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12월 8일 - 당할 일을 가르친 예수님(막10:32-3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12-08 |
첨부파일: 당할 일을 가르친 예수님.hwp(23K) |
당할 일을 가르친 예수님(막10:32-34)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 죽음과 부활을, 이미 2번에 걸쳐, 가르쳤다. 본문은 세 번째 가르침이다. 며칠 후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르게 된다.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이 사실을 다시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미리 알았다. 많이 당할 것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고, 일이 잘못 꼬여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정한 뜻과, 미리 아신 대로다(행2:23).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었다(요6:38-39). 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한 일들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 모든 험한 일들을 당했으니, 깨닫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바란다.
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님은 종종,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제는 때가, 이른 줄을 알았다. 그래서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다.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마지못해서, 무리에게 떠밀려서, 간 것이 아니다.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을, 분명히 알았고,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도, 다 알고 있었다.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이 때 열두 제자들은 놀랐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여, 죽이려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적진 속으로 들어가려는지, 이해되지 않아서 놀랐다.
이 때,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했다. 이들은 열둘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유월절을 맞아,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자신들이 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놀라는 것도 알고,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다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따로 불렀다. 그들은 장차,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자들이기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말씀했다.
이로써 세 번째로 그들에게,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쳤지만, (눅18:34)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가르친 것을, 하나도 깨닫지를 못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나?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눅9:45)에 기록된 바와 같이, 첫 번 가르침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로 깨닫지 못하도록, 숨긴 바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였다. 예수님이 사로잡힐 때, 그들은 두려워하며,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그들이 그 즉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을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은혜를 베풀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뒤에, 주님의 가르침을 분명히 깨달았다. 말씀대로 모두 이루어졌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이 당할 일을 미리 알았는가? ① 성경에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 ② 예수님은 모두 다 아는, 하나님이다.
(눅18: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은 성경을 말한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한 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성경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도, 예수님에게 모두 다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당할 일들을, 성경에 다 기록했다. 물론 성경은, 전체적으로도 그리스도의 대속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의 대속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창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지었다. 하나님은 짐승을 죽여,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이 필요함을 보여주었다. (창4장)에는 하나님께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았지만, 아벨은 짐승을 죽여서, 제물로 삼았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았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희생제물이 있어야함을 보여준다. (창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할 숫양을 준비해놓았다. 하나님이 친히 희생제물을, 준비해 보여주었다.
(출1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애굽의 모든 초태생이 죽임당할 때, 하나님의 사자는 그 피를 보면, 그냥 넘어갔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면, 흠 없는 희생제물이 필요함을 보여준 것이다.
(출24장)을 보면,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율법에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의 불은, 꺼지면 안 되었다. 희생제물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함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한번 정리해보자.
아담과 하와를 통해 보듯이, 죄를 가리는 것은 희생 제물이었다. 아벨을 통해 보듯이, 희생 제물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듯이, 희생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할 것이다. (출12장)의 유월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희생제물은 아무 흠이 없는 양이, 피를 흘러야 했다.
또한 율법을 통해 보듯이, 희생제물은 끊임없이, 드려져야 했다. 이런 기록들, 곧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성경의 기록들은, 예수님에게 다 응하여졌다. (요1:29) 말씀 같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희생제물로서,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희생 제물이었다. 또한 (고전5:7) 말씀처럼,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서, 흠이 없는 희생 제물이었다. (히7:27) 말씀처럼, 단번에 자기를 완벽한 희생 제물로 드렸다. 그 결과 더 이상 율법이 명하는 것처럼, 계속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로써 구약의 제사는, 완전히 끝맺음을 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언제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상에서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대속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펴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세부적인 것들까지 예수님에게 다 응하여졌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말씀하겠다. (슥9:9)은 예수님이 시온,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말씀했다.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갈 것을 말씀했다.
(시2:2)은 관원들이 서로 꾀하며, 예수님을 대적한다. (시41:9)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에 의해서, 배반당할 것이다. (슥11:12)은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릴 것이다. (슥13:7)은,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린다. (사53:7)은 예수님이 심문하는 자들 앞에서, 잠잠할 것이다.
(민21:9)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시69:21)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쓸개 탄 포도주를 맛볼 것이다. (시22:18)은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눈다. (시22:1)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친다.
(시22:15)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한다. (시22:31)의 기록처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한다. (출12:46)은, 예수님은 유월절 양인데, 그 뼈가 꺾이지 말아야 했기에, (시34:20)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을 것을 말씀했다.
그 대신 (슥12:10)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찔릴 것을 말씀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한 것이다. (사53:9)은, 부자의 무덤에 묻힐 것이다. (시16:10)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 곧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했다. (시110:1)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갈 것, 곧 예수님의 승천을 말씀했다.
이처럼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개괄적으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세부사항까지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고, 성경을 따라 자신이 당할 일을, 그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일점일획을, 소홀히 여기지 아니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도 경외심을 품고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며, 성경을 한 단어 한 단어를,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모든 것이 다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2. 모든 것을 다 아는 예수님이다(33-34).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너무도 생생하게 말씀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것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까지도, 그렇게나 자세하게 미리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여준, 이상을 받은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알았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에, 모든 것을 다 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요2:2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다 안다. 어떻게 예수님이, 사람들의 속에 있는 생각까지도 다 아는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요4장)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과거에 그 여자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그의 남편이 아님을 다 알고 있었다.
(마17장)에는,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은 어느 시점에 또한 어느 장소에서 잡힌 물고기의 입에는, 동전 한 세겔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미리 그리고 정확하게 다 알고 있었다.
(막11장)을 보면,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어디에 매여 있는지를 알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가 보낸 두 제자들과, 그 나귀 새끼의 임자들 사이에, 서로 오갈 대화까지도 정확하게 미리 다 알았다.
(막14장)에는, 예수님이 두 제자를, 예루살렘 성내로 보내면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이 성내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임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앞으로 될 일을, 정확하게 다 알았다.
사람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망라해서 모든 것을 정확하게 다 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험한 일들을, 빠짐없이 다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자들의 앞장을 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희생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자신을 단번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흠 없는 희생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연한 자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8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했다. 처음 일곱 가지는, 예수님이 받을 고난이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고난 후에 찾아 올 영광이었다. 차례대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①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킬 때, 인자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했다. 그래서 인자라는 칭호가, 신약성경에만 팔십 번 이상 사용되었다. (단7:13) 말씀처럼, 이는 본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바르 에노쉬)였다. 에스겔서의 인자(벤 아담)이 아니다.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을 팔는지 몰랐다. 그러나 (요6:7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마귀인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다.
②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눅23:4) 말씀처럼, 빌라도조차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거짓 죄를 뒤집어 씌어서, 자신을 죽이기로 결의할 것을 다 알고 계셨다.
③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을 주지 않았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로마의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을 다 알고 있었다.
④ “그들은 능욕하며”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힐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을 엮어 씌울 것이다. 예수님의 손에는, 갈대를 들릴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방인들로부터 당할, 온갖 능욕과 희롱을 다 알고 계셨다.
⑤ “침 뱉으며” 사람에게 침을 뱉는 것은, 그 사람을 경멸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가장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인들이 자신에게 침을 뱉으며, 자신을 심하게 업신여길 것도, 다 알고 있었다.
⑥ “채찍질하고” 군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할 것이다.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치도록 되어있다. 살갗이 터지며, 피를 뿜어낼 것이다. 채찍질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채찍에 맞을 것을 다 알고 있었다.
⑦ “죽일 것이나” 같은 내용을 담은 (마20:19)을 보면,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그러니까 예수님은 군인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이상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받을 고난들이었다.
물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만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 후에 찾아올, 영광이 있었다. 예수님은 고난도 영광도, 세세하게 다 알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⑧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정확하게, 고난을 받았다. 또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정확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정확하게, 삼 일 만에 살아나셨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가르쳤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로잡힐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예수님은 말씀한 대로 죽었고, 말씀한 대로, 삼 일 만에 살아났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밝히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까, 달라졌다. 자기들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 이 사실을 성령님을 통하여, 분명히 깨닫는다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고난을 당했으니, 우리도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고난당해도, 기쁨으로 받으며,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
이전글 : 2019년 12월 1일 - 은혜를 가르친 예수님(막10:23-31) | |
다음글 : 2019년 12월 15일 - 엘리사벳의 찬양(눅1:39-45)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