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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0년 1월 19일 -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막11:1-11)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20-01-19
  첨부파일: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hwp(21K)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11:1-11)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시작되지만, 3가지 방식으로 피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자,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3:6-7).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알리지 못하게 해서, 저항을 일으키지 않았다(1:44, 3:12, 5:43, 8:30).

예수님은 이적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 대적과 불필요한 마찰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밝히 드러냈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적들은 예수님을 죽이되, 명절인 유월절은 피하려고 했다(14:1-2).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기에, 유월절에 죽임당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도록 내버려두어서, 대적들의 증오심을 자극시켜, 하나님이 정한 때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다.

1. 예루살렘에 가까이 온 예수님(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제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다.

예수님의 곁에는, 열두 제자들을 비롯해서, 허다한 무리가 함께 했다. 예루살렘 동쪽, 가까운 곳에는 감람산이 있다. 감람산 너머에,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2개의 작은 마을이 있다. “벳바게” = “”() + “파게”(무화과) = “무화과의 집”, “베다니” = “” + “아니”(가난한, 비참한) = “가난한 자의 집이다.

여리고에서 올라가면, 먼저 베다니가 나온다. 따라서 벳바게를 지나여, 예루살렘에 도달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먼저 베다니에 이르렀다. 여기서 제자들 중에, 둘을 보냈다. (2-3)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베다니에 계셨기에, 두 제자를 벳바게로 보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맞은편 마을로 가면,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이다. 그 나귀 새끼는, 매여 있을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아직까지 아무도, 그 나귀새끼를, 타 보지 않았다 했다. 예수님은 현재의 상황만 아니라, 과거의 상황도 다 알고 있다. 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도 다 알았다. 낯선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임의로 풀어서 끌고 오면, 좋지 못하게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 왜 이렇게 하느냐?”, 물을 수 있는데, 그러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면서, 그들에게 대답할 말을, 미리 가르쳐주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을 낱낱이 다 알았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에,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다 환히 알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도, 다 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으며, 우리가 어떤 문제에 매여 있는지, 모두 다 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므로, 모든 문제에서 풀어주고, 귀하게 쓸 것이다.

(4-6)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맞은편 마을로 갔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곳에는 나귀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다. 예수님이 지시한 대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이 그들에게 물었다. 나귀 새끼의 주인들이 물었다(19:33).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을 하려느냐?” 모두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였다.

그래서 두 제자는, 예수님이 가르쳐준 대로, (19:34)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더 이상의 질문도, 더 이상의 대답도, 필요 없었다. 나귀 새끼의 임자들은 두 제자가, 자기들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분명히 나귀새끼의 임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벳바게나 베다니나, 둘 다 작은 시골 동네로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러니 서로의 일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4:3)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을 깨끗하게 했다.

또한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 그를 살려주었다. 그러니 베다니의 바로 맞은편 마을, 벳바게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그들의 나귀새끼를, 예수님이 쓰시겠다고 말했다.

나귀새끼의 주인들은, 그 일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겨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의 나귀 새끼를, 기꺼이 내놓았던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 말씀에 감격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나귀 새끼를 내놓았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 앞에, 어떤 이는, 자기 다락방을 내드렸다.

어떤 이는, 자기의 새 무덤을 내드렸다. 또한 어떤 이는, 자기의 옥합을 깨뜨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내어드리겠는가? “주가 쓰시겠다.”는 결단 앞에, “나의 가장 귀한 ○○, 하나님께 드린다.”는 신앙적인 고백과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2.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님(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두 제자는 나귀 새끼를, 예수님에게 끌고 왔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기에, 그 위에 안장이, 얹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두 제자는, 예수님이 타기에 편하도록,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탔다. 먼 길을, 그것도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걸어와서, 피곤을 느끼셨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21:4, 12:15)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선지자 스가랴는, 예수님보다 오백 년 앞선 사람이었다. 그는 (9:9)에서 왕인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갈 것과, 그 때 사람들이, 그를 열렬하게 맞이할 것을 말씀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처럼, 멋있는 백마를 타지 않았다. 검을 차지도 않았고, 군대를 이끌지 않았다. 지금 예수님은 로마와 싸우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2:1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찔림을 받으며,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그래서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탔다. 그러나 (19:11)과 같이, 예수님이 다시 올 때는, 백마를 타고 올 것이다.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유월절을 맞이하여,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12:9) 말씀과 같이,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계신 베다니로 모여들었다.

예수님도 보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나사로도 보려 함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이는 오래 된 관습으로,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다(왕하9:13). 왕을 맞이하는 백성들의 모습이다. “나를 밟고 지나가소서. 나는 왕에게 복종하겠나이다.”하며,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그런데 이 때 큰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만이 아니었다. (12:12-13) 말씀과 같이, 이미 예루살렘에 당도한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왔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는 말이 생겼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풀 구원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폈다. (7:9-10) 말씀 같이, 종려나무 가지는, 구원의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9-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앞서 가는 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반면 뒤에서 따르는 자들은,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다 같이 하나 되어, 소리질렀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는 (118:25-26)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호시아 나”(제발 구원하소서.)라는 말이다. , 구원을 간구하는 말씀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찬송하면서,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불렀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 일종의 메시아의 칭호다.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고서, 예수님을 찬송했던 것이다.

(14)을 보면,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했다. 그 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서, 황급히 그들의 행위를 말렸다. 사람은 결코 경배를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을 전혀 금하지 아니했다. 그들의 찬송을, 그대로 받았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기에, 자기들의 조상 다윗의 나라를, 영광스럽게 회복시켜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들의 외침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가장 높은 곳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이니, 예수님께 호산나하면서, 자기들을 구원해달라고 외쳤다. 본문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믿었다. 옳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찬송했다. 이것도 옳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원해 줄로 믿었다. 이 또한 옳았다. 그런데 불과 며칠도 안 되어, 다르게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니이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왜 그들은 갑작스럽게, 백팔십도 달라졌는가?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자, 예수님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때는 유월절이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그들을 로마에서 구원해서, 다윗의 나라를 회복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왔다. 유월절 양이 되어, 자기 목숨을 그들의 대속물로 주고자 했다. 결국 그들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말았다. 영혼의 구원이 먼저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선이다.

3.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드디어 예수님은, 최종 목적지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21:10) 말씀과 같이, 그 때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했다.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던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길로 로마를 무찌르고, 그들의 조상 다윗의 나라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잠잠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 (2)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 안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거기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보고, 의분을 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로부터 삼년 뒤에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아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곳의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15) 말씀을 보면, 그 다음날 예수님은 또다시, 성전을 깨끗하게 했다. 그러나 본문 말씀과 같이, 그 날은 때가 이미 저물었다. 아마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도, 그 날의 장사를 끝내고, 나가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다음날로 미뤘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로 갔다. 그 곳에서 그 날 밤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을 환호하던 사람들은, 이미 다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그들은 성난 군중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들의 소리는 더 이상 호산나 찬송하리로다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무찌르고, 자기들을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격한 대상은, 로마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성전인, 기복신앙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바는, 산산조각 났다. (18) 말씀처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증오도, 극도에 달했다. 이는 예수님이, 이미 말씀한 대로(10:33), 급기야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끌고 갔다. 그리고 무리를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다.

기복신앙은, 복을 받기 위하여, 믿는 것을 가리킨다. 기복신앙은 매우 위험하다. 내 기대에 어긋나면, 쉽게 믿음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행여 우리도 기복신앙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는가? 참 믿음을 가지기 바란다. 참 믿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

참 믿음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예수님을 존귀하게 만든다. 참 믿음은, 육체의 욕심을 거부하고,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함에 순종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참 믿음의 본을 보였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참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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