03-15
  첨부파일:   사두개인들을 물리치신 예수님.hwp(21K)

사두개인들을 물리친 예수님(12:18-27)

 

고난주간 셋째 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 계략을 세웠다. 먼저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에게 보내고, 다음은 사두개인들이 나서며,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공략하기로 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님의 답변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았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려고 들지 않았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도 않았다.

결국 그들은 침묵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오늘 본문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다. 그들의 계략은, 신학적으로 정말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실패했다.

1.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시험을 받았다(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유대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파, 및 에세네파로, 4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당시 제사장들이, 주로 사두개파로, 성전을 관할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의 계략이 실패하자, 이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신학적으로 차이가 많다. (23:8) 말씀과 같이,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많이 다퉜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영을 믿지 않았기에, 그들에게는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였다. 자연히 제사장이라는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살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에, 크나큰 장애가 된다고 여겨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없애는 일에 가담했다. 이에 그들은, 평소에 바리새인과 다투던 문제, 곧 부활에 관한 문제를 들고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만,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가 부활을 말씀하지 않았기에, 부활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5:29)에서,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했다. (11:25)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만, 다시 살아날 것을, 여러 차례 말씀했다.

이에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한판 붙어보자고 나아왔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예수님은, 부활을 가르쳤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누가 옳고 그른지, 한번 따져보자는 것이었다.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만 선생님이라고 불렀기에, 대단히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그것은 가룟 유다의 입맞춤과 같았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율법을 모른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무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쇼를 했다. 이것이 그들의 속셈이었다.

곧이어 그들은, 모세의 책 중에서 (25:5) 말씀을 인용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열두 지파를 유지하기 바랐다. 그래야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특이한 율법을 주었다.

아들이 없이, 남편이 죽으면, 죽은 자의 아내는 아무에게나, 시집갈 수 없었다. 반드시 죽은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 미혼인 자와 결혼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첫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죽은 남편의 이름을, 잇도록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 첫 아들은, 죽은 남편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런 후에 계속해서, 둘째, 셋째 아들을 낳으면, 그제야 그 아들들은, 현재 남편의 상속자가 되었다. (38)을 보면, 야곱의 아들, 유다 집안 이야기가 나온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악하게 보고, 죽게 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한 이유는, 바로 이 법에 따른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인용했다. 그런 후에 그들은, 괴상한 이야기를 했다.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다. 아마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부활을 논쟁할 때, 이 이야기를 자주 써먹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20-22)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남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여자였다.

맏형의 상속자를 세우기 위해, 여섯 명의 아우들은, 모두 차례대로, 그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 그러나 아무도, 맏형의 상속자를 세우지 못했다. 결국 여섯 명 모두, 차례대로 죽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여자도 죽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 후에,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아마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 살았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이 땅에서 맺은 가족관계가, 내세에서도 영원히 지속된다고 보았다. 바리새인의 주장대로라면, 여덟 사람 모두, 이 땅에서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다. 따라서 일곱 형제는, 다 같은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 부활한 후에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되어야 했다.

이 땅에서 일곱 형제는, 다 일부일처의 관계를 가졌다. 동생들은 형들이 죽은 뒤에, 차례대로 형수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일처의 관계가, 부활 후에도 지속되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나? 그들은 예수님도, 자기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2.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책망했다(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두개인들의 잘못을, 2가지로 지적하며 책망했다. 성경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너희들은,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우선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다. 이 때 부정어, “못하다”(), 끝에 사용된 아니다”()는 단어가 다르다. 모두 부정의 뜻을 나타내지만, 의미가 다르다. 직설법에서 쓰이는 부정어는, “못하다”()는 절대적 부정어다.

명령법, 가정법, 희구법에서는 보통 아니다()”를 쓴다.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할 때 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면서도,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음을 책망한 것이다. 오해했다는 부정적인 답변을 말하도록, “를 썼다.

만일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이 죽은 자의 부활을, 말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죽은 자의 부활을, 오해했다고 말했고, 그들의 오해하였다는 대답이 나오기를 위해, 질문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성경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 무궁무진한 보화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보화를 캐내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모세가 기록한 (1장과 2)을 보면,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했다. 하나님은 거대한 우주도 창조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창조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이렇듯 하나님의 능력은, 공허를 충만으로, 혼돈을 질서로 바꾸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릴 때, 어찌 하나님이 죽은 자의 가족관계를, 무질서하게 내버려두겠는가?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성경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자. 전능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며, 덧입고 사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란다.

3.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물리쳤다(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말씀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릴 때, 하나님은 죽은 자의 생전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살린다. 그러면 사람이 부활하면, 생전과 어떻게 달라지는가? 사람이 이 땅에서는,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간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더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육하며 번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부활하면, 다시는 죽지 않는다. 따라서 그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갈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 그 누구라도 온전하지 않기에,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부활하면, 돕는 배필이 필요가 없다. 그 때는 모든 사람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자기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한다. 그렇지만 사람이 부활하면, 끼리끼리의 배타적인 사랑은, 완전히 사라진다. 예수님은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가 된다. 우리 모두 신랑 되는 예수님과 함께 똑같이 온전한 사랑을 나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살 때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는, 그런 것이 다 사라진다. 그런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 부활도 천사도 영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부활할 때, 생전의 모습대로, 다시 살아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부활할 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했다.

사람이 죽어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날 때는, 천사처럼 된다는 말이다. 천사는 영원히 살기에, 그 수가 줄지 않는다. 아울러 천사들의 수는, 늘지도 않다.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는 천사들처럼, 영적인 존재가 되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사도 바울은 (고전15), 부활 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부활의 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몸은, 육의 몸과는 달리, 썩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영원히 영광스럽다. 천지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의 몸과는, 다른 부활의 몸을 줄 수 있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에, 부활을 믿지 않았다.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함을 지적했다. 이들은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만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의 책들 중에,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3: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사람 편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보다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이 모세에게 말씀해야 옳았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노라.”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과거형을 쓰지 않고, 현재형을 사용해서 말씀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살아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몸은 죽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은 몸은,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실제로 며칠 후면,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이 있음을 친히 보여줄 것이다.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죽은 자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오로지 산 자만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경배를 받고 있다 했다. 무슨 뜻인가?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모세의 글에서도 내세가 있음을, 부활이 있음을 밝히 보였다. 진실로 예수님은, 성경의 일점일획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성경에 사용된 시제도, 소중하게 여겼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다시, 사두개인들을 책망했다.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부활도 영도 천사도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무리 앞에서,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20:40) 말씀 같이,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었다.

이로써 사두개인들의 계략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바가 있다. 예수님의 신성이다. 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계략에 빠뜨리지 못했다. 예수님의 무한한 지혜는,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증거다.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애착이다. 예수님은 상황에 합당한, 성경말씀을 정확하게 말하고, 성경말씀을 적절하게 인용했다. 그만큼 예수님은, 성경을 사랑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기 바란다.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확증이다. 예수님이 부활을 말씀했고, 또한 자신이 친히 부활했기에, 우리의 부활도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헌신과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고,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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