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12월 15일 - 엘리사벳의 찬양(눅1:39-4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12-15 |
첨부파일: 엘리사벳의 찬양.hwp(21K) |
엘리사벳의 찬양(눅1:39-45)
누가복음 (1장, 2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찬양이, 5편 나온다. ① 엘리사벳의 찬양(1:42-45), ② 마리아의 찬양(1:46-55), ③ 사가랴의 찬양(1:68-79), ④ 천사들의 찬양(2:14), ⑤ 시므온의 찬양(2:29-32)다.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성탄과 관련된 찬양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본문은 엘리사벳의 찬양이다. 본문에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자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친척으로,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마리아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 갈릴리 나사렛에 살았다. 엘리사벳은 이스라엘의 남쪽 지방, 유대에 살았다. 엘리사벳은 늙었고(1:36), 임신하지 못했던, 불임여성이었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이 아들을 임신했고, 이미 여섯 달이나 되었다. 반면에 마리아는 젊었다.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했다(1:34). 마리아는 처녀요, 동정녀인데도,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을 배었다. 두 여자는 모두, 아이를 밸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의 태중에, 아들을 배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여, 초자연적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드디어, 두 여자는 함께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서로 나누었다. 그런 가운데 엘리사벳의 찬양이 나온다.
1.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했다(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본문 바로 앞에, 가브리엘 천사가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아들을 잉태하고, 낳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아이는 큰 자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다(1:32).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천사가 하나의 징표를 주었다. 그것은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했다는 징표다. 엘리사벳은 늙었을 뿐 아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이 아들을 배었고,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해,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가려고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갔다.
이스라엘에는 산이 많다. 유대인은 동네를 만들 때, 흔히 산 위에 만든다. 예루살렘도 산 위에 있다. 나사렛도 산 위에 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찾아간 동네도, 유대의 산골에 있었다. 그 산골은 유대의 살골, 예루살렘 근교에 있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km가 훨씬 넘는다.
따라서 그 당시에, 3-4일 정도 걸리는, 먼 여행길이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갔다. 그만큼 마리아는, 그의 친족 엘리사벳을 만나서, 천사가 말한 징표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드디어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사는, 동네에 이르렀다.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우리말 문안은, 웃어른께 안부를 여쭙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문안은, 포옹하다, 환영하다. 그저 인사치레 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문안은, 서로 간에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전제로 하는 단어다.
(출18:7-8)을 보면,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문안했다. 모세는 이드로에게 절하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모세에게 있었던 일을, 소상히 이드로에게 고했다. 이것이 전통적인 문안이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마리아도 엘리사벳에게 문안했을 것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포옹하고,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엘리사벳에게 말했을 것이다. 마리아 말을 듣고 난 후에, 엘리사벳도 자기에게 있었던 일들을, 마리아에게 모두 다 들려주었을 것이다. 아마 엘리사벳은, 임신한 지 여섯 달이나 되어서, 불룩해진 그의 배를, 마리아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 할 수 없었고(20), 귀머거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없었다(62). 사가랴가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가랴를, 일시적이지만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 때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문안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면서, 마리아는 천사의 말이 엘리사벳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천사가 한 말은, 마리아 자신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마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아이가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뛰놀았다(41上).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할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다.
자기도 지금, 똑같은 기적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6개월 정도가 되었기에, 아이가 복중에서 태동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태동은 달랐다.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기 때문이다(44).
아이가 복중에서 뛰는 것은, 단순한 뒤척임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기쁨이 있었다. 지금 엘리사벳의 복중에는, 위대한 선지자가 될 아이, 침례 요한이 자라고 있었다.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 것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침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15). 왜 침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나? 침례 요한에게는, 선지자의 사명이 있었기에, 복중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했다. 이를 위해 침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 침례 요한은,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기에, 마리아 태중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방법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노는 것이었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침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기쁨이 충만하다고 했다. 이는 신랑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신랑의 친구는, 침례 요한 자신을 가리킨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모태로부터 충만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음으로, 복중에서부터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으로 뛰놀았다. 성도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 행해져야 마땅하다. 그래야 그 교제가, 하나님이 보기에, 올바른 것이고, 신앙도 성장한다.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우리 안에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늘 충만하기를 바란다.
특히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항상 심령에, 예수님으로 인해 생기는, 충만한 기쁨으로 뛰놀기를 바란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교제는, 모든 성도들의 교제의 지침이 된다. 성도가 은혜 받은 일이 있으면, 신속히 가서 확인하고, 축복해 주어야 한다.
(41下)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님은 그 사람을 온전히 주관한다. 성경을 살펴보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 있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찬양했다. 죄악 된 세상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성령의 감동에 따라, 하나님에게 받은 예언을 했다.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예언했다(67).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그 결과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받은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이제 엘리사벳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을 통해서, 마리아는 또다시 천사의 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큰 소리로 불렀다(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큰 소리로 불러”(아나포네오)는 “아나”(위로) + “포네오”(부르짖다) = 위로 향하여 불렀다는 말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엘리사벳은, 목소리를 높여서 크게 외쳤다. 그의 마음이 그만큼,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전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엘리사벳의 외침은 하나의 찬양이다. 축복송이다. 그의 찬양에 나오는 축복의 대상은, 모두 넷이다.
① 마리아 ② 마리아의 태중의 아이 ③ 엘리사벳 자신 ④ 하나님 말씀을 믿는 사람이다. ① 마리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찬양했다. “여자(들)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히브리어로 최상급 표현이다. 그러니까 모든 여자들 중에서, 마리아가 가장 복이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최상급을 말한다.
히브리문화에서, 여자들의 복은, 그의 자녀들을 보고, 판가름한다. (눅11:27)에서, 한 여자가 마리아를 가리켜서 했던 말과 같이, 그녀가 가장 위대한 아이를 배었고, 또 가장 위대한 아이에게, 젖을 먹였기 때문이다.
지금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그의 태중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고 있었음을 알았기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마리아가 여자들 중에서, 가장 복이 있는 여자라고, 큰 소리로 찬양했다. 침례 요한도, 주 앞에서 큰 자였다(15).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크게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밴 마리아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침례 요한은 피조물인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엘리사벳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보다도 훨씬 크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이 세상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크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여자라고 찬양했다.
②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도, 복이 있음을 선포했다.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기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다,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또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리게 될 것이다. 마리아가 여자 중에서, 복이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그만큼 복이 있기 때문이다. 엘리사벳의 말을 들으면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다시 확인했다.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은, 서로를 축복해주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내 주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자기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다. 이는 분명 엘리사벳에게, 지극히 큰 영광이며, 축복된 일이었다.
③ 엘리사벳은 이번에는, 그 자신이 받은 축복을 찬양하고 있다. 이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가리켜 “내 주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은, 마리아 태중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주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그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뜻이다.
(눅1,2장)에 “주”라는 단어가 30회 이상 사용되었다. 다 하나님을 뜻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동하여,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임을 밝혔다. 물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나의 주”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내 하나님의 어머니, 어머니 하나님”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분명히 마리아를 가리켜,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불렀을 뿐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것이, 결코 아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며, 무한한 하나님을 낳을 수 없다. 성경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마리아는 하나님인 예수님을, 낳았을 뿐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인성을 낳았을 뿐, 예수님의 신성을 낳은 것은 아니기에, 마리아를 “나의 주”로 부르거나,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귀한 일에 쓰임 받았을 뿐, 우리와 똑같은 죄인으로, 역시 구원 받아야만 했다. 마리아를 신성화하면, 명백한 우상숭배의 죄다.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침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침례 요한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으며, 자기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
이 때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따라서 엘리사벳은, 그의 복중에 아이가 태동했음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아이가 기쁨으로 뜀을, 분별할 수 있었다. 자녀를 잉태한 어머니는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④ 축복의 대상이 등장한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물론 여기서 말한 “그 여자”는, 일차적으로 마리아다. 사가랴는 믿지 못해서, 한 동안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믿었기에, 그에게는 복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엘리사벳은, 44절 말씀과는 달리, 2인칭을 사용해서 “믿은 너에게”라고 말하지 않았다. “믿은 그 여자에게”라고 하면서, 3인칭을 사용했다. 이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믿은 그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마리아는 하나님 말씀을 믿어서, 복을 받았다.
성령의 충만한 이들은, 서로를 축복해주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린다.
그리고 우리가 믿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준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이전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인데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했다.
말씀의 성취를 경험한 성도가, 이웃 성도에게 확신을 심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확실히 믿고, 또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엘리사벳 처럼 늘 예수님으로 인한, 믿음의 찬양을, 큰 소리로 기쁘게 부르면서,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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