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10월 6일 -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가르친 예수님(막9:14-29)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10-06 |
첨부파일: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가르친 예수님.hwp(22K) |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가르친 예수님(막9:14-29)
제자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눈으로, 예수님이 행하는 이적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떠나면, 그들은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가르쳤다.
1.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예수님은 변화 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제자와 함께 산에서 내려왔다.
그 때 산 아래에는,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와서 보니, 큰 무리가, 아홉 명의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곳에 제자들이 있으니까, 예수님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여겼는데,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악의적으로 찾아온 서기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곳에 있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변론했다. 제자들은 열세에 몰렸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이 찾아 주었다. (15-16)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그때 온 무리는, 3가지 반응을 보였다. ① 매우 놀랐다. ② 예수님에게 달려왔다. ③ 예수님에게 문안했다. 무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매우 놀란 표정으로 환호하며, 예수님에게 달려가서 말을 걸고자 했다. 그 때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변론이 있음을, 다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모든 것을 안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있었던 변론의 내용을, 예수님이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의기양양한 서기관들을 나무라며, 곤경에 빠진 제자들을, 구해내기를 바랐다.
예수님의 질문에 서기관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제자들도 면목 없다는 듯이, 아무 말을 못했다. (17-18)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마17:13)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게 꿇어 엎드렸다.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눅9:38)을 보면, 그는 소리를 질렀다. 데리고 온 아이는, 외아들이니(눅9:38),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소리 질렀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마17:15)에는 “주여”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 “주여”라고 번갈아 부르면서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를 아뢰었다. 그만큼 그는 절실했다. 그 아이는 그의 외아들이었는데, 그 아이가 귀신들려서, 말을 못했다.
(25)절 말씀처럼, 그 아이는 듣지도 못했다. 듣지 못하니까,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왔다. 그의 아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기를 바랐다. 그 귀신이 얼마나 심하게, 자기 아들을 괴롭히는지, 5가지로 말했다. ① 어디서든지 그를 잡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괴롭혔다.
② 거꾸러진다. 발작을 일으키고 ③ 거품을 흘린다. ④ 이를 간다. ⑤ 파리해진다. 온 몸이 경직되는 것이다. (마17:15)에서, 그는 자기 아들이, 간질을 앓는다고 밝혔지만, 그 간질이 단순히,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질병은 아니라고 여겼다.
자기 아들이, 말을 못하고, 심한 간질을 앓는 것은, 귀신들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기 아들을 데려왔는데, 예수님이 그 곳에,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주기를 구했다(눅9:40). 그런데 제자들은, 능히 하지를 못했다.
2.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친 예수님(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불신자들에게는 변론 대신, 행함으로 진리를 증언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미, 열두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었다(6:7). 또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6:13). 그런데 이번에 그들은, 왜 귀신을 내쫓지 못했나?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귀신을 내쫓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시도했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그에게서 나가라.” 그런데도 귀신이,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포기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약속했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어야한다. 물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런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없자, 믿음이 사라졌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2가지 질문으로 나무랐다. ①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이제 예수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그들을 떠나, 천국으로 가야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믿음으로 행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쉽게 낙심하지 않는가? 그러면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한다. ② “믿음이 없는 자여! 내가 얼마나 너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에게 참으리요.” 따라서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믿음 위에, 굳게 서라. 믿음은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20-22上)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눅9:42)은, 예수님께 오는 도중, 귀신은 그를 거꾸러뜨렸다. 예수님에게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귀신이 예수님을 보는 순간, 다시 그 아이를 사로잡았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땅에 엎드러져 뒹굴었다. 그 아이의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이런 광경을 보고, 예수님은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데, 왜 이런 질문을 했나?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자기 고통을, 예수님께 아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한다.
따라서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아뢰면,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푼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예수님이지만,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질문에 “어릴 때부터니이다.”라고 했으니, 그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던 사실을, 한 가지 덧붙였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귀신은 그 아이를 모닥불이나, 장작불, 샘이나, 연못으로 끌고 가서, 강압적으로 그 아이를 그 속에 던졌다. 그것도 가끔이 아니라, 자주 그렇게 했다. 귀신은 그 아이를, 죽이려 했다. 따라서 그 아이 몸에는, 불에 덴 화상과 상처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 아이도 매우 고통스럽지만, 필사적으로 귀신에게서, 외아들을 지켜야 하는, 그 아이의 아버지도, 정말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요9:2중)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제자들이 물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했다.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귀신들린 것이니, 죄 때문일 수 없다. 한 가지 사실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신은, 그 아이를 죽이려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22中-24)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1:40)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했다.
그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예수님의 의사를 물었다. 이에 비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하실 수 있거든”하고, 믿음 없이 간구했다. 그는 예수님의 의사는 알았다.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했기에, 예수님도 능히 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여겼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구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말이었다. 믿음이 없는 간구였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고, 그를 나무랐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대답했다. “내가 믿나이다.” 그 아이는 심하게 경련하며, 땅에 엎드려 뒹굴며, 거품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의 능력과 말씀을 믿는다고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의심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으니, 도와달라. (25-27)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예수님은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며,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와의 대화를 멈췄다.
이제 예수님의 관심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곧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며 말씀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더러운 귀신은, 아이가 말을 못하며, 듣지를 못했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지만, 그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사람에게 들어갔다. 그 결과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럴 우려가 없었다. 예수님이 그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그 아이와, 그 아이 아버지는, 귀신이 주는 고통에서, 완전히 놓임 받게 되었다. 귀신이 나갈 때, 소리를 질렀다. 귀신은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서 나갔다. (막1:26) 말씀을 보면, 이전에도 귀신이, 똑같은 방식으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귀신은 그 아이에게서, 나가기 싫었지만, 예수님이 명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 아이에게서 나가야했다. 그래서 귀신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아이를 심히 괴롭혔다. 이렇듯 귀신의 본질은, 더럽고 악하다. 심한 경련으로, 그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다.
불신자들은 주님의 선한 일을 보고도, 오해한다. 실제로 귀신은, 그 아이를 죽이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허락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영광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이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 아이가 일어섰다. 그 아이는 혼자도, 서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눅9:42).
참 아름답고, 인자한 예수님의 모습이다. 죽은 것 같은,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듯이, 예수님은 우리 손도, 기꺼이 잡아준다. 예수님이 우리를 일으켜주기에, 우리는 넘어졌다가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쳤다. 이로써 다시 한 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된다.
3. 제자들을 가르친 예수님(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제 장면이 바뀌어, 예수님이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예수님은 무리를 벗어나서, 제자들과만 함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조용히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한 “이런 종류”란, 이번에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한 마디로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번에 그들은, 너무 쉽게 생각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셨기에, 많은 귀신들을 내쫓았다.
그래서 자기들이 당연하게,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쫓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 이유가, 그들에게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에게 어떤 권능이 있는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그 곳에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약5:16) 말씀처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큰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17:19-20)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작은 까닭이었다. 그들은 자기들 선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기도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이처럼 믿음이 작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겨자씨 한 알만큼 있어도, 우리는 태산과 같은 문제라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실례가, 바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이 없었다.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 했지만, 그는 믿음으로 간구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 결과 큰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라도, 자기 힘으로 하면 실패한다.
그러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가진 사람이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태산과 같은 문제라도 해결 받는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 그래서 날마다, 믿음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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