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11월 10일 - 이혼에 대해 가르친 예수님(막10:1-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11-10 |
첨부파일: 이혼에 대해 가르친 예수님.hwp(22K) |
이혼에 대해 가르친 예수님(막10:1-12)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먼저 예수님은 믿음을 가르쳤다. 앞으로 그들이, 믿음으로 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들에게, 겸손과 관용과 화목을 가르쳤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 가르쳤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에 대해 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답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분명한 교훈을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혼을 아주 쉽게 생각했다. 그들은 이혼을 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혼하는 것을, 하나의 용기 있는 행동처럼 여겼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의 풍조가 아니다. 어그러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만이 절대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 모두 결혼의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각자의 가정에서, 더욱 충실하기를 바란다.
1. 바리새인들의 질문(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을 향했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유대 지경에 있는 예루살렘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요단강 건너편, 곧 베레아로 갔음을 밝히고 있다. 건너편은 베레아 지역을 말한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눅9:51-),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요단 강 건너편, 베레아(요르단)로 우회해서, 유대로 갔다.
예수님이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갔을 때,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는, 베레아에 사는 유대인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유월절을 맞아, 갈릴리에서 베레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유대인들도 많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전례대로, 그들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쳤다. (마19:2)을 보면, 이때 예수님은, 그들의 병도 고쳐주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권능을 행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나타냈다. 전례대로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드러내며, 구원의 길을 가르쳤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정말 바리새인은 끈질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계속 쫓아다니며, 책잡으려고 시험했다(페이라존테스). 물론 그들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이 났지만, 그들은 포기할 줄 몰랐다.
이때도 그들은 악의를 품고, 예수님께 나왔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 그들은 이미 계산된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에 빠트리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의 질문이 (마19:3中)에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그들의 이혼사유를 잡다하게, 열거하고 있다. 예컨대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시모에게 나쁜 말을 하거나, 다른 남자와 대화해도, 밖에서 머리를 풀고, 음식을 태우거나,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할 경우 등등이다.
그러니 그 당시, 이혼하기가 얼마나 쉬웠겠는가? 자기 아내를 버리려면, 필요한 구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에게 모여든 무리 가운데는, 이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든 자도, 많았기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물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은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할지, 미리 다 계산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이미 들었고, 산상수훈 중에(마5:31-32),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없이, 이혼하는 것을 금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옳지 않다”고, 대답할 것을 내심 기다렸다. 이로써 그들은 2가지를 꾀했다.
① 그들은 예수님과 무리를, 이간질시켜 떼어놓으려 시험했다. 예수님의 대답에 따라서,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대답이 된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떠나버릴 것이라고, 그들은 기대했던 것이다.
②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3:6) 말씀을 보면, 이미 그들은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여겼다. 예수님은 지금 요단강 건너편, 곧 베레아에 있었다. 베레아(요르단)는, 분봉 왕 헤롯이 다스리는 영토다.
그 곳의 “마캐루스” 요새에서, 침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당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 (6: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했기 때문이다. 헤롯이 그의 아내를 버리고,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장가들었기에,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침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여겼는데, 예수님이 그의 이혼 문제에 대해서, 침례 요한과 똑같은 말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분명히 헤롯은 예수님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분봉 왕 헤롯의 손을 빌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2.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3-4).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기를 바랐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되물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모세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풍조가 아니었다. 조상들의 전통도 아니었고, 랍비들의 견해도 아니었다.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절대적이었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주저 없이 말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그들은 모세가 기록한, (신24:1) 말씀을 근거로, 이혼은 성경적으로 타당하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면 이 때 바리새인들은, 자신 있다는 듯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는가? 그들에게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와 다르게 말씀하고, 예수님이 성경과 다르게 가르친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실제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그들의 이혼을, 장려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이혼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신22장)에서 모세는, 남자든 여자든, 간음을 행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음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이 이혼이었다. (신24: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남편이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고, 함께 살기를 기뻐하지 않아서, 집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그럴 때는, 이혼증서를 써주어야만 했다. 당시에 여자들은, 경제력이 없기에, 여자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이혼당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했다(신24:1). 그래서 여자에게 이혼증서를 주어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게 했다. (신24:3)을 보면,
그런데 그 여자가, 둘째 남편에게도 이혼을 당하거나, 사별하여, 혼자되었다면, 그 여자의 전남편이, 다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가 있는가? 하지 못하게 했다. 한번 그의 아내를 내보냈으면, 다시 자기 아내로는, 맞이하지 말라고 했다(24:4). 여기서 맞이하지 말라는 동사가, 명령형이다.
모세는 이혼했으면, 그와 재결합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모세는 무엇을 명했나? 모세가 명한 바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아내를 내보낼 때는, 신중히 생각하라. 한번 내보내면, 다시 맞이할 수 없다며, 잘못된 법을 적용하지 말라. 예수님은 여성 인권을 보호했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왜 사람이 이혼하는가?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이 쉽게 아내를 내보내지 못하도록 명했다. 아내를 내보내면, 다시 맞아들이지 못하니, 함부로 이혼하지 말라.
예컨대 자기 아내보다, 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겼다. “저 여자와 한 달만 살다가 헤어지고, 본래 아내를 다시 맞이해야지.” 이런 악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모세는 한번 내보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라는 명령을 기록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는, 네게 귀한 자녀들을 낳아준 아내인데, 어찌 그리도 쉽사리, 내보낼 수가 있단 말이냐? 한번 내보내면 다시는, 맞아들이지 못하니, 내보내기 전에,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라.” 이런 뜻으로 모세는, 이 명령을 기록했다. 성경의 진리를 악용하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 완악함은, 바리새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 때 그들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에 계시된, 결혼의 원리를 들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을 정당화시키려고, (신24:1) 말씀을, 그릇되게 인용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람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떼어놓고, 헤롯의 손을 빌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이렇듯 마음은 완악했다. (6-8)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의 명령을, 곡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모세가 기록한, 다른 성경 (창1장, 2장) 말씀을 인용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그 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창1장, 2장)에 있는 말씀을 통해,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①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창1:27). 하나님은 사람을 한 남자와, 한 여자로만 지었다. 하나님은 한 남자에, 여러 여자로 짓지 아니했다. 또한 여러 남자에, 한 여자로 짓지도 아니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헤어졌더라면, 인류는 (창3장)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결혼을 해야, 인류는 발전하게 된다. 특히 젊은이여 결혼을 신중히, 잘 선택해서 하라.
② 결혼으로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 되기 때문이다(창2:24). 사람이 결혼을 하면, 그 부모를 떠나고,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된다. 한 몸은 둘로, 쪼갤 수 없다. 부부는 한 몸이니, 둘로 나누어질 수 없다. 부부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자녀에게서 분명히 나타난다.
자녀는 부모의 모든 것을 섞어서, 한 몸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부부가 이혼하면, 자녀의 몸을 둘로 쪼개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만큼 자녀들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세상의 모든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이니, “아무래도 우리는 잘못 만났어. 우리 결혼은 실수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모든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예수님은 성경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었다.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기를 바란다.
3. 예수님의 교훈(10-12).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원리와, 결혼의 원리를 따라, 그들에게 대답했다. 사람이 그 아내를 버렸다. 그의 아내와 이혼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임의로 나눈 셈이다. 그가 다른 데에, 장가를 들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었기에, 이제 두 사람은, 남남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한 몸이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아내가 있는 한 몸이다. 그런데도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었다면, 자기 본처에게 간음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범한 것이다.
이것은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아내를 버림은, 자기 아내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 또 남편을 버림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할 만큼,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한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이 짝지어 준 아내와 남편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은, 2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이혼을 허락했다. ① 배우자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음행을 범할 경우다(마19:9).
② 믿지 않는 배우자와 신앙문제로, 계속 갈등할 경우다(고전7:15). 그래도 섣불리 이혼하면, 안 된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간음했을 때, 호세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멜에게 베풀었던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생각하고, 또한 믿지 않는 자도, 그 배우자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0계명이 금하는 것처럼, 이웃의 아내를 탐내면 안 된다. 예수님이 말씀처럼, 음욕을 품고, 이웃의 아내를 보면,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떳떳하지 못한 점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용서하며, (요8:11下)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간음, 우리의 이혼까지도 용서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본문 바로 앞 절인 (9:50)에서, 예수님은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했다. 당연히 부부 사이에도,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 모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한 부부, 서로 화목한 가족이 되기 바란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는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은 꼭 결혼을 하고, 끝까지 가정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신중한 결혼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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