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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11월 3일 - 화목을 가르친 예수님(막9:42-50)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11-03
  첨부파일:   화목을 가르친 예수님.hwp(22K)

화목을 가르친 예수님(9:42-5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화목을 가르쳤다. 당시에 제자들은, 서로 화목하지 못했다. 그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서로 쟁론했다. 서로 시기질투하며 싸웠다.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불화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자,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했다. 배타적이었다.

이처럼 그들은, 안에서도 화목하지 못했고, 밖으로도, 화목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떠나면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악한 마귀는, 대적하는 자들을 일으켜, 그들을 박해할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훼방할 것이기에, 서로 화목하지 못하면, 결코 협력할 수 없다.

1. 남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된다(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은 발을 헛디뎌, 넘어짐을 말한다.

영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결과, 받아야 할 벌이 정말 무섭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자들”(13:33)라 불렀기에, “작은 자들, 연령이나, 신체적으로 작은 자들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작은 자이다.

우리가 보기에,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하며, 믿는 한 사람의 소중함을 밝혔다. (41)에서, 우리가 믿는 자, 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면, 예수님은 반드시 상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믿는 자, 한 사람을 실족시키면, 예수님은 엄한 벌을 내린다. 예수님은 (25: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 연합된다. 그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셈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저버리면, 곧 예수님을 저버린 셈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똑같은 원리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킨다(32:10, 17:8).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다치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똑같은 원리다. 예수님이 사울, 즉 바울을 부를 때도, 예수님은 같은 원리로 말씀했다.

(9: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성도를 박해한 것이, 예수님을 박해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원리를 분명히 깨닫는다면, 서로 화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서로 화목하며, 남에게 관용을 베풀면, 예수님은 반드시 상을 준다.

그렇지만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남을 실족하게 하면, 예수님은 차라리 그 이전에,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서, 깊은 바다에 빠져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했다. 바다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는 것이, 오히려 나을 만큼, 내세의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다는 말이다.

남을 실족하게 한 후에, 받게 될 형벌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다. 맷돌은 곡식을 가는데 쓴다. 둥글고 넓적한 돌, 2개를 포갠다. 아랫돌은 고정을 시킨다. 위에 있는 돌에는, 구멍이 있다. 그 속으로 곡식을 넣으며, 빙글빙글 위의 돌을 돌린다. 그렇게 해서 곡식을 가는 것이, 바로 맷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연자 맷돌을 말씀했다. 손으로 돌리는 맷돌이 아니라, 나귀와 같은 짐승이 돌리는 맷돌이니,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삼손이 바로 연자 맷돌을 돌렸다. 연자 맷돌 위짝에 있는 구멍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밀어 넣으면, 목에 연자 맷돌이 매인다. 그런 채로 바다에 던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순식간에,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게 될 것이다. 이렇듯 남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끔찍한 벌이 주어진다. 이보다 더 강한 경고를, 제자들에게 준 적이 없다. 이 엄한 경고를 통해서, 예수님은 서로 화목하라고 했다. 끔찍한 벌이 아니라, 예수님이 약속한,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2.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림이 낫다(43-44).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없음)”

앞에서 실족하게 하다.”(42), 여기서는 범죄하게하다.”로 번역했다. 똑같은 단어(스칸달리조)인데, 번역을 다르게 했다.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하고, 범죄하게 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이 바르게 서야만 한다. “범죄하게 하다.”는 현재형이다. 계속해서 손이, 우리를 범죄 하게하거든, 찍어버리라는 것이다.

우리 손이 한번 죄를 범했다고, 곧 바로 찍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 말씀했다. 한 손을 찍어버려도, 그 이후에는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가 있다. 두 손을 다 찍어버리더라도, 얼마든지 죄 짓는 일은, 가능하다.

마음으로 미워하면, 살인이다.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다, 이처럼 죄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그렇다고 우리 심장을, 도려낼 수 없다.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손을 찍어버리는 것처럼, 그만큼 단호하고 철저하게, 죄를 떨쳐버리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바르게 서고, 남을 실족하게 만들지 않는다. 예수님은 앞(42)에서 남을 실족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 목에 연자 맷돌이 매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43)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손을 가진 장애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했다.

예수님은 지옥을 꺼지지 않는 불이라 했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곳이다. 따라서 한 손을 찍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지옥에 던져지면, 안 된다. 44절에는, 괄호 안에 (없음)이라고, 써놓았다. 46절도 (없음)이다. 원본에는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단지 서기관들에 의해 기록된, 마가복음의 여러 사본들만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초기에 기록된 사본들을 보면, (44, 46)에 아무 말씀이 없다. 다만 후기 몇몇 사본들에는 (48) 말씀을 덧붙였다.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후대의 서기관들이, 이 말씀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려고, (48), (44, 46)에 덧붙였다고 본다. (45-46)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없음).” 예수님은 또 다시, 같은 내용으로 말씀한다.

범죄 하게 하거든, 현재형이다. 우리 발이 계속 범죄 하게 하면, 사정없이 찍어버려야 한다. 우리 손과 발이 범죄 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 사정없이, 찍어버려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에 들어가지만 말씀을 거역하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지옥에 던져진다.

예수님은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성경을 보면 지옥이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신약성경에 도합 열세 번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한번은, (3:6)에 나오며, 또 한 번은 (벧후2:4)에 나온다.

나머지 열한 번은, 모두 예수님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만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1:3). 예수님은 지옥을, 너무 잘 안다. 지옥을 만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끔찍한 지옥에 던져지지 않도록, 엄하게 경고했다.

(47-48)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같은 내용으로 말씀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똑같은 내용으로, 최고 강조해서 말씀했다. 따라서 그만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눈이 계속해서, 우리를 범죄하게 만드는가? 그러면 사정없이 그 눈을 빼버려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지옥”(게엔나)은 어떠한 곳인가? (25:41) 말씀처럼,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 귀신들을 위해 예비 된 곳이다. 그러나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역시 지옥에 던져진다.

그 결과 마귀와 귀신들과 함께, 영원토록 같은 운명에 처해진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다(43). 게다가 (13:50)에 지옥은, 풀무 불같이, 뜨겁게 불타는 곳이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옥의 불은, 뜨겁기만 하지, 전연 빛을 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22:13)처럼, 지옥은 불빛이 닿지 않는, 바깥 어두운 곳이다. 또한 (13:50) 말씀과 같이, 지옥에 던져진 사람은 울면서, 이를 간다. 과거의 추한 일들이, 모조리 다 생각나기 때문이다. (48)처럼 지옥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시체가 다 썩으면, 구더기도 없어진다.

시체가 다 불타면, 불도 꺼진다. 그렇지만 지옥에서는, 사람이 죽지 않으므로, 몸 안에는 구더기가, 몸 바깥에는 불이, 영원토록 고통을 준다. 이처럼 지옥은, 본시 마귀와 귀신들을 위해 예비 된 곳이다. 불타는 곳, 어두운 곳이다. 추한 기억들이, 모조리 되살아나는 곳이다.

소망 없이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지옥은, 너무 끔찍한 곳이다. 가장 큰 고통은 탈출구가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천국은 어떤 곳인가? (47)절 말씀처럼,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그 곳에는 하나님이 있고, 예수님이 있다.

그러니 (21, 22)에 묘사된 것 같이, 천국은 너무, 영화로운 곳이다. (21:23) 말씀과 같이, 천국은 항상 빛으로 충만하다. (65:17) 말씀처럼, 천국에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좋지 않은 기억들은, 완전히 제거된다. (22:5) 같이, 천국에서는 세세토록 왕 노릇한다.

너무 영화로운 곳이다. 빛이 가득한 곳이다. 부끄러운 기억들이 모두 사라지는 곳이다. 영생을 누리는 곳이다. 그러기에 천국은, 너무 좋은 곳이다. 남을 실족하게 하는 일에, 우리의 손과 발이 쓰였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찍어버리자. 남을 실족하게 하는 일에, 우리 눈이 사용됐다면, 그것을 빼버리자.

지옥에 던져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손이 무엇을 하는지, 우리 발이 어디를 가는지, 우리 눈이 무엇을 보는지, 조심하자. 날마다 자신이, 바르게 서도록 힘쓰자. 그러면 우리가, 남을 실족시키는 일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3. 서로 화목해야 한다(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왜 남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되나? 바르게 서야 하는가? 서로 화목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장차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다. 그 곳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바 되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불같은 시험이 임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많은 박해를 받을 것이며, 많은 환난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게 되어, 많은 고통을 줄 것이다. 소금으로 절인다. 또 뜨거운 연탄불에, 왕소금을 뿌리면, 소금이 , 소리를 내면서 튄다. 지옥 불이 얼마나 뜨거우면, 사람이 튈 정도겠는가?

시체를 화장할 때, 불의 온도가 700도라고 한다. 700도 정도가 되면, 뼈는 추릴 수 있지만, 1천도가 넘어가면, 뼈도 추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옥은 죽을 수도 없다.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화목하며, 서로를 세워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싸우고 나온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은 짠맛을 내며, 음식 맛을 더하며, 음식을 신선하게, 유지시키기에 좋은 것이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소금을 짜게 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을 하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고후5:18-19), 예수님은 십자가를 짐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했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기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힘써 전해야 한다.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면, 누가 우리를 화목하게 하는가? 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누가 전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서로 화목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벌이 있다. 다시 말해 화목해야, 시험과 환난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화목해야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서로 화목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우리 속에 소금을 두면, 비로소 서로 화목할 수 있다. 소금처럼 교제하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짐승을 제물로 드릴 때는, 반드시 그 짐승을 죽여서 드렸다.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드렸다. 그렇다면 소제물, 곧 곡식이나 채소를 드릴 때는, 어떻게 했는가?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모든 소제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했다. 짐승을 죽여서, 하나님께 드리듯이, 소금으로 소제물의 숨을 죽여서,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했는가? 뻣뻣한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소금을 쳐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했다.

그들의 교만에 소금을 쳐서,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들의 편협한 마음에 소금을 쳐서, 그들을 관용하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해야 한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며,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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