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내용
•홈  >  말씀과찬양  >  설교내용
  제  목 : 2019년 10월 20일 - 관용을 가르친 예수님(막9:38-41)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10-20
  첨부파일:   관용을 가르친 예수님.hwp(21K)

관용을 가르친 예수님(9:38-41)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기간 동안 예수님은, 대중을 위한 사역보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다. (9)에서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쳤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또 눈으로, 예수님이 행하는 것들을, 직접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은, 그들을 떠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보고 행할 수 없게 된다. 그 때부터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행해야 하기에,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면서,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쳤다.

또 예수님은 겸손을 가르쳤다. 제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서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해야 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겸손은 필수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쟁론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교만을 나무랐다.

또 본문에서는 관용을 가르쳤다. 관용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임을 말한다. 예수님이 관용을 가르친 이유는, 그들이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본문을 통해서, 관용을 잘 배워서,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기를 바란다(4:5).

1. 요한의 질문(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여짜와묻는 장면이다.

요한과 야고보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렸다(3:17). 그 이유는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9:51-), 예수님께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곳을 멸해버리자고 했다. 그만큼 과격한 사람이다.

또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줄 것을 구했다. 이처럼 과격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일에도, 충분히 앞장설 수 있었다. 요한은 그들의 행동이 타당했는지, 예수님에게 물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9:49)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 때 요한은, 예수님을 선생님또는 주여라고 불렀다. 그들은 행동을 잘했다고, 예수님께 물었다. 어떤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는데, 그들은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은 자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금했다.

귀신을 쫓으려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8)에 나오는,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처럼, 자신을 위해 돈을 주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사려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19:13-14)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처럼, 귀신을 내쫓기 위하여, 주문을 외우듯, 예수님 이름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 거짓 선지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만, 예수님에게 정죄를 받았다(7:22). 그렇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자는, 예수님에게 정죄 받지 않고, 인정받았다.

따라서 그 사람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택함 받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준, 권능을 받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 (10)에서 예수님은, 열둘 외에, 칠십 인을 세웠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

본문에 나오는 자는, 열둘에는 들지 못했지만, 귀신을 쫓아냈다. 왜 요한과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금했나? 특권 의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귀신을 내쫓는 권능이 그들에게만 주어졌다고 여겼다(3:15). 그들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그들은, 산 아래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능히 고쳐주지 못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열둘에 속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아,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며,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텃세를 부렸다.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이처럼 그들 속에 도사리는, 특권의식과, 시기질투가, 배타적인 사람들로 만들었다. 앞으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다. 그렇기 위해서, 그들은 편협한 마음과, 배타적인 자세를 버려야 했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권능을 주어서, 제자들에게, 관용을 가르친 것이다.

2. 예수님의 답변(39-4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의 답변은 간결하고 분명했다. 너그럽게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은 관용해야 할 이유를 밝혔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면, 서기관들처럼 예수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폈다.”면서, 비방을 하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고, 제자들이 금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내쫓겼으니, 그 일로 인해 기뻐해야 마땅할 것이다. 요한은 앞에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이처럼 우리, 세 번이나 사용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가리키는 라는 단어만 사용했다. 제자들은 우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만을 생각했다. 그러니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생각했다면, 관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한 일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들이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어야 했다. 이 사실을 명심했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관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중에,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어떤 이들이 투기와 분쟁으로, 더욱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했고, 어떤 이는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려고,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릇된 경쟁심에 불타서, 자기들을 높이려고, 그리스도를 전파했지만, 바울은 관용으로 대했다.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복음이 바르게 전해지고, 예수님이 높임을 받기만 하면,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지, 전혀 상관하지를 않았다.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랐다(1:20). 이처럼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관용할 수 있지만, 자신만 생각하면, 관용할 수 없다.

특권의식과, 시기 질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열두 제자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금하지 말라 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2가지로 말씀했다. 내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비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너그럽게 다 받아들여야 한다며,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했다. (11)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세가 장로 칠십 인을 모아서, 장막에 둘러 세웠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임한 영을, 장로들에게도 임했다.

그 결과 장로들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다 장막 앞에서 예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때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장로가, 그들과 함께 하지를 못했다. 그들은 연락받지 못했는지, 진영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영을 임하게 해서, 그들도 진영에서, 똑같이 예언했다.

한 소년이 모세에게, 그 사실을 이르, 모세를 섬기던 여호수아가, 그들을 말리라 했다. 여호수아는 우리를 위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반대하는 자다.”는 생각했지만, 모세는 (11:29)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의 생각은 이랬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가? “우리를 위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반대하는 자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관용할 수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관용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 이런 배타적 생각을 가지면, 친구는 없어지고 적들만 생긴다.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좋다.”는 너그러운 생각을 가져야만, 적이 사라지고, 친구가 많이 생긴다.

따라서 관용의 비결은 나를 생각하기보다, 예수님을 생각하라. 나의 마음을 넓혀서, 모든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교회 일에 협조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최소한 반대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해서, 관용을 행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약속한 것이 있다.

3. 예수님의 약속(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관용을 행하면,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가? 마음에 굴욕감이 찾아오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관용의 실례를 들어서, 약속했다. 물 한 그릇을 주는 것이다. 나그네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은, 우리는 흔하게 하는 일, 푸대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운 나라 이스라엘에서는, 물 한 그릇을 얻으려면, 멀리 가서, 깊은 우물을 찾아가서, 길어 와야만 한다. 또 그늘진 곳에, 잘 보관해야 시원하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오해하지 말자. 가장 흔한 물 한 그릇이 아니라, 귀한 물 한 그릇이라는 의미임을 기억해야 한다.

상대방을 귀하게 여길 때, 관용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속한 자라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관용을 베푼 것이다.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했다. 성도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에게 행하듯 하라.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성도들끼리 서로 돕고 사랑한다면, 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라 인정받고, 상을 하나님께 받게 될 것이다.

(25:40)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관용에 대해서, 예수님은 잊지 않고, 우리에게 상을 준다. 물론 작은 관용이라,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다.

(25:37) “우리가 어느 때에,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라며 물어볼 수 있다면 (25:35) 예수님은 내가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라고 분명히 대답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2가지 표현으로, 이 사실을 강조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했다. 결코라는 단어다.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관용하는 자를 잊지 않고, 반드시 상을 준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관용을 행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칭찬하고, 상을 얻게 될 근거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을 준다. 우리가 베푼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갚아준다.

.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면, 잃는 것이 아니라, 얻게 된다. 풍성한 상을 받는다.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진다.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게 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관용을 행하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관용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관용의 본을 보였다.

예수님은 잡히던 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그들과 함께 만찬을 들었다. 물론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도, 모두 알고 계셨다. 다른 제자들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모두 씻어주었다. 본래 제자는, 스승의 발을 씻어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그들에게 관용의 본을 보였다. 빌라도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풀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관용을 생각하고, 관용을 베풀기를 바란다.

바울은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우리 속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고백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죄 덩어리임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예수님의 관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다. 따라서 우리도,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그에게 관용을 베풀어줌이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면, 예수님은 약속한 대로, 우리는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할 것이다.

주님은 어떤 그 무엇보다도, 성도끼리 화목하고, 서로 사랑하며, 돕는 일을 기뻐한다.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 사람이 찬성하는 일에, 무조건 반대하고 가로막으면, 주님 사업을 방해하는 훼방꾼과 같다. 교회 일에, 불평하고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잘 받아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

  이전글 : 2019년 10월 13일 - 겸손을 가르친 예수님(막9:30-37)
  다음글 : 2019년 10월 27일 - 마지막 절기 초막절(레23:33-44)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