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1월 5일 - 영광의 길을 가르친 예수님(막10:35-40)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0-01-05 |
첨부파일: 영광의 길을 가르치신 예수님.hwp(21K) |
영광의 길을 가르친 예수님(막10:35-40)
드디어 때가 차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르게 되었다. 예루살렘으로 갈 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그들에게, 자세히 말씀했다. 본문은 그 직후에 된 일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당할 고난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받을 영광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 예수님이 가르친 영광의 길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 것이다. 이 일에 예수님은, 확실한 본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값없이 받는 은혜만을 사모한다. 고난 없이, 자기 십자가를지지 않고, 그저 영광만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친 영광의 길은, 분명히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른다. 물론 이 때의 고난은, 병에 걸리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자기 잘못으로 당하는 고통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통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을 이겨내면, 그 후에는 반드시 영광이 따라온다.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8:18). 현재의 고난, 곧 환난은 잠시 받고, 가볍다. 그러나 장래의 영광은, 지극히 크다. 영원하고 중하다(고후4:17). 우리 모두 예수님이 가르친, 영광의 길을 늘 명심하여, 잠깐의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기를 바란다.
1.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받을 고난들과, 고난 후에 찾아올 영광을 말씀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것이다. 그런 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면, 이방인들은 능욕할 것이다. 침을 뱉고, 채찍질하다가, 죽일 것이다.
그러나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는 고난 후에 찾아올 영광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는 예수님을 높이며, 존경하는 뜻으로 부르는 칭호였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구할 때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도, 구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구하는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도, 그들의 요구가 떳떳하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당할 고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동료들, 다른 제자들을 배려하는 마음도 없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다.
그들의 예수님께 나아와, 다짜고짜 요구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예수님에게 백지수표를 요구했던 셈이다. 그 위에 얼마가 되든지, 자기들이 필요한 액수를 적어 넣으면, 예수님은 그대로 다, 지불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영원하며,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더라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짐짓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그들 스스로, 그들의 잘못된 욕망을, 발설하기를 바랐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그들을 가르치고자 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야고보와 요한은 한껏 고무되었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를 묵살해버리지 않고,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아뢰었다.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 불렀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주로 믿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도 믿고 있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이, 그의 나라를 세우며, 영광 가운데 그의 나라를, 다스릴 것을 믿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 자리를, 요구한 데 있었다. 왕의 우편에는, 왕 다음으로 존귀한 자가, 앉는 법이다. 그 다음 존귀한 자가, 왕의 좌편에 앉도록 되어 있다.
이미 그들 앞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살았다. 크게 쓰임 받은 인물들도 많았다. 앞으로 그들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이 그와 같이 간청한데는, 나름대로의 까닭은 있었을 것이다.
(마19:28)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했다. 자신이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그들도 열두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물론 예수님은 그 곳에서, 험한 일을 많이 당한 후,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분명히, 그 후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세울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약속한대로, 그들은 열두 보좌에, 앉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과연 누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충분히 앉을만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사촌지간이었다.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최측근이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릴 때도, 변화 산에서 영광을 드러낼 때도, 늘 예수님 곁에 있었다.
물론 그 때마다 베드로도 함께 했지만, 베드로는 자주, 예수님에게 꾸중을 들었다. 따라서 얼마든지, 베드로를 따돌릴 수 있다고 여겼다. 만일 베드로가 제외된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좌우편은, 자신들의 차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와서, 자기의 자리를 미리 굳히려고 했던 것이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들이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랐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차라리 끝자리에 앉으라고 명했다.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니 이 때 보아너게가, 예수님에게 구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기에 급급했다.
2. 예수님의 대답(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이, 무지하다 지적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가장 큰 영광을 구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그들은 가장 큰 고난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만 영광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큰 영광을 얻으려면, 마땅히 가장 큰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 이 사실을, 야고보와 요한은 망각했다. 그들은 고난 없이도, 영광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나아와, 가장 큰 영광을 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상은 가장 큰 고난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를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하여, 자신이 마실 잔과, 자신이 받을 침례에 대해서 말씀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을 예로 든 것이다.
②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에 잔이 나온다. (시23:5) 말씀처럼, 때로는 잔이, 하나님의 은총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75:8) 말씀과 같이 때로는 잔이,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어느 편에 해당하겠는가?
(막14:36)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은, 모든 죄인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한 잔이었다.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은, 예수님이 당해야 할, 대속의 죽음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쓴 잔이었으며, 지극히 큰 고난의 잔이었다. 곧이어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침례를 말씀했다.
(눅12:50) 말씀처럼, 이것도 예수님이 당할, 대속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것이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흘릴 피에, 깊숙이 잠길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예로 들며, 그들에게 영광의 길을, 밝히 가르친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시며, 고난의 침례를 받을 것이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가르친 원리는 분명하다. 먼저 고난이며, 그 후에 영광이다. 십자가 먼저 그 후에 부활이다.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이, 큰 영광을 얻으려면, 그만큼 큰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뜻이었다. “이제 나는 고난의 잔을 마시며, 고난의 침례를 받을 것이다. 그런 후에 나는,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너희가 내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앉으려면, 너희도 나처럼 고난의 잔을 마시며, 고난의 침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나, 자신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주여 그리마옵소서.”라고 했다. 야고보와 요한도 자기들이 얻을 영광만을 바랐다. 우리는 어떤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고난을 당하는 만큼, 받게 될 영광은 커진다. 그러나 당하는 고난이 없다면, 받을 영광도 있을 수 없다.
3. 예수님의 결론(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예수님의 질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서슴없이 “할 수 있나이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로 갈 때, 도마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 때 야고보와 요한도,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쉽게 생각했다. 예수님이 마실 잔과, 예수님이 받을 침례는, 대속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코 그들은,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없고, 예수님이 받는 침례를, 받을 수가 없었다. 설령 그들이 생각했던 잔과 침례가, 박해에서 오는 고난이면, 과연 그들이 말한 대로, 그들은 박해에서 오는 고난을 감당했는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사로잡혔을 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얻을 영광만 바라보며,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큰 소리쳤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지기 쉽다.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기 마련이다. (슥13:7)은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이, 넘어질 것을 알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후에 그들에게 있을, 일까지도 다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영원하며,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성급하고, 경솔한 대답을 했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을 나무라지 아니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오히려 그들의 말을 인정해주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뜻으로,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예수님이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지 다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앞으로 그들이 당할 일을,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밝힌 것이다.
(행12:2)을 보면, 헤롯왕이 칼로 야고보를 죽였다. 이로써 사도들 가운데, 야고보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계1:9)을 보면, 요한은 밧모 섬에서,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했다. 그 당시 밧모 섬은, 오늘날의 감옥 같은 곳이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잔을 마셨다.
고난의 침례도 받았다. 물론 그들의 힘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성령님이 임하니까, 고난을 이겨낼 권능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고난을 당했다. 따라서 그들은, 영광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은혜로 되어졌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면류관을 벗어서, 예수님 앞에 바쳤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왜 예수님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는가?
예수님의 친척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최 측근이라고 해서, 또한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예수님에게 조른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사적인 이유 때문에, 아무에게나 임의로 그 자리를 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 될 수가 없다.
예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기에, 반드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상을 준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 우편과 좌편에 앉게 되는가?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20:23)을 보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준비하셨다고 말씀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도록 예비했는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이다. 고난을 당한 만큼, 영광을 얻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영광의 길이다. 지금도 우리는, 그저 값없이 받는 은혜만을, 사모하지는 않는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성숙한 신앙인들은, 주님을 위한 고난도, 은혜로 여긴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날마다 예수님의 고난에 힘써 참여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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