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1월 25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님(막11:12-1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1-26 |
첨부파일: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님.hwp(22K) |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님(막11:12-14)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했다. 예컨대 예수님은, 각종 병을 고쳤다.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았다. 죽은 자들을 살렸다. 풍랑을 잔잔하게 했다. 또한 적은 양의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 이외에도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은, 너무도 많다.
따라서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했는가? (요21:25)을 보면, 이 세상에라도, 그 기록된 책들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했다. (마가복음)도 예수님의 이적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막1:34)처럼, 간단하게 일괄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경우와, 예수님의 부활을 빼면,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이적들이, 모두 열여덟 번 등장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 그 결과 (막11:21) 말씀을 보면, 그 무화과나무가 말랐다.
예수님의 이적들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며, 아울러 유일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이적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때만 이적을 행했다. 예컨대 예수님이 병을 고친 것은, 그 병자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적을 원한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라.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은 것도, 귀신 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린 것도, 죽은 자의 가족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수님이, 적은 양의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것도, 그 때 배고파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이적을 행한 동기는, 예수님의 풍성한 긍휼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경우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서, 그 나무를 말라버리게 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파멸을 가져온 이적을 행한 이유가 있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일부러,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서, 의도적으로 파괴적인 이적을 행한 것이다. 본문 끝 부분을 보면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말씀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축복하는 말씀뿐만 아니라, 저주하는 말씀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1. 예수님은 시장함을 느꼈다(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때는 “이튿날”이었다. 고난 주간의 둘째 날이다. 그 전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 삼 년 전인 공생애 초기에도,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그 곳에서 예수님은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보았다. 그 때 예수님은 의분을 발하면서, 사정없이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로부터 삼 년이 흘렀다.
예루살렘 성전의 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때가 이미 저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나와서, 베다니로 나갔다. (요11:18) 말씀과 같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 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베다니에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유숙했다. 그 이튿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나왔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 예수님은 시장했다고 말씀한다. (마21:18) 말씀과 같이,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날 아침 식사를 걸렀을 것이다. (막1:35) 말씀과 같이, 그 날도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 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의분을 발하며, 다시 한 번 성전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로 준비했을 것이다.
나사로의 집에는 들리지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으로 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사로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잘 대접해드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할 동안, 시장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아주 가깝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힘든 길이다. 잠시 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이는 육체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시장함을 느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자(사람의 아들)로 왔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부고 열매를 구했다(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님은 멀리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다보면, 벳바게라는 동네가 있었다. “벳”(집)이며, “바게”(무화과)다. 그러니까 벳바게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이다. 무화과나무가 그 곳에는 많았다. 그 무화과나무는 길 가에 있었다(마21:19).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에게, 파괴적인 이적을 행함으로,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줄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주인 없이 길 가에 서있는, 무화과나무를 택했다. 때는 유월절을 앞둔, 이른 봄인 3월말 내지는, 4월초였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해발 780m의 고지대다.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고,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했는데, 열매를 요구하고, 없다고 저주했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분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버트란트 러셀”은, 탁월한 철학자인지는 몰라도, 성경과 식물에 대해서는, 대단히 무지했다. (無花果)나무는 “꽃이 없는 열매”다. 열매 안에, 꽃이 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의 본격적인 추수기는, 6-7월이고, 이때 많은 열매를 낸다. 그러나 3-4월에도, 열매를 맺고, 이때의 열매를 “파게”라고 한다.
3-4월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무화과를 “테에나”라고 한다. 우리말도, 영어(fig)도, 구분이 되어있지 않기에 오해하게 된다. 그리고 9-10월에도, 무화과나무 열매를 얼마든지 따먹을 수 있다. 무화과나무의 특징은, 먼저 잎사귀를 낸다. 잎사귀가 나면,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이미 열매를 가진다.
따라서 잎이 있는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기대할 수 있기에, 그 열매를 기대함은, 대단히 상식적이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으니, 정상이 아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창조주의 기대대로, 열매를 맺어 주지 못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열매들은 익어야 먹을 수 있지만, 무화과나무 열매는 익지 않아도, 불쾌한 맛이 없다. 그래서 정말 배가 고프면, 익지 않은 무화과를, 몇 개정도 따먹을 수 있다. 만일 무화과의 때라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미 다 따먹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화과를 다 따먹었기에, 그 나무에 열매가 없던 것이 아니었다. 그 무화과나무는 처음부터 열매를 맺지 못했다. 땅만 허비하는 병든 나무였다. 이와 똑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찾는다. 예수님께 드릴 열매가 있는가? 잎사귀만 있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우리 모습은 아닌가?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경건의 능력이 없는 우리의 삶은 아닌가? 무화과나무가 그 잎사귀만을 뽐낼 수는 없다. 무화과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경건의 모양만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에 실제로,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야만 한다. 아니면 그 결과는 비극이다.
3.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았다(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이는 (마21:19) 말씀같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뜻이었다. (막11:21) 말씀과 같이, 이 때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 그 결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이때 예수님은, 유일하게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이적을 행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는가? 예수님의 시장기가 채워지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짜증을 내셨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적인 목적으로는, 이적을 행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서, 예루살렘의 영적 상태를, 예언자적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 때 예수님의 발걸음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곧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숙청하면서, 거짓으로 가득 찬, 유대교를 심판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번 이적을 통해, 자신이 할 일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성전은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따라서 겉으로는,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었다. 그들은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잎사귀만 무성했지, 아무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정없이,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 없는 제사를, 싫어한다고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잎사귀만 있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 곧이어 예수님은 외식으로 가득 찬, 성전을 숙청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의 의미는 하나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임할 임박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이주었던 것이다. (요1:11)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다. 그러나 자기 백성 곧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따라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또한 외식과 형식으로만 가득한 성전처럼,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도,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회개의 열매를 찾지 못해서, 그들도 예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사십 년이 지났다. 예수님이 심판한대로, 이스라엘은 멸망의 날을 맞이했다. 주후 칠십 년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무너졌다. 이와 같이 열매 없는 나무는 심판을 받는다.
성경은 반복해서, 이 사실을 강조한다.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이는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말씀이다. 예수님도 직접 말씀했다.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요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거해 버리시고.” 비유로 말씀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삼 년이나 그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자,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그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니, 찍어버리라고 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이와 같이 대답했다. (눅13:8-9)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포도원지기의 간청으로, 삼 년이나 열매를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심판은, 다소 늦추어졌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가 또다시, 그 해에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이 그 무화과나무는 찍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그러했다.
삼 년 동안 예수님은,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다. 또 그들을 위해서, 많은 이적들을 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기는커녕, 도리어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다. 물론 (눅13장)의 무화과나무처럼,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 심판의 유예기간이 주어졌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처럼, 결국 그들은 심판을 받고 말았다. 행여 우리도 그 동안 무위도식하면서, 땅만 허비하는 나무는 아니었는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힘을 당한다. 지난 날 우리의 부실했던 농사와, 결실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고, 이제부터는 힘써 아름다운 열매를 맺자.
예수님은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본문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한다.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만일 그 때,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다면, 과연 어떠한 생각을 했겠는가? “나는 잎사귀만 있는, 나무가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들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는 것은, 잎사귀가 아니라,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까? ① 성령의 열매다.
(갈5:22-2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사랑도 희락도 화평도 충만하다. 예수님은 오래 참고, 자비하며, 선하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도, 예수님의 모습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님 닮기 원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면, 자연히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의 향기를 발함으로,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아울러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② 복음의 열매다(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내 뒤를 돌아볼 때, 얼마나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는가?
예수님은 열매를 찾았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열매를 찾고 계시니, 잎사귀만 있는 무화과나무처럼, 우리 직분만 과시하려 들지 말고, 직분에 걸맞게 열심히 봉사하자. 예배를 드릴 때도, 예배의 모양만 갖추지 말고,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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