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2월 16일 - 권위에 대답한 예수님(막11:27-3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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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대답한 예수님(막11:27-33)
본문에는 “권위”(엑수시아)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말에서, 2번 나타나며, 예수님의 말씀에도, 2번 나온다. 우리도 권위를 흔히 말한다. 가정에는 부모님의 권위, 학교에는 선생님의 권위, 직장에는 상사의 권위를 말한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권위 아래 놓여 있다.
권위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을 말한다. 예수님의 권위는 우리와는 다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권력과 세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마28:18). 더러운 귀신을 쫓으며, 모든 병들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는 “권능”(권세와 능력)도 있다(마10:1).
권세나 권위, 권능은, 헬라어로 다 똑같은 단어다(엑수시아). “권능, 할 수 있는 힘”은 “뒤나미스”는 “뒤나마이”(할 수 있다.)에서 왔다. “통치력, 선택의 자유”(엑수시아)는 “엑세스티”(가능하다, 합법적이다.) 엑스(으로부터) + “우시아”(에이미의 분사, 소유물, 재산, 존재하는 것, 본질) = 본질로부터 나오다.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 있는 자와 같았다(1:22). 서기관들처럼 남의 권위를 빌려와서, 가르치지 않았다.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인, 자신의 권위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면, 가르쳤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2:10).
또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권세, 우리를 구원하는 권위도 있다(요1:12). 반면에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권한도 있다(요5:27). 아울러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고(요10:18),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도 있다(요17:2).
이렇듯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이기에, 모든 면에서 절대적이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음이 문제였다. 그들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니까 어찌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1.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고난주간 첫째 날에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둘째 날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을 심판했다. 셋째 날에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왜 예루살렘에서 나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오곤 했는가? 유월절이 되면,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성 안에서 거처를 마련할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밤에는 성 밖으로 나갔다가, 낮이면 다시 성안으로 들어왔다. 예수님도 날이 저물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로 갔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밤이 되면,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서 유숙했다. 그리고 낮이 되면,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은 이번에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으로 들어가서 거닐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쳤다고 말씀한다.
성전을 깨끗하게 한 후에, 가르쳤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예수님이 활동하는 곳으로 만들어 드리자. 예수님이 깨끗하게 만든 성전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은 성전에서 거닐면서, 그들을 가르쳤다.
(행1:3)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쳤을 것이다. 또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20:1)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관심은 오로지, 그들의 영적인 문제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바랐다. 그 전날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된,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이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베푼 자비와 긍휼로,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였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우리말 성경은 산헤드린을 “공회”라고 번역했다.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곧 공회는 의원 수가, 70명이다.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 사람들이었다. 반면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에 속하지 않고, 공회 의원이 된 사람들을 가리켜, 장로들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의결 기관이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내린 곳이었다. 이제 산헤드린이 보낸, 공회 의원들이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왔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왔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예수님을, 당장에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이므로, 그들은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눅19:48). 그래서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예수님에게 2가지 질문을 던졌다. ①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 성전을 관할하는 권위가, 자기들에게 있다는 말이다. 형식주의에 물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 그리고 성전에서, 그들의 허락 없이, 백성들을 가르치자, 그들은 예수님에게,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했다. 즉 예수님에게는 그런 일을 할 권위가, 없다는 뜻이다.
② “누가 이런 일을 할 권위를 주었느냐?” 성전을 관할하는 것은, 우리의 권위에 있고, 우리들 중에서 아무도, 너에게 이런 일 할 권위를, 준 적이 없다. 그러니 너는 지금,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종교에 물들면, 진리에 대해 대적하는 자가 되기 쉽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기대하는 대답이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권위로, 이런 일을 하노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셨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언제나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며,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되었다.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의도였다.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받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권위는 절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대적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예수님을 박해했다.
그러니 우리들도, 우리의 권위에 도전하며,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예수님에게도, 대적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에게도 박해가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자. 그럴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생각하기 바란다.
2. 권위에 대해 되묻는 예수님(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도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와 같이 대답하기를 바랐다.
“나는 하나님의 권위로, 이런 일을 하노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셨노라.”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그들에게 물었다.
이때의 요한은, 침례 요한을 말한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했던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침례를 받았기에, 그를 침례 요한이라고 부른다. 그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어서,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요한의 침례라 함은, 예수님을 증언한, 침례 요한의 사역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질문은 간단했다.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하늘로부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질문은 이란 의도였다.
“요한이 나에 대해, 증언한 사역이, 신적이냐 아니면 인적이냐?”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이 말씀했다. 그들은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요한의 침례를, 받지 않았다(눅7:30). “요한의 침례는, 사람으로부터다.” 이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31-32)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그들은 서로 의논했다. 이때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다.
동작이 완료되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 동안 깊이 의논했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만일 그들이 대답하기를,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라고 말하면, 침례 요한이, 그렇게 증언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에,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들을 돌로 칠 것이다(눅20:6). 물론 그들은, 요한의 침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백성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고, 저렇게 대답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 되었다. 위선자들은 깊은 갈등 속에서 산다. 신앙의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질문을 던짐으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며, 대적하는 자들의 박해를 이겼다. 예수님의 지혜와 지식은, 깊고도 풍성하다.
사람의 계교는 예수님의 지혜 앞에서는, 아무도 쓸데없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박해를 받고 있는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약1:5). 그리하면 성령님이, 우리에서 역사해서, 할 말씀을 주고(마10:19-20), 모든 박해를 이기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다. 예수님이 박해를 이겼기에, 우리도 박해를 이겨낼 수 있다. 그러므로 박해를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진실만을 담대하게 말하자. 권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세상의 철학과 권세인가?
3. 예수님의 대답(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다.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냐? 이러한 질문이, 그들에게 제기되었으면, 그들은 당연히,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사람들이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임을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요한의 침례가, 사람으로부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백성들이 자기들을 돌로 칠까봐, 두려워했다. 결국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논한 결과, 그들이 내린 결론은 고작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였다.
그러니까 그들은, 살아남으려고 비겁하게, 발버둥을 쳤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진리를 찾는 일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진리를 깨달으려 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의 마음은, 길 가와 같았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좋은 땅이었다면, 만일 그들에게, 들을 귀가 준비되었다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비극적인 말씀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할 말씀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에, 그들은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진실을 일러주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며, 어찌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겠는가?(마7:6)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예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다. “이제 너희는 끝났다. 앞으로 너희를 기다리는 것은 심판뿐이다.” 이런 뜻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그들이 당할 일은, 심판과 멸망뿐이었다.
본문 뒤를 있는, (막12장)을 보면, 실제로 예수님이, 그들을 심판하는 말씀이 나온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 그들을 총체적으로 심판했다. 이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을 개별적으로 심판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과거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만, 여기지 말자. 예수님은 살아있기에, 오늘도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말씀하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처럼, 마음을 닫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안 된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너에게 할 말이 없다.”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심판과 멸망만, 기다릴 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늘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하면 살아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며, 우리의 삶에 역사할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한 말씀이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사람들 때문에, 환난을 당할 때가 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예수님도, 박해를 받았다.
하물며 왜 우리에게, 우리의 권위에 도전하여, 우리를 박해하며,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없겠는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받기 마련이다(딤후3:12). 그럴지라도 겁내지 말고, 담대 하자.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고, 박해를 이겼기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며, 박해를 이길 것이다. 사람들이 힘들게 할 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다 맡긴다. 대적자들을 심판한 예수님이, 모든 것을 갚아줄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로,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의 평안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기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가진 권위는 절대적이다. 자기를 믿는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구원한다. 그러나 자기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다 정죄하며 심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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