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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11월 17일 - 구원에 대하여 가르친 예수님(막10:13-16)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11-17
  첨부파일:   구원에 대하여 가르친 예수님.hwp(21K)

구원에 대하여 가르친 예수님(10:13-16)

 

오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원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른 말로 천국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에 대해 가르쳤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 의를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 당시에는 율법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토라에 있어서나,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수 없다는 견해였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총이며,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임을 말씀했다.

본문 바로 뒤에, 부자 청년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20) “이것은(이러한 계명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예수님을 떠나는 삶이 되어(22),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를 못한다(23).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자기 의를 내세움으로, 결코 구원을 받지 못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자.

1. 어린 아이들을 물리친 제자들(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프로세페론).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미완료형이다.

즉 사람들이 계속해서,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어린 아이들은(파이디아, 파이디온), 맞을 수 있는, 반쯤 자란 아이들을 말한다. 이 때 (18:15)어린 아기”(브렢호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뜻은 원래 (아직 나지 않은 태아), 또는 젖먹이, 갓난아기를 가리킨다.

아무튼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목적은 예수님이, 그 어린 아이들을 만져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만지다.”(합토마이), “소속하다, 관계되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연결되기를 원했다. (19:13) 말씀 같이, 예수님이 그들 위에 안수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예수님에게 나왔다. 젖먹이는 산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어린 아이들은, 어떠한 힘이 없으며, 그의 생명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달려있다. 부모님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들은, 아직까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좌우를 분변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부모의 품에 안겨서, 예수님에게 왔을 뿐이다. 그 때 제자들이 꾸짖었다. 물론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 아이들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제자들의 꾸짖음을 이해할 수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고 온, 어른들이었다.

일전에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하고 다퉜다. 그 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가운데 세우고, 안고서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했다.

예수님이 말씀했지만,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물리쳤다. 왜 그랬나?

그 당시 유대 사회에는, 큰 위인이나, 훌륭한 선생님에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서, 축복받는 풍습이 있었다. 자기 자녀들이, 그 사람들과 같이, 위대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풍습대로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와, 만져 주심, 즉 안수해 주기를 바랐다. 이 어린 아이들이, 매우 어렸다. 예수님이 한 손으로, 안을 수 있을 만한 유아들이었다. 그만큼 어린 아이들이니까, 하찮게 여겼다. 예수님을 귀찮게 만들고, 방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축복해 주는 일 말고도,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하여, 그들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은, 당시 어린아이와 여자는,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도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매우 경시되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유대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율법주의였다. 유대교는 율법이 명한 계명들을 모두 다 지켜야만,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부모님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아이들은, 선악도, 좌우도 전혀 분별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의를, 행할 수 있는가?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린 아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물론 제자들은 유대교를 떠나서, 예수님을 따랐기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닌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어린 아이들이 구원 받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사람들이 불필요한 짓을 한다고 꾸짖었지만, 사실은 제자들이 틀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기를 원했다.

2. 구원에 대해 가르친 예수님(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제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보고, 노했다. 몹시 괴로워했다는 말이다.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아직도 제자들이, 유대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18:16) 말씀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했다.

제자들이 꾸짖는 바람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몹시 괴로워하며 말씀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2가지를 명령했다.

용납하라”(앞헤테, 앞히에미, 용서하라, 그냥 놔둬라, 과거 명령),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명령이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지금 용납하지 않고, 금했다. 지금 그냥 놔두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앞에 겸손히 나오는 자의 것이다.

금하지 말라.”(메 콜뤼에테, 콜뤼오, 방해하다, 억제하다, 현재 명령), 계속, 반복되는 명령이다. 내게 오는 것을, 계속적으로, 금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 나가지 못하게 만든 그것이, 예수님을 노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9:14)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은 같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들의 것이라 말씀하지 않고,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했다. 어린 아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자는,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어린 아이는 타인 의존적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소유한 자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천국의 주인이다. 권세를 가지고 말씀한다. “받들다.”(덱세타이, 데코마이, 가정법 과거, 디포넌트(혼동태) “받아들이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린 아이 같이, 예수님의 부름을, 스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디포동사는, 수동의 모습이지만, 능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대방이 주면 받지만, 받는 자의 자세가, 스스로 취하는 능동적인 태도다. 그러면 무엇이 주어졌고, 어떤 조건이 있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결코 어떤 조건이, 만족되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아무 조건 없이 주었을 때, 어린 아이와 같이, 스스로 취하라는 의미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를 줄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이만희가 아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받을 때,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결단코못하리라.”(우 메), 2개의 부정어가 함께 쓰여서 전혀않는다, 확실히 아니다.”의 뜻이다.

이처럼 2중 부정어를 사용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어린 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만, 그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힘으로 들어가려는 자가 있다.

(18)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웠다. 자기는 토색도 불의도, 간음도 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도하면서 자기의 공로를 자랑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또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분명하게 밝힌 대로, 그 바리새인은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다. 그 바리새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처럼 인간의 의나,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반면에 세리는 기도하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다.

그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밝힌 대로, 그 세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다.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천국은 오로지 은혜로 주어졌다.

그 세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천국을, 그대로 받았을 뿐이었다. 어린 아이도,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도, 사정이 똑같다. 그들에게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 그들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천국의 백성으로 합당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사람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유대교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했다.

3. 예수님께 나온, 어린 아이들을 축복한 예수님(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사람들이 바라던 것보다, 예수님은 더 많은 것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해주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고, 축복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을, 그의 행동으로 뒷받침했다. “축복하다”(율로게이, 율로게오, 좋은 말을 해주었다, 미완료형)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베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음껏, 뜨겁게 축복했다. 아이들을 칭찬한 것이기도 하다.

칭찬은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느끼게 해 준다. 동시에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도록 만든다.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좋은 마음을 느끼도록 도와줌이, 아이들이 올바로 행동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다.

칭찬은 아이들이, 건강한 자화상을 가지고, 자랄 수 있게 해준다. 건전한 자화상을 가지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좋은 성품의 사람들이 되고, 건전하고 올바른 행동하게 된다. 아이들이 잘 하고, 바르게 하는 것을 찾아내어, 칭찬해 주면, 자신이 잘 했을 때, 기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 세대의 자라나는, 어린 세대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해야 한다. 부모님이여 자녀들을 위해 축복기도 하라. 예수님이 그렇게 했고,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했다.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축복기도 함이 중요하기에, 이삭은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했다. 야곱은 죽을 때, 요셉의 각 아들들에게 축복했다.

우리 인생에, 믿음의 사람다운 일들이, 너무도 많지만 그 어떤 위대한 일 보다도, 믿음으로 자녀들을 축복한 것만을 히브리서는 기록했다. 부모로서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 축복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자녀를 위해 해야 할, 가장 큰 일도, 축복기도 해주는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배워야 했는가? 유대교의 율법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고 행하면서, 자기 의를 쌓아,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했다.

어린 아이는, 부모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모든 것을 맡긴다. 또 어린 아이는, 부모님이 행하는 대로 따르며, 부모님이 주는 대로, 다 받아들인다. 어릴수록 좋다. 어린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 하나님이 누구야? 하나님이 어디 계셔? 나는 하나님을 볼 수 없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

결단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린 아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해보라. “예수님은 언제나, 너와 함께 하면서, 너를 지극히 사랑한다.”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나아올 때,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으로, 또 천진난만한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야 한다. 예수님의 대속을 의심하거나, 거부하지 말자. 어린 아이처럼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러면 예수님이 흘린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들어서,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어린 아이가 구원 받는 것은, 그 어린 아이에게,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언제나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자.

우리도 자녀들과, 이웃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은 기쁨으로, 우리 모두를 품에 안고, 손을 대며, 풍성한 복을 내릴 것이다. 이같이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 바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아들여, 천국에 들어가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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