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2월 23일 - 대적자들의 완악함을 비유로 말씀함(막12:1-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2-23 |
첨부파일: 대적자들의 완악함을 비유로 말씀함.hwp(21K) |
대적자들의 완악함을 비유로 말씀함(막12:1-12)
지난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다. 그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그들은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 산헤드린, 곧 공회에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적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한의 침례에 대해, 물어보았다. 예수님의 깊고도, 풍성한 지혜 앞에, 그들의 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해서, 박해를 물리쳤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을 비유를 말씀했다. 그 비유 안에서 예수님은,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는데, 죽임당하고,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심판받게 될 것임을 말씀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이 죽고 다시 살아날 것임을 비유로 말씀한다.
1.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비유를 말씀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다. 당시 평지에는 주로 곡물을 심었고, 산지에는 주로 포도원을 만들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들짐승이나 도둑들이, 포도원을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찔레나 가시나무로 산울타리로 둘렀다.
포도원 주인은, 즙을 짜는 틀도 만들었다. 포도를 수확하면, 포도를 계속 보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즙을 짜서 가죽부대나 항아리에 넣어서, 보관해야 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즙을 짜는 틀도 만들고, 망대를 만들었다. 망대가 하는 역할은, 주로 3가지다.
① 망을 보며, 침입자를 막는다. ② 농부들이 비나 햇빛을 피하며 ③ 포도원에서 사용되는 기구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마련했고,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다. 소출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나름대로 계약을 맺었다.
그 후에 포도원 주인은, 타국에 가서 오래있었다.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때가 이르렀다. “소출”(열매)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지만 반드시 열매를 요구할 때가 온다.
(레19:23-25)을 보면, 과목을 심은 후에, 삼 년 동안은, 할례 받지 못한 열매로 여겨서, 먹지 않았다.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하나님께 드렸다. 다섯째 해에야, 그 열매를 비로소 먹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열매를 맺어, 베푸는 은혜다.
그러니까 포도원을 만든 후에, 다섯째 해가 되었을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에게, 자기 종 한 사람을 보냈다. 포도원 소출 가운데, 자기에게 주도록 정해진 몫을, 받기 위해서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농부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3-5)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종은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을 대신해서 왔다.
따라서 농부들은 주인에게, 주어야 할 몫을, 그 종에게 주어야 했다. 그런데도 농부들은, 그 계약을 어기고 그 종을 거저 보냈다. 3단계로 악행을 저질렀다. 모든 죄는 자라는, 특성이 있다.
① “심히 때리고” 심각한 육체적 상해를 가했음을 나타낸다.
②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능욕”(아티마조)은, 존경하지 않았다. 가치 없게 만들었다..
③ “그를 죽이고, …더러는 죽인지라.” 죄는 이렇게 자라나는, 아주 무서운 특성이 있다. 마귀가 행하는 죄악도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데, 결국 죽이는 행동이다.
포도원 주인이, 다른 종을 보내자, 농부들은 그 종을 때렸다.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 처음의 종보다 더, 심하게 다뤘다. 포도원 주인이 더 이상, 다른 종을 그들에게, 보내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포도원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내자, 이번에는 농부들이, 아예 그를 죽여 버렸다.
다시는 종을 보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농부들이 행동은, 너무나도 악해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포도원주인은 계속 참고, 많은 종들을 보냈다. 결과는 매일반이었다. 농부들이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이제 포도원 주인에게는, 더 이상 보낼 종이 없었다. 이미 다 보냈기 때문이다.
(6-8) “이제 한 사람(헤이스)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에게는, 사랑하는 아들 한 사람이 남았다. 그는 포도원 주인의 독자였다. 포도원 주인은 최후로 사랑하는 독자를 농부들에게 보냈다. 종은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종들에게는 이런 심한 짓을, 할 수 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아들을 보내니, 아들만큼은 존대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포도원주인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보며 “이제는 포도원 주인이, 죽은 모양이구나. 그러니까 그의 아들이 왔지. 저 아들을 죽이면, 이 포도원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그 몸을 땅에 묻지도 않고, 포도원 밖에 내던졌다. 짐승들의 밥으로 준 것이다. 포도원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농부들은 그의 아들을 존대하기는커녕, 더 심하게 멸시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무엇을 말씀했는가?
포도원주인은 하나님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한다(사5:7).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다. 예수님 당시로 말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맡기며, 이스라엘을 잘 돌보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그의 종들, 곧 선지자들을 보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의 열매를 요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이며, 돌로 치는 악행을 저질렀다(마23:37). 최후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이 보낸 마지막 행동이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존대하기는커녕,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자기들이 이스라엘 위에, 온전히 군림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 당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끝까지 참으며, 십자가를 졌다.
2.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심판 받게 된다(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죽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르지만, 죽지 않고, 엄연히 살아있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했다. 포도원 주인은 오래 참았다. 포도원주인은 와서, 악한 농부들을 심판해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했다. 은혜를 잊은 그들을 심판한다는 내용이다. ①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② 자기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지만, 올바로 응답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배척하고, 하나님의 마지막 보루인,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 은혜를 빼앗기고, 망하게 된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망하게 된다.
이처럼 전능한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자들을, 심판할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삼판을 받고, 권위도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가, 그 사람의 장래 운명을 결정한다.
사람은 자기 미래의 운명을 모르기에, 점쟁이를 찾아가서 물어보지만, 역시 그들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만 질뿐이다. 하지만 사람의 장래 운명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자세를 보면 된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고, 그 뜻대로 행하면, 축복이요, 영생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며, 제멋대로 살면,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다. 하나님이 인간 구원과 심판을 위해 세운, 절대기준을 무시했을 때, 어떻게 될까? 주후70년,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진멸되고 말았다.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졌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마을들이 폐허로 변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계 각처로 흩어졌다.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도 재건되지 못했다. 하나님은 로마를 들어,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진멸했다.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더 이상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지도할 권위는, 예수님의 사도들에게 넘어갔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몸 버려 피 흘려, 우리를 구원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귀신을 내쫓고, 모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었다.
진리의 성령님을 보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했다. (행2:42)을 보면, 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더 이상,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장로들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사도들이 영적 지도자가 되었기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했다. 그들의 권위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풀무 불에 던져 넣어,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한다. (고전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엡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도 이전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바란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으며 그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3.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할 것을 말씀했다(10-11).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여기에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예수님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버렸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머릿돌은 건물을 지을 때, 가장 먼저 놓은, 초석을 말한다.
바로 그 머릿돌로부터 시작해서, 가로로 세로로, 또는 높이로 계속해서, 건물이 지어져 간다. 여기서, 모퉁이의 머릿돌은 무엇을 말하나? (행4:10-11) 말씀과 같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가리킨다. 반면에 모퉁이의 머릿돌은, 다시 살아난 예수님, 부활한 예수님을 말한다.
며칠 후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지, 삼일 만에 부활했다. (행4:1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분은 하나님이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됐다. 그러니 우리 눈에는 놀라울 뿐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자신이 죽임 당할 것을 말씀했다. 자신을 죽인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했다. 또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이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했다.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대적한,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들의 조상이, 선지자들을 죽이며, 돌로 쳤음을 알았다. 또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꾀하고 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을 버린, 건축자들이 바로, 그들을 가리킴도 알았다.
그렇다면 이 때 그들이,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반응은 회개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그들은 사함을 얻었을 것이다. 아울러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돌이키지 않았다. 자기 의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 증오하면서, 잡고자 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그 자리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사람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두고 갔다.
물론 다음절을 보면, 그들은 그 날, 또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하여,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들은 영원히,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진멸될 것이다. 그들의 권위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더 나아가 영원한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충성된 성도는, 책망을 들을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한다.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어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자.
십자가 위에서 몸을 버려, 피 흘려준 예수님을, 우리도 몸을 바쳐,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며, 충성하자. 사망의 권세를 이긴 예수님이, 역사하며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살아 역사하는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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