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1월 12일 -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구원한 예수님(막10:46-5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1-12 |
첨부파일: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구원한 예수님.hwp(21K) |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구원한 예수님(막10:46-52)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바라자, 제자들에게 영광의 길을 가르쳤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4-45).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화를 내자, 섬김을 가르쳤다. 본문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섬김을 보였다. 예수님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고치고, 섬기고 구원함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주고, 구원했다. 바디매오가 구원받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았다. 믿음이 없어도,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지만, 믿음이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 이로써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은 기뻐한다. 믿음을 보여드리자.
1.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여리고에 이르자,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함께 예수님을 따랐다. 주의 사명을 이루려면, 이 땅에서 안식할 틈이 없다. 유월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의 사역으로,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나갈 때였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를 만난다. 그 당시에는, 아람어를 사용했다.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와 많은 장애자들도 고쳤다. 고침 받은 사람들 중에, 바디매오가 유일하게 밝혀졌다. 왜 그럴까?
바디매오는 후에 성도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바디매오는 맹인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을 수 있고, 자라나면서 병을 앓든지, 사고를 당해서, 실명했을 수도 있다.
(요9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있었다. 그 맹인을 보며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물었다. 제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그 당시에는 사람이 맹인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결과라고 여겼다. 그러기에 맹인들은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 때의 맹인들은, 구걸을 통해서만 연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디매오를 맹인 거지라고 불렀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려고, 길 가에 앉아 있었다. 유월절을 맞이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길 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외면하지 않았다.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를 불러서, 고치고 구원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어서, 기꺼이 죄인을 섬겼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 동정을 구하는 우리를 부르며, 구원해준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준다.
2. 소리 지르는 바디매오(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18:36) 말씀과 같이, 바디매오는 무리가 지나감을 들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라고 묻자, (눅18: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분명히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와, 수많은 장애자를 고쳤다. (막8장)에서 예수님은, 벳새다의 맹인을 고쳤다.
(요9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맹인도 고쳤다. 따라서 바디매오는, 자기도 고침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 질렀다. 많은 무리 때문에, 작은 소리로 말하면, 예수님이 들을 수 없다고 여겨,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삼하7:12-13) 말씀과 같이, 본시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였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을 세워, 그의 나라와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한, 다윗의 자손은, 솔로몬이 될 수 없다. 솔로몬의 나라와 왕위는, 영원히 견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한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의 칭호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마21:9中)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소리쳤다.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있었다. (마21:15)은 어린이들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질렀다. 이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임을 가르쳤기 때문이다.(마22:41-42)을 보면, 바리새인들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임을 밝혔다.
이와 같이 당시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이 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름으로, 자기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눈이 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눈먼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다. 그는 예수님을 올바로 보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뒤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다. 그는 예수님에게, 긍휼을 구했다. 그가 보여준, 믿음의 태도였다.
(눅18장)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았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다(18:13). 자기가 죄인이니, 긍휼히 여겨달라는 말이다. 이 때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기 바랐다. 이로써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자,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으며, 그에게 잠잠하라고 했다.
“꾸짖다.”(에페티몬) 동사가 미완료형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를 꾸짖은 것이다. 그만큼 바디매오는 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는 뜻이다. 바디매오는 맹인이며 거지였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다.바디매오가, 예수님을 귀찮게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소리 지를 때마다,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잠잠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잠잠했다면, 그는 일생토록, 맹인거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는 기회를 성공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역시 미완료다. 그는 온 힘을 다하여, 계속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임을 믿었다. 긍휼이 풍성한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하게 여겨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 고백적인 외침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다.
나의 이기심이, 이웃의 신앙에, 장애를 주지 않아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꺾으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방해한다. 마귀는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그래도 맹인 바디매오가 보여준 것 같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시50:15) 말씀처럼, 환난 날에 예수님을 부르자. 예수님이 우리를 건질 것이다. (시81:10) 말씀 같이, 우리 입을 크게 열자. 예수님이 채우실 것이다. (렘33:3) 말씀과 같이, 예수님에게 부르짖자. 그리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응답할 것이다. 신앙의 절박함이 없으면, 잠자고 있는 신앙이다. 절박함을 갖자.
3. 머물러 선 예수님(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바디매오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은 가던 길에서, 머물러 섰다.
여기서 “머물러 서다.”는, 분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그 곳에 계속 머물러 섰다는 뜻이다. (막10:32)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기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 예수님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를 부르라”고 말씀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급히 바디매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서, 바디매오를 부르며, 이같이 말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기도의 조력자도 있다.
많은 사람이 바디매오를 멸시하며 꾸짖었다. 그러나 그들은 따뜻한 말로, 그를 격려했다. 우리도 남을 무시하지 말고, 늘 위로하는 말로 세워주기 바란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님이 부를 때,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렸다.
낮에는 의복으로, 밤에는 침구로, 사용되는 겉옷이었다. 또 무릎이나 길바닥에 펴놓고, 동냥을 하는데 필요한 겉옷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렸다. 바디매오는 앉은자리에서 즉시 뛰어 일어났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를 때,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것과 같았다. 이제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나아왔다. 아마 그를 데리러 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뛰듯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이, 죄인인 자기를 불러주었다는 사실에, 너무도 감격했다.
그 날 예수님 곁에는, 허다한 무리가 있었다. 저마다 소원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예수님에게 자기의 믿음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바디매오만, 예수님을 일대 일로 만날 수 있었다.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는 맹인이며 거지였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취급해서, 그를 멸시하며 되도록 멀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가까이 부르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었다.
상점이나 식당에 가면, 종업원이 손님에게, 공손한 자세로 물어본다. “무엇을 원하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이요, 만왕의 왕인 예수님이, 맹인 거지이며, 죄인인 바디매오에게, 섬김의 자세로 물어보았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성도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구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남들의 섬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섬김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은, 바디매오 앞에서, 섬김의 태도를 제자들에게, 보인 것이다. 다정하게 묻는 말씀을 듣고, 바디매오는 큰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했다.
이 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요20:16) 말씀과 같이, 히브리말로 “랍보니”이다. 랍비와는 달리 “랍보니”는, 아람어로 하나님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였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기에, 자기의 눈을 고칠 것을 믿었다. 또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기에, 자기를 불쌍히 여길 것도 믿었다. 야고보와 요한과는 달리, 바디매오가 원하는 바는, 높은 자리에 앉아, 남들의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오직 예수님의 긍휼을 구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예수님에게 말했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믿음에 응답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눈을 고쳐주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고, 그를 구원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이렇듯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병 고침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이제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눈을 고치고, 그를 구원한 증거가 나온다. 먼저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기에, 바디매오의 눈을 창조해서, 즉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
아울러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 본시 그는 길 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자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 때로부터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 이것이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 뒤 어쩌면, 그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백이십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만큼 그가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도 전에는, 영적으로 눈먼 자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그 때 성령님의 감동으로, 우리도 소리 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며, 머물러 섰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며, 우리 믿음을 보고 우리를 구원했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른다. 주저앉아 있지 말고,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서, 예수님에게 달려가자. 신앙의 눈을 뜬 후, 자세가 중요하다.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본받으며, 영원한 천국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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