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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11월 24일 - 영생에 대해 가르친 예수님(막10:17-22)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11-24
  첨부파일:   영생에 대해 가르친 예수님.hwp(22K)

영생에 대해 가르친 예수님(10:17-22)

 

본문에 재물이 많은, 사람이 나온다. 인간적으로 그는,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알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도, 모두 지켰다고 자부했다. 영생을 사모했다. 구원 받는 일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영생을 얻는 일에, 영순위 사람일 것만 같다.

그러나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왔다가, 영생을 얻지 못한 채, 되돌아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구원이 우리의 의나, 공로에, 기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고(2:5), 하나님의 선물이다(2:8). 이 사실은 (18),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바리새인은 교만하여, 자기 의와 공로를 내세우고, 자랑하다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께, 의와 공로를 내세울 수 없어, 죄인이라 고백했다. 하나님에게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주는 선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은 재물이 많은 사람을 들어서, 이러한 사실을 밝혔다. 왜 재물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는가? 영생을 얻지 못했나? 그는 자신이 쌓아 가는 의와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부자 청년 관리의 질문(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갈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왔다.

그는 재물이 많았다(22). 큰 부자(18:23), 청년이었다(19:22). 관리였다(18:18). (9:18) 보면, 회당장 야이로를 관리라고 불렀으니, 그 청년은 회당장일 수 있다. 젊은이가 회당장이라면, 그만큼 영향력이 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는 뜻이다. 부자, 청년, 관리였다. 훌륭한 점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에게 달려왔다. 본래 유대인들은, 뛰는 법이 없다. 뛰다가 하체를 드러내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에게 달려왔다. 그에게는 열정과 간절함이 있었다. 뜨거움과 절실함이 있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열정과 간절함이, 구원은 아니다.

예수님 앞에 꿇어앉았다. 부자며, 관리이기에, 얼마든지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을 생각해서 처신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었다.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하나님 앞에 꿇어앉아도,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멸시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폈고,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모독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존경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만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그는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다. 관리, 회당장일 수 있는데도, 아직도 영생을 얻지 못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예수님 앞에서 솔직했다. 예수님을 어려움에 빠뜨리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렇듯 여기 등장하는, 부자 청년 관리는, 여러 면에서 훌륭했다.

부자 청년 관리는,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누렸지만, 그의 마음은 허전했다. 그 이유는, 아직 영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생이 무엇인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영생을 얻지 못한 자는, 영원히 살면서, 부끄러움을 당해야 한다. 따라서 영생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에 관한 문제다.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 물었고, 그가 떠난 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23)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도다.” 그러자 제자들은 (26)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서로 말했다.

따라서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표현만 다를 뿐, 똑같은 뜻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된다. 영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엉뚱한 곳에 가서, 영생을 얻으려고 하기에, 영생을 얻지 못한다.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잘한 일이다. (요일5:20)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참된 자,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이단의 무서움은 예수님 안에서, 나오게 만든다.

예수님만 영생을 줄 수 있다. 부자 청년 관리는, 제대로 예수님을 찾아와,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달려와서, 겸손하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면서, 예수님에게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유대교는 율법주의다.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유대교에 젖어있는, 부자 청년 관리로서,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16:30)을 보면, 빌립보의 간수도,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에게, 똑같이 질문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바울과 실라는, 이와 같이 대답했다.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따라서 우리도, 이렇게 대답하기 바란다.

2. 예수님의 대답이다(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부자 청년 관리를 깨우치려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는 물론, 예수님을 존경하는 뜻으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하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한다고 했다. 또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대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불신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악한 자로 보는 자는, 별로 없다. 대게 선하고 인자한 분으로 인식한다.

(19:16)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그는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사람이 되고, 그로 인해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에게만 선하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에게도 똑같이 선하다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는 선하다라는 단어를, 너무도 쉽게 함부로 사용했다. 구원의 첫걸음은, 자기가 악한 존재임을, 깨닫는 데 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죄를 회개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 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런데 부자 청년 관리는, 자기가 죄인이라, 깨닫지 못했다. 자기 자신은 선한 일을 하기에, 선하다고 여겼기에, 예수님은, 그를 나무랐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사람은 아무도, 선하지 않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했다.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은 모두 악한 존재이며, 죄인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선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다. “선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고 막연히 그 단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선하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사용함을 꾸짖었다.

이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 후에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가, 스스로가 자신은,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성경을 말씀했다.

예수님이 말씀한 계명들은, 십계명의 두 돌판 가운데서,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것들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룬다.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은, 이웃과 관계를 다룬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은 선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율법이 명하는 모든 계명들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로 율법의 참 뜻이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가, 계명들을 지키지 못했음을, 스스로 깨닫기 바랐지만, 부자 청년 관리는, 자기가 율법이 명하는 계명들을 잘 지키기에, 선하다고 착각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잘못된 생각부터, 철저하게 사라져야만 했기에, 부자 청년 관리에게, 몇 가지 계명을 예로 들어서 말씀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 스스로가, 자기는 죄인이며, 자기는 선하지 않고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율법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기에, 예수님은 그를 가르치려고, 극단적인 조처를 취했다. 극약을 처방한 것이다.

3. 예수님의 가르침(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 관리는,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에 기록된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다.

자기를 과시하려고, 가식적으로 거짓되게,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나름대로는, 솔직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나? 그는 율법의 참된 뜻을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율법을 대했다. 그는 율법이 명하는 계명들을, 피상적으로는 지켰기에, 자기가 선하다고, 착각했다.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예수님이 주었다.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참된 뜻을 말씀했다.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늘 깨끗한 마음으로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부자 청년 관리가, 율법의 참 뜻을 깨달았다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계명을 다 어겼다.”, 고백할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도 율법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다. 그 때 바울은 본문의 부자 청년 관리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바울이 율법의 참 뜻을 깨달았다. (7:7) 말씀처럼,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되었다. 부자 청년 관리도, 이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는 계명들을 지키지 못했기에, 죽어야 했다. 율법의 역할이 범죄한 자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깨닫지 못하자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자 청년 관리는, 율법의 참 뜻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계명을 어겼으면서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는 죄인이면서도,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부자 청년 관리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그를 사랑했다고 말씀한다.

(19:41)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울었다. 멸망이 가까웠는데도,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왜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했나?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가, 이웃과 관련된 계명들만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들도, 어기고 있음을 깨닫기 바랐다. 십계명의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4개의 계명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 관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의 신은 재물이었다. 재물이 그의 우상이었다.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불렀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외식일 뿐이다. 아브라함의 우상은, 그의 독자 이삭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했다. 부자 청년 관리의 우상은 재물이라, 그에게 있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예수님은 말씀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했나?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인가? 그가 바라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한 가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했다. 그러면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을 것이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 청년 관리에게, 부족한 것 한 가지는 무엇이었나?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그의 신이며, 그의 우상인 재물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다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한 하늘에서의 보화는 무엇을 가리키겠는가? 바로 부자 청년 관리가, 얻기를 바라던 영생이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으면, 하늘에 있는 모든 보화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지금까지 부자 청년 관리는, 재물을 따르고 있었다. 그에게 재물은, 그가 믿는 신이요, 그가 섬기는 우상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유를 다 팔라고 했다. 그리고 그 판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했다. 재물이라는 신과 우상을, 완전히 제거하라는 뜻이다.

그런 후에는, 더 이상 재물을 따르지 말고, 영생인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다.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갔다. 그는 영생인 예수님이 아니라, 정함이 없는 재물을 택했다.

그는 현세 때문에 미래를, 잠깐 때문에, 영원을 잃고 말았다. 땅의 것에 집착해서, 위의 것을 놓치고 말았다. (13)에 나오는 비유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극히 값진 진주와 같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어야만 한다. 세리장 삭개오는 그렇게 했다. 바울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부자 청년 관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넓은 길,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우리에게 있는 우상을 다 제거하자.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서, 좁은 길을 걸어가자. 그리해서 우리 모두 영생에 이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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