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3월 1일 - 바리새인들을 물리친 예수님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3-01 |
첨부파일: 바리새인들을 물리친 예수님.hwp(21K) |
바리새인들을 물리친 예수님(막12:13-17)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신랄하게 공격했다. 성전에 모인 무리에게,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의 비유를 말씀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것을 비유로 말씀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진멸된다.
그들의 권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 당한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키는 말씀인 줄 알았기에, 예수님을 잡고자 했지만, 무리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다른 곳에서, 잡으려고 모의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 말의 올무에, 걸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무리들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면, 예수님을 로마에 넘겨서, 처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를 위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략을 세웠다.
① 바리새인들을 예수님께 보내기로 했다. ② 사두개인들이 나서기로 했다. ③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러나 3번 다, 예수님을 책잡지 못한다. 본문은 그들의 ① 계략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며,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도록 만들려고 했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1. 예수님은 대적자들의 칭찬을 받았다(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앞에서 한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한 줄 알았다.
불의함이 말씀에 찔리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긍휼을 구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계략을 세워서,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 로마 총독에게 넘기려 했다(눅20:20).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략대로 먼저, 바리새인 중에서 몇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냈다.
바리새인은 입은 옷 모양부터 달랐기에(마23:5), 예수님이 모르게 하려고, 제자들을 보냈다(마22:16). 헤롯 당원들과 함께 보냈다. 이 둘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바리새인들은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이고, 헤롯 당원들은, 분봉 왕 헤롯에 속한, 순전히 정치적인 사람들이었다.
헤롯은 이두매 사람이며, 로마의 권력을 힘입어, 유대인의 왕이 되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분봉 왕 헤롯과, 그에게 속한 당원을 아주 싫어했다. 헤롯당은 로마와 연결을 맺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 헤롯 당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원을, 증인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그들은 예수님에게 나와서, 먼저 예수님을 추켜세웠다. 그렇게 해서, 진정 진리를 찾는 자처럼, 행세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질문에, 대답을 안 할 수 없도록 압박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5가지로 듣기 좋게 말을 했다. 까닭 없는 칭찬을, 경계해야 하고, 좋은 말보다, 좋은 행동을 많이 해야 한다.
①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다. 대단히 명예로운 호칭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에게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② “참되다.”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짓되며, 백성들을 미혹한다고 여겼는데도, 예수님이 그들의 질문에, 참되게 대답하도록,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③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나, 분위기에 따라, 자기 의견을 달리 할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④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 예수님은 힘 있는 권세 자나, 힘없는 백성들 앞이나, 상관이 없이, 자기소신을 분명히 밝히는 분이다.
⑤ 예수님은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고 했다. 세상 사람의 도나, 로마의 도를 가르치는 분이 아니니, 그들이 묻는 질문에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달라는 뜻이다. 이처럼 5가지로 예수님을 추켜세웠다. 그들의 말은 모두 다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책잡으려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올무에 걸리게 하여, 총독의 권세 아래로, 넘기려고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듣기에 좋은 말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 이와 같이 질문을 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그들은 이 질문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이면, 예수님을 적폐로 몰아,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로마는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빼앗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그들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무리를 선동해서,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다고, 선동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길 것이다. 예수님은 진퇴양난에 빠진 것 같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아니했다.
2. 예수님은 대적자들이 칭찬한 이유를 알았다(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시험하는 자들은, 다시 예수님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진리를 찾기에, 몹시 갈급한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질문에, 빨리 대답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나, 1년에 한 데나리온의 인두세를, 가이사에게 바쳐야 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이나, 군인의 하루치 삯이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인두세를 바칠 때는 반드시, 데나리온으로 바치도록 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동전인데, 한 면에는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한 면에는, 면류관 쓴 가이사가, 보좌에 앉아 있고, 가이사는 신의 아들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데나리온은, 단순하게 동전을 넘어서, 종교적 의미를 가졌다. 그들은 데나리온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2계명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우상숭배로 여겼다. AD 6년,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인두세를 거두기 위해, 호적하라고 명했다(행5:37).
그 때 갈릴리의 유다가, 백성들을 선동해서,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로마는, 그 반란을 즉시 진압했다. 그로부터 육십 년이 지난, 주후 66년, 유대인들은 또다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며, 대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주후 70년,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 때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모두 무너졌다.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천여 개가 넘는 마을들이 폐허로 변했다. 수십 만, 아니 수백 만 유대인들이, 살육 당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렇듯 로마는 반란에 대해서는, 아주 엄하게 다스렸다.
아무튼 당시 유대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율법에 어긋난다고 여겨, 예수님이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기 원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면, 예수님이 무리를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킨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로마총독 빌라도의 다스림과, 권세에 넘겨, 예수님이 처형을 당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알았다. “외식”(휘포크리시스)는 “연극과 관련된 용어다. 연기를 통해 ”겉모습, 숨김, 악함, 간계“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알고 있기에, 그들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한 것임을 알았다. “시험하다.”는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전에 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모두 외식이었음을 알았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음도 알았다. 어떻게 그 사실을 다 알았나?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모두 것을 다 알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모든 것을 다 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속에 있는 것도, 다 안다(요2:25).
따라서 그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왜 예수님에게 왔으며, 무슨 계략을 가지고 있는지, 낱낱이 모두 다 알았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도 다 알았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외식함을 알았고,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도 알았다.
예수님 앞에는, 오직 진실만이 통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예수님에게 보이라고 말씀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들의 몸에 데나리온을,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데나리온을 우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들은 데나리온 하나를 찾아서, 예수님에게 가져왔다.
헤롯 당원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로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로마 동전인 데나리온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데나리온을 보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데나리온의 한 면에는, 가이사의 얼굴이 있었고, 또 다른 한 면에는, 가이사가 신의 아들이라는 글이 있었다. 따라서 데나리온에 있는 형상도, 가이사의 것이고, 글도 가이사의 것이었다. 그들은 대답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들은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게 되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면 헤롯 당원들은 신속하게, 분봉 왕인 헤롯과,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일러바칠 것이다. 그러면 그 즉시, 예수님은 반란죄로 잡혀, 총독에게 넘겨질 것이다.
결국은 처형당할 것이다. 로마는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대적하는 자들이 짜놓은 각본이었다. 이렇듯 예수님은, 대적하는 자들의 시험을 받았다. 그들의 외식을 환히 알았다.
3.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을 물리쳤는가(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는 말씀이었다. 바리새인은 세금을 내는 것을, 자신이 소유한 것을 “주는” 것으로 여겼다. 즉 자신의 소유권을, 빼앗기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세상의 임금과,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고, 세속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주권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금을 내는 것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납세는 당연한 의무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에, 모든 유대인들이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롬13:1) 말씀 같이, 위에 있는 권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 교회와 국가는 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다.
가이사의 권세도 하나님이 정했다. 따라서 로마 황제 가이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베푼 일반은총이다. 하나님은 가이사의 권세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었다. 예컨대 도로와 수로와 다리와 항만을 만들게 했다. 또한 치안을 유지하게 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가이사에게 빚을 졌다. 따라서 (롬13:7) 말씀과 같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았다. 만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며, 반란을 일으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것의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바치라고 말씀한다. 국가는 하나님이 베푼, 일반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바리새인들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지 않으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데나리온은 가이사의 형상과 가이사의 글이다. 따라서 세금은 가이사의 것이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경배는,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글이다.
하나님의 것인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연 공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렇듯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할 세금을, 문제 삼아, 예수님을 시험했다. 정녕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본문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한다.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눅20:26)을 보면, 그들은 침묵했다, 예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은 것이다.
(마22:22)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들의 계략이 실패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한다. 국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일반 은총이다. 따라서 세금을 내는 것을 비롯하여, 우리가 국가에 대하여, 해야 할 의무는 다해야 한다.
아울러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국가가 우상이 되면 안 된다. 만일 국가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국가의 뜻보다는, 국가를 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글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국가에 대해, 최선의 협조를 다해야 한다. 국가가 어려움에 처하면, 교회도 어려움을 당한다. 국가는 교회의 동반자요, 보호의 울타리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가, 국가에 대해, 맹목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국가의 양심으로서, 또 등대로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운 자에게, 순종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며, 다만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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