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12월 1일 - 은혜를 가르친 예수님(막10:23-31)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12-01 |
첨부파일: 은혜를 가르친 예수님.hwp(21K) |
은혜를 가르친 예수님(막10:23-31)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과, 부자 청년 관리를 들어서, 반복해서 분명히 밝혔다. 어린 아이들은, 아무런 공로가 없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반면 부자 청년 관리는, 많은 공로를 쌓았다.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모두 다 지켰다. 관리로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예수님을 떠나서, 자기 길을 갔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2:9).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오늘 본문은, 그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본문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부자 청년 관리에 대한 일을, 설명해준 내용이다. 본문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1. 구원은 사람에게서 나지 않는다(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부자 청년 관리가 떠나자,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에게도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면 어떡하나?이런 걱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이는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신28장) 말씀과 같이, 재물은 하나님이 주는 복으로 여겼다. 재물이 많음은, 그만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셈이다. 더군다나 재물이 있는 자는, 살찌고 값진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또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으로, 많은 공적을 쌓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주 쉬울 것이라고 여겨졌는데,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심히 어렵다고 말씀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랐다.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어렵다면, 재물이 없는 자는,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놀란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님은 부자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어렵다는 말씀이다. 종종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했다. (눅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이다. 구원받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낙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짐승이다. 반면 바늘귀는, 사람이 흔히 접하는 구멍 가운데서 가장 작다. 낙타는 결코, 바늘귀로 나갈 수 없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간다는 말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뜻한다.
낙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늘귀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부자가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말할 필요가 없다. 가난한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사람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이 사람에게서, 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 관리는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모두 지켰다.
그의 입으로 고백했듯이, 그는 영생을 얻지 못했다. 이렇듯 사람이, 자기 행위로는, 자기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주의, 사람이 자력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2.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제자들은 매우 놀랐다. 부자는 물질의 복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다.
부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값진 제물을, 바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쉬울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제자들이,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자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가난한 자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가난한 자는, 제대로 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구제할 여력도 없다. 그래서 매우 놀라, 다음과 같이 서로 말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영생을 얻는다.” 이들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똑같은 뜻이다. 우리가 구원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 제자들이, 말하는 요지는 “부자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 아닌가?”이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아직 그들이, 유대교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를 못했다.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았다.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원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악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할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악하기에,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자기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자기 행위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사람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진다.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다. 사람으로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수 없다. 그러나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찬가지로 사람으로는, 구원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다 구원할 수 있다.
(요1:11-13)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다.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이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님에게 올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야만,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올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야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부자 청년 관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까,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에게,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구했다. 결국 영생을 얻지 못했다.
그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가 되었다. 구원은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으로서는, 모두 다 할 수 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늘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던 세리와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 것이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는가? 이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기 바란다.
3.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다(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부자 청년 관리와, 자신들을 대조했다. 부자 청년 관리는, 재물을 버리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자기의 길로 되돌아갔다. 제자들은 다 자신들의 집과, 가족을 떠났다. 자신들의 고향과 회당도 떠났다. 자신들의 직업에서도 떠났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물론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곧 가룟 유다는 예외였다.
그는 돈을 사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재물을 따르고 있었다. 겉으로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했을 뿐이다. 물론 베드로가,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진솔하게 예수님에게 여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2가지 표현으로, 이 사실을 강조했다. ① “진실로” ②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한 사람의 예외도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들이 얻게 될 것을, 현세와 내세의 두 시기로, 나누어서 대답했다.
먼저 현세에서, 그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버린 것의, 백배나 받게 될 것이다. 그만큼 풍성하게 받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린 것의 백배나 받는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이 말씀했나? 한 마디로, 예수님이 세운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뜻이다. 오순절을 기해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은, 삼천이나 되었다. 그 수는 계속해서 불어났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 그러니 육신의 가족보다, 훨씬 더 많은, 믿음의 가족을 새롭게 얻은 것이다. 또 그들은, 밭과 집을 팔아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그 결과 (행4:34上)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가난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 가운데는 박해를 받아, 집에서 쫓겨난 사람도 생겼다.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더 많은 가족을 얻었으며, 서로의 보살핌 속에,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내세에 얻을 것에 대해 말씀했다.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모두가 내세에 영생을 받게 될 것이다. 부자 청년 관리는, 재물을 버리지 못했다. 사실 그가 가지고 있다고, 자기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잠시 맡긴 것이니, 언젠가는 남김없이, 다 반납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재물을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영생을 얻지 못했다. 반면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현세에도, 백배나 받았다. 물론 많은 박해를 겸해서 받았다. 그러나 내세에서 영생을 받았다. 그들은 일시적인 땅의 재물을 버리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보화를, 얻게 된 셈이다.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결론 말씀이다. 참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은혜의 본질을, 분명히 드러냈다. 제자들은 계속 서로 다투었다. “누가 크냐?” “누가 첫째냐?”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우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구원이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실히 밝혔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한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무슨 뜻인가? 교만하지 말라는 뜻이다.
유대교처럼 자기 공로를 내세우면서, 나중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내세우면, 먼저 될 자가 된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을 구해야 한다.
그러니 먼저 믿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많이 힘썼다고 스스로 자랑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신앙의 성숙함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은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성장하지 못하면, 뒤처지게 된다. 주님을 위해 버릴 줄 아는 자가, 복된 모습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버리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복을 심고 거두고는 씨앗이다. 파종하는 수고가 없으면, 열매를 얻지 못하게 됨을 안다. 영적인 자만함은, 가장 경계해야 할, 마귀의 덫이다. 자만심을 버리고, 끝까지 따르라는 말씀이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는 일종의 경고다.
우리 중에는, 먼저 된 것을, 자랑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먼저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음은, 귀한 일이요, 복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자랑하는 이들은, 자칫하면 자만에 빠지기 쉽다. 제자들에게 이러한 성향이 다분히 있음을 알았기에, 미리 경계했다.
먼저 출발했다고, 결승점에도 먼저,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시작은 잘했으면서도, 중도에 달음질을 포기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후발 주자들보다 훨씬 늦게, 결승점에 도달하게 되기도 한다.
먼저 은혜를 받았어도,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여, 결승점에 아예 도착도 하지 못하거나, 늦게 도착하는 이들이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만은 금물이다. 특히 남보다 열심이 있고, 또 눈에 띄게 역사가 나타나는 때일수록, 더욱 자기를 낮추고 조심하자. 주님만 자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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