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8월 11일 설교 - 맹인을 고친 예수님(막8:22-26)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8-11 |
첨부파일: 맹인을 고친 예수님.hwp(22K) |
맹인을 고친 예수님(막8:22-26)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있는, 벳새다로 향했다. 그 때 제자들은, 떡 가져오기를 잊어버려서, 식사 때에 먹을 떡 때문에 걱정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예수님은, 그들의 관심을 육적인 일에서, 영적인 일로 옮겨주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사두개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경고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와, 사두개인들의 자유주의와, 헤롯의 세속주의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주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 가지 질문으로, 차근차근 깨우쳐 주었다.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한 바를, 밝히 깨달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는, 영적으로 맹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빛인 예수님이 비추는, 환한 빛을 얻었다. 그렇다 그들에게 있는 어둠이, 순식간에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계속 빛을 비춰주자, 그들은 점점 더 밝은, 빛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생명의 빛을 온전히 얻었다. 오늘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본문에 특이한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어떤 병자든지, 단번에, 그리고 온전하게 고쳤는데, 2단계로 나누어서 맹인을 고쳤다.
예수님의 은혜로, 맹인은 점차적으로, 온전히 고침 받았다. 예수님의 은혜로 제자들은 점점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아가, 온전한 생명을 얻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도, 빛의 갑옷을 입고, 힘써 어둠을 물리치자. 본문이 상징하는 바는, 영적 성숙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1. 벳새다에 이른 예수님(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벳새다에 당도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어촌이다.
벳새다는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예수님의 본 동네라 불리던 가버나움과,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다. 이 벳새다에서,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기를 바랐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벳새다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성과 권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은, 바로 그 곳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주었고, 병자들도 고쳐주었다.
그러니 벳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어떤 병이라도 고치고, 어떤 장애자라도, 온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에게 손을 대주기를 구했다.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면, 그가 눈을 떠서, 보게 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요9:1-2)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그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 병들거나, 몸에 장애가 생기면, 그것은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병자나 장애자를, 부정히 여겼다. 병자들과 접촉하기를 꺼렸다. 바리새인들도 병자나 장애자의 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사두개인들도 그들에게,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랍비들도 그들에게, 손을 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자나, 장애가 있는 자의 몸에 기꺼이 자신의 손을 대었다. 예수님은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손잡아 일으켰다(1:31). 나병환자의 몸에도, 손을 대었다(1:41).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도, 그 손을 잡아주었다(5:41).
(히4:15)말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할 이가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에, 항상 우리를 어루만져 준다. 이 시간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만져 주시어, 우리에게도 나음이 있고, 회복이 있고, 위로가 있기를 바란다.
2. 맹인을 고친 예수님(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님은 여러 맹인들을 고쳤다. 대부분 말씀만으로 고쳤다.
그러나 때로는, 눈을 만져줌으로, 때로는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서 고쳤다. 예수님은 같은 방법만 고집하지 않았다. 이는 예수님이 그만큼, 개인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특이하게, 이때 맹인을 2단계로 나누어서, 점진적으로 고쳤다. 먼저 첫 단계가 소개된다.
(1) 첫 단계를 다섯 과정으로, 세분해서 차례대로 살펴보자.
①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맹인에게 손을 대기를 구했다. 그들의 간구에 응답해서, 맹인의 손을 붙잡아, 인도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긍휼은 무한하다.
② 그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여서, 소란 떨며, 지나치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맹인이 보다 편안한 상태에서,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계속 거부하면, 복음이 거두어질 날도 있다.
③ 맹인의 눈에 침을 뱉었다(프튀오). 그 당시 사람은, 침을 이용해서, 치료하는 법이 많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뱉어 눈에 펴서 발랐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고쳐주겠다는 뜻을 표했다. 믿음을 갖도록 만들어서, 그의 영적 상태까지 치료했다. 예수님은 포용력과, 다양성을 보여줬다.
예수님은 맹인이 오직, 시력만 얻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라서, 안수했다. 또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했다.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서, 맹인은 무엇이 보이는지 쳐다보았다(아나블레포).
지금까지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공경하는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보였다.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맹인이지만, 나무와 사람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나무와 사람은, 수직으로 서있다. 그러나 사람은 나무와는 달리, 걸어 다닌다. 따라서 그는 나무가 아니라, 사람들임을 보았다고 알았다. 그가 어느 정도의 시력을 얻었지만, 아직 온전하지 못했기에, 그에게 치유의 2번째 단계를 행했다.
④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했다(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이 때 예수님은, 그의 눈에 다시 안수했다. 예수님이 2번 안수해서, 병과 장애를 고친 적은, 이번 경우가 유일하다. 아무튼 예수님은, 자신의 양손을, 그의 두 눈에 갖다 댔다.
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물었다. 전지전능한 예수님이,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됨을 물었다. 예수님을 그 맹인을, 불완전한 상태로, 세상 가운데 보내지 않았다. 온전하게 볼 수 있도록, 고쳐주어서 보냈다.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은 언제나 완전하다.
그래서 맹인이 보게 되었을 때,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❶ 그가 쳐다보았다(아나블레포). 이전에 단순하게 보았지만, 이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눈을 들어서, 주님을 보았다.
❷ 주목하여 보았다(디아블레포). 이전에 단순히 쳐다보았지만, 이제는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여 볼 수 있다. 통찰력을 가지고 보았다. 이전에는 눈의 초점이 흐릿했지만, 이제 눈의 초점을, 꿰뚫어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다.
❸ 모든 것을 밝히 보았다(엠블레포). 이제 그는 가까운 것도, 먼 것도 밝히 보게 되었다. 이제 서있는 것도, 걸어 다니는 것도, 밝히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을 걸어 다니는 나무와 같이, 보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3단계로 나누어서, 점진적으로 맹인을 고쳤다.
이제 맹인의 두 눈은, 완전하게 고쳐졌다. 예수님이 그에게 새로운, 두 눈을 창조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인의 두 눈은, 완벽한 시력을 가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상징하는 바가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점진적으로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 가운데로 들어갔다. 마침내, 온전한 생명의 빛을 얻었다.
본문 뒤에 있는 (29)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들은 영적 어둠에서 벗어나서, 밝은 빛으로 들어왔지만, 영적 어둠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갈 것을 말씀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크게 야단맞았다. 예수님은 또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했다(9:31).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9:32).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다가 예수님에게서, 크게 야단맞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기는 했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리스도의 능력은 보았다. 그리스도로서 당해야할 고난은,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로잡힐 때,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뿔뿔이 도망쳤다.
그 후 부활한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주었다. 그제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의 영적수준은 어떤가? 위로의 말씀, 치유의 말씀, 축복의 말씀만을, 듣기 좋아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영적 시력이, 온전하지 못한 미신 신앙이다.
철학적 말씀, 이상적 말씀만을 좋아하는가? 아직은 기껏해야,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는 수준, 철학적 신앙에 불과하다.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밝히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주님으로 보기를 바란다.
3.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는 예수님(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맹인을 고쳤다. 예수님의 은혜로, 그는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기에, 그를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했다. 이렇게 말씀한 의도는, 예수님이 행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같은 경고를 했다(8:30, 9:9). 그러면 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경고를 했나?
① 수많은 권능과 은혜가 베풀어진 지역이지만, 주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회개를 하지 않은 지역으로, 주님께로부터 큰 책망과 저주를 받은 지역이기(마11:20-22) 때문이다. (마11:21-22)을 보면, 예수님은 지옥에서, 벳새다 사람들이 당할 고통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당할 고통보다, 더 클 것이라고 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도시였다. 그 곳에는 이방의 신전이 있었다. 반면에 벳새다는, 유대인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이곳에는 회당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벳새다가 두로와 시돈보다도, 더 큰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도, 다 고쳐 주었다. 이와 같이 놀라운 권능들을 행했지만, 벳새다 사람들은 회개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반면에 (마15:21-22)에,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그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한 후에, 그의 믿음을 칭찬하며, 간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니 심판의 날에, 벳새다가 당할 고통이, 두로와 시돈보다, 더 큰 것은 당연했다. 맹인에게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명하고,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를 떠났다.
② 예수님이 다시, 난처한 입장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그토록 숨기려 했던(1:44, 3:12, 7:36, 8:30) 이유는, 사실 병을 치유 받은 자들의 전파로 인해서,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 정치적 메시아로만 받아들여져, 구속 사역에 방해받음을, 원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한 후, 종종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 후에(1:44),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린 후에(5:43), 귀머거리를 고친 후에(7:36), 예수님은 이와 같이 경고했다. 그들이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더라도,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작 병 고치는 자나, 이적을 행하는 자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로 왔다. 따라서 복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포함되어야 했다. 아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적 때문에 몰려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의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했다.
③ 온전한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은 후, 예수님은 다르게 명했다. 복음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막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명히 명했다.
벳새다에서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잡아주고, 맹인의 두 눈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맹인을 온전하게 고쳐주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한한 긍휼을, 깊이 깨달았다. 반면에 예수님은,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를 떠났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벳새다에 내린 심판의 심각성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한 맹인을 고쳐주었다. 맹인이 고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다.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눈을 만져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도 불쌍히 여기며, 우리의 심령을 계속해서, 어루만져 준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어둠을 물리치며, 우리를 점점 더,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 준다.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빛을, 온전히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 늘 빛 가운데로 행하자. 또한 심판의 심각성을 생각하며, 이제는 모든 어둠의 일들을, 온전히 벗어버리자. 오직 우리의 빛 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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