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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9월 22일 - 영광을 드러낸 예수님(막9:1-8)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09-22
  첨부파일:   영광을 드러낸 예수님.hwp(21K)

영광을 드러낸 예수님(9:1-8)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해야 할,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지 밝혔다.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바 되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드러내 놓고 말씀했다.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 끔찍하기에, 예수님이 잡힐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다 도망칠 것이다. 장차 제자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순교자가 되어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어야 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며, 소망을 줄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것이니,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다(8:38). 예수님은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장래의 영광이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자신의 영광을 잠시 드러냈다.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예수님은 고난 너머에 있을 영광도, 미리 보여주었다. 3단계로 보여주었다.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기에, 열심히 충성하자.

1. 예수님의 변형(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확실하지 않은 일을, 추측해서 말씀한 것이 아니다. 확실하게 될 일을, 하나님의 권위로 엄숙하게 말씀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했다. 예수님 곁에는 무리와 제자들이 함께 서 있지만, 그들 모두에게 해당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 중에, 선택된 사람이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해당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했다. 제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서, 예수님이 온전히 영광받기를 바랐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우에 앉아,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한 것은, 이런 뜻이 아니다. 그들 중에 몇 사람에게는, 잠깐 동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기로 작정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서, 그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야 했기에,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바 되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고난을 당할 때, 실망하지 않도록, 자신을 드러냈다.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릴 때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도, 이들 세 사람만, 데리고 갔다. 이렇듯 이들 세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다.

예수님은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지만, 모두 당혹해하거나 이상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이 때 예수님은, 세 사람을 데리고 기도하시러”(9:28) 산에 올라갔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도 함께 기도하기를 바랐지만, 이 때 그들은 깊이 졸았다(9:32).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그들의 눈으로, 분명히 볼 것이다. (19:15)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어떤 사건을 확정하려면, 두세 증인이 필요했다.

변화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했다. 그들은 셋이니까, 자기들이 본 것과, 들은 것에 대하여, 증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었다. 이는 (9:29) 말씀처럼,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다. 예수님의 본질은, 결단코 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때, 예수님의 용모 곧 외모가 변화되었다. 예수님의 외모는,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외모가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자신이 입고 있던 육체를 벗었다.

예수님의 육체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을, 잠시 밖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이때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은 어떠한가?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또한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다(17:2).

어떤 빛이, 외부에서 예수님 얼굴에, 비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이다(9:32). 예수님의 얼굴만, 해 같이 빛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몸 전체가, 해 같이 빛났다.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 눈부신 빛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나며, 매우 희어졌다.

예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 밝아,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에는 광채가 났다.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 예수님은 빛이고(8:12), 어둠이 조금도 없다(요일1:5). 자신이 빛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임을 밝히 드러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아직도 의심을 품고 있는가? 성경을 읽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믿으면, (20:28)에 나오는 도마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2.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그들이 증언할 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장차 별세할 것이었다(9:31). 모세는 율법을 기록한 사람이다.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무찌른 선지자였다. 모든 선지자는 엘리야처럼, 힘써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목숨을 걸고, 전해야 했다. 모세가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모세가 율법에서 설명한, 제사 제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모세의 율법과, 모든 선지자의 글을 합친 것이, 구약성경이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5:17)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 곧 성경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성경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야만 했다. 그러면 이 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증언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증언이다.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랍비여”(랍비, 9:5)라고 불렀다. 마태복음에서는 주여”(퀴리에, 17:4)라고 불렀다. 누가복음은 주여”(에피스타타, 9:33)라 했는데, 마태복음에 사용된 주여와 다른 단어다. 누가복음의 주여,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사령관, 주인이여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깊이 졸다가, 놀라서 깨어났는데,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주여라고 불렀다가 랍비여라고 불렀다가 사령관인 주인이여라고 바꿔 불렀다. 베드로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높이려고 힘썼다.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도, 죽임당할 필요가 없고, 자기들도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으니, 모두 좋다는 뜻이다. 또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각기 하나씩 짓겠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밖에 있어도 되지만,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는, 초막 안에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육 개월 전, 초막절 무렵이었다.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예수님은 변형되자, 주님의 빛나는 영광 앞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자연히 그들은, 몹시 무서워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무슨 말을 한지 알지 못했다. 무서울 때의 원칙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좋다. 그러나 베드로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괜히 입을 열었다가, 그만 어리석은 말을 하고 말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수준으로 대했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경배를 받아야 할 하나님이다. 반면에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을 증언을 하기 위하여, 잠시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같은 수준이, 될 수 있는가? 게다가 베드로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했다. 왜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냈는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은 뒤에, 영광에 들어갈 것을 밝히 보이기 위해서였다. 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서, 그들 앞에 세웠는가? 성경에 계시된 대로,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은, 하나님이 정한 일임을, 그들에게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 그 때 예수님의 책망을 엄하게 받았는데도, 베드로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고, 계속해서 그 곳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예수님은 성경에 충실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하기 바란다. 그래서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늘 생각하기 바란다.

3. 하나님의 증언(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할 때, 베드로가 불쑥 끼어들어서, 대화를 중단시켰다. 그러니 베드로가 계속해서, 어리석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말이, 끝마치기도 전이었다(17:5). 이 때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일어났다. 그 구름은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어두울 수가 없었다. 빛이신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니, 그 구름은 빛날 수밖에 없었다.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다. 이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때 그들은, 구름 바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빛난 구름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빛난 구름 바깥에서 빛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을 때도, 하나님은 같은 증언을 했다. (1: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냄으로, 스스로를 증언했다. 또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나서 예수님을 증언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친히, 그 곳에 임재해서, 예수님을 증언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가? 도대체 누구의 증언이, 더 필요한가?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 대신 그들이,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17:6-7)을 보면, 이때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빛난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들은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대며, 이렇게 말씀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자, 오직 예수님과 제자들뿐이었다. 빛난 구름도 사라졌다. 모세와 엘리야도 없었다. 예수님도 변형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는, 오직 예수님과 그들만 다시 남았던 것이다. 뒤에 베드로는, (벧후1:17-18)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야고보는 일찍 순교했기에, 아무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나머지 한 사람 요한도, 이 때 그가 본, 예수님의 영광을 증언했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문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장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몸소 십자가를 졌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보리보다, 변화 산을 더 좋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앞서 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자. 그리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항상 우리를 돌보고, 친히 우리를 거느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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