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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10월 13일 - 겸손을 가르친 예수님(막9:30-37)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10-13
  첨부파일:   겸손을 가르친 예수님.hwp(20K)

겸손을 가르친 예수님(9:30-37)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기를 원했다. 장차 그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모든 사람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 앞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쳤다.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그들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그들의 힘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을 말씀했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간구하여, 태산 같은 문제를 해결 받았다.

이렇듯이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다 가능하다. 전능한 예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할 것을 가르쳤다.

이어서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쳤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겸손이 필수적이다.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겸손을 잘 배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늘 풍성히 받자.

1. 겸손의 본이 되는 예수님(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떠났다.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있었다.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주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며, 믿음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를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갔다(33). 그러나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많은 능력을 행했지만, 영접하지 않았다. 또 수난을 준비하는 기회를, 조용하게 지나고자 했다. 성경은 그 이유를, 2가지로 말한다.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집중해서 제자들을 가르쳐야 했다. (9, 10)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친 내용들이, 여러 가지로 나온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믿음을 가르쳤다. 오늘 본문에서, 겸손을 가르쳤다. 곧 이어서 관용과 화목을 가르쳤다. 그리고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들어서, 구원에 대해서, 부자 청년 관리를 들어서, 영생을 가르쳤다. 은혜를 가르치고, 자신이 당할 일과, 영광의 길을 가르치고, 섬김을 가르쳤다.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더, 믿음을 가르쳤다. 이처럼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래야 예수님이 승천한 후에, 가르침에 따라 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르칠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알리려고 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한다. 죽임을 당하며, 다시 살아날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갈릴리는 잠시, 거쳐지나가는 곳이다. 모여드는 갈릴리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방해받지 않기 바랐기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자, 제자들은 매우 근심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며, 세세토록 영광가운데, 이스라엘을 통치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죽임 당한다는 말인가? 어찌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 있나? 당시에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지만, 묻기도 두려워했다. 베드로처럼 야단맞기도 싫고, 슬프고도 고통스런 일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병행구절 (9: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숨긴바 되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니까,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이 때 그들이 도망친 것은, 그들을 보호하려는 은혜였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뒤에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예수님이, 대속의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겸손의 극치였음도 깨달았다. 겸손을 가장 잘 설명한 곳이 (2)이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3). 그렇게 되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5).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다(6).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높은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췄다(8).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받았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누가 예수님보다, 더 낮아질 수 있겠는가?

가장 높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자기를 낮췄다. 이처럼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겸손의 극치였다. 이 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나? 그들은 겸손의 본인 예수님과는, 너무나도 딴판이었다.

2. 교만에 사로잡힌 제자들(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이르렀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불렸다(9:1).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집에 있을 때(1:21, 29), 베드로의 집이 있었다. 이때도 예수님은, 베드로 집에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모르기에, 물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토론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질문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가버나움까지는 거리가 멀기에, 오랫동안 서로 토론했을 것이다.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토론했던 내용은 무엇이었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러워, 입을 다물어버렸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말씀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당할 고난은,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얻을 영광만 생각해서, 서로 자기가, 더 크다고 길에서 다투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에,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고, 자기들도 덩달아, 영광을 누릴 줄로 여겼다. 누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더 큰 영광을 얻을 것인가? 그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먼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의 유력한 후보가,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그들 세 사람만,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20:20)을 보면,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와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구했다. 그 때 다른 제자들은, 두 형제를 분히 여겼다.

그들도 어머니가 가까이 있었으면, 함께 예수님께 호소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갈릴리 각 촌으로 제자들을 파송했을 때, 내가 더 큰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이렇듯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만에 사로잡혀, 서로 자기가 크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교만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날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아무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지 않았다. 그 때 예수님은, 몸소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모두 씻어주었다. 그런 후 예수님은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했다.

겸손해야 사랑할 수가 있다. 겸손해야 예수님의 제자로써, 하나가 된다. 반대로 교만하면, 사랑할 수 없다. 교만하면 서로 다툰다. 불화가 일어나기에, 하나가 될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교만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를 수 없다.

교만하면, 다른 사람들을 품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자꾸 미워지고,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겸손하면, 그래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라고 하며, 꾸지람과 책망도 받아들이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다. 주님 말씀도 받아들여, 용서받고 구원도 받게 된다.

3. 제자들을 가르친 예수님(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리에 앉았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고, 먼저 그들을 책망했다. 그들이 교만에 사로잡혀, 서로 자기가 크다고 다투었다. “되어야 하리라.”는 원문은 (에스타이, 에이미의 현재 명령). 되라는 명령이다.

제자들은 첫째가 되겠다고, 서로 다투었다. 교만 때문에 불화하며, 하나 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첫째가 되는 비결을 가르친다는 것은, 문맥적으로 맞지 않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만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기 때문이다.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다.

(18)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를 높였던 바리새인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춘 세리는 높아졌다. (18: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한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만의 결과를 밝혔다. (36-37)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교만을 책망한 후에, 그들에게 겸손을 가르쳤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웠다. 아마도 두 살 정도 되는, 아이였을 것이다. 자기 발로 서기도 하고, 예수님의 팔에 안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 당시 어린아이는, 사람들의 수에도 들지 못할 만큼, 무시당하던 존재였다. 그러니까 (35)에 나오는 말씀으로 표현하면, 어린아이는 말 그대로, 뭇 사람의 끝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다. 예수님은 뭇 사람의 끝인,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첫째가 되려는, 제자들 가운데 세우고, 팔로 그 아이를 안았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겸손을 실천해 보였다. 겸손이 무엇인가? 이 때 예수님이, 본을 보인 바와 같이, 뭇 사람의 끝인, 어린 아이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더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며, 귀중히 여겨주는 것이다.

그러면 겸손의 결과는 무엇인가?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와 같이, 낮고 비천한 자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25:40).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겸손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뭇 사람의 끝이라도, 섬기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도 기뻐하고, 하나님도 기뻐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푼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췄기에, 하나님이 지극히 높였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겸손하게 우리를 낮추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일 것이다.

악한 영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또 자리를, 다투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훼방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앙의 진리들을 가르쳤다. 닥쳐올 고난의 때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했다. 겸손해야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겸손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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