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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세상에 빛, 예수님(막8:11-13)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07-28
  첨부파일:   세상에 빛인 예수님.hwp(21K)

세상에 빛, 예수님(8:11-13)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8:12) 왔다. 따라서 생명의 빛을 준다(1:4).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다, 빛난 천국에서 영생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해, 어둠 가운데 행하다가, 어두움 가운데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빛과 어둠은, 예수님과 관계에서 결정된다(1:11-12). 예수님 밖에 있으면 어둠이지만(5:8), 안에 있으면 빛이다. 어둠에서 벗어나, 빛이 되는 방법은,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길밖에 없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대적하고, 죽이려 했다. 마음이 악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왔지만, 생명의 빛을 받지 못했다. 그 결과 어둠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둠에 다니다가, 바깥 어두운 곳에, 영원히 던져져야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둠 가운데 있었지만, 어둠에 가운데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생명의 빛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님이 비추는 생명의 빛을, 우리 모두도, 기쁨으로 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다가, 빛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 어둠은 어둠과 어울린다(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방 땅으로 갔다가,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이 사는 지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제자들은 이방 땅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행한 일들을 보며,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기에,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되었다.

예수님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온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힐난하기 위해 나왔다. “힐난하다”(쉬제테오)”(함께) + “제테오”(계획했다). = “함께 캐고, 따져서, 비난하다.”는 말이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비난했고, 시험하였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함께 악의를 품고, 예수님을 대적하러 나왔다. 바리새인들은 어둠가운데 있었다.

어둠의 사람은, 빛인 예수님을 미워했기에, 예수님을 힐난했다. “힐난”(詰難)물을 힐, 어려울 난괜히 트집 잡아, 어렵게 만드는 일이다. 이때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바리새인만 아니라, 사두개인들도 함께 나와, 예수님을 힐난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23)을 보면, 바울이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 이때 자기는, 부활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23:7-8)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있다 함이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공회가 양편으로 나누어졌다.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았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너무 달랐다.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도 완전히 달랐다. 바리새인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서, 정결함을 유지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겼기에, 당연히 자기들의 땅에서, 이방인들을 내쫓아버리기를 바랐다.

반면 사두개인은 현실주의자였다. 그들은 제사장직을 행했다.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질 짐승을 팔며, 성전세로 바쳐질 돈을 바꾸는 일, 등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사두개인들은 로마인들의 권력을, 등에 업을 수밖에 없었고, 로마에 의해 세움을 받은, 헤롯 왕가와도 손을 잡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를 원수같이 여기면서, 서로 미워하며, 다투며, 대적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에는, 그들이 같은 목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빛을 대적하기 위해, 어둠과 어둠이 함께 뭉쳤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원수 같은 사이에도, 얼마든지 한 편이 될 수 있다. 적과의 동침이다. (16: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앞에, 정관사가 하나만 있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가 섞여서, 완전히 하나로 뭉쳤다. 이렇듯이, 어둠은 어둠과 어울린다. 이것이 어둠의, 첫 번째 특징이다.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에게 나왔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끼리끼리 모여서, 하나님의 종과 어떤 미워하는 사람이나, 예수님의 교회를 힐난하는, 어둠의 자리에 앉지 말라.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비추는 생명의 빛을, 환하게 받기를 바란다.

2. 어둠은 점점 더 깊어진다(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했다. 기드온도 표적을 구했다. 히스기야도, 표적을 구했다.

따라서 표적을 구함이, 잘못이 아니다. 그들의 의도가 문제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고,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믿지 않으려고 표적을 구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실히 보여줄,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생트집을 잡았다. 이미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수많은 표적들을 행했다. 각종 병든 사람을 다 고쳐주었다. 더러운 귀신들도 내쫓았다. 떡과 물고기로, 큰 무리를 배불리 먹였다. 죽은 자들도, 다시 살렸다. (3)에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와서, 이와 같이 말했다.

(3:1-2)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다. 그러한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행하는 표적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임을, 이미 인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더 이상의 표적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한, 수많은 표적들을,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나는 표적일 뿐이라고 여겼다.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했다(12:24).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어서, 표적들을 행한다고 보았으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때, 어떤 반응을 보였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의 마음이 너무 완악했기에, 예수님이 마음 아파서, 깊이 탄식하며, 그들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예수님은 어찌하여 너희가, 표적을 구하느냐?”라고 묻지 않았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 세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1:5) 말씀처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 (1:11) 말씀처럼, 빛이신 예수님이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을 배척했다.

(8:38)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예수님은 말씀했다. 음란한 여인은, 자기 남편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다. (9:19)을 보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했다. 예수님이 행한 많은 표적들을 보면서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6: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영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침례요한을, 분별하지 못했다. 메시아가 왔지만,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이 행한 표적의 의미도, 예수님의 가르침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시대의 표적을, 전연 분별하지 못했다.

(23:16)에서, 예수님이 질책한 것처럼, 눈 먼 인도자에 불과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순전하게 전하며, 가르쳐야 한다. 교회는 시국강연을 하는 곳이 아니다. 부자가 되는 비결을 가르치거나, 편안히 살거나,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 먼 인도자라는 질책을, 예수님에게서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믿음 없는 세대에, 더 이상의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예수님은 이미 충분한 표적을 주었다. 침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그들은 예수님에게, 그가 메시아인지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와 같이 대답했다.

(7:22)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밝히 보여주는 표적들이었다.

이런 분명한 표적들을 보면서도, 그 세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으니, 예수님이, 또 다른 표적을 보여준다고,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믿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16)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말씀했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부자가 애원했다. “나사로를 내 형제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예수님의 결론은 이랬다.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이미 충분한 표적들을 행했다. 그 표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이 다른 표적을 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세대에 더 이상,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16:4)에는, 예수님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줄 표적을 말했다. 그것은 요나의 표적이다. 요나가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도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했다.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 곧 부활의 표적을 행했을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다 돌이키고, 예수님을 믿었는가? 아니다. (28:12-13) 말씀처럼, 그들은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다. 이와 같이 그들의 어둠은, 점점 더 깊어만 갈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어둠이 보여주는 두 번째 특징이다. 어둠은 빛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 어둠은 점점 더 깊어갈 수밖에 없다. 어둠의 첫 번째 특징은, 어둠은 어둠과 어울리는 것이다. 어둠의 두 번째 특징은, 어둠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러다 보면, 어둠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가?

3. 어둠은 버림받는다(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그들을 떠났다(앞히에미). “포기하다, 떼어놓다.” 어둠의 세 번째 특징은, 버림을 받게 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힐난하고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떠났다.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그들은 어둠이었다. 그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끝끝내 거부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빛을 비추지 않고, 그들에게서 빛을 거두어버렸다. (1)에 자주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은 그들을 어둠에 내버려 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버렸다. 그래서 이때부터 예수님은, 그들을 신랄하게 정죄하며, 엄하게 심판하는 말씀만을 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기 원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서, 예수님이 주는 생명의 빛을, 계속해서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 버린다. 찬송가 4463절에 이렇게 되어 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우리의 생명은, 헛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거부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우리도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길 수밖에 없고, 어두운데서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다.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돌이켜,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 그래서 그들은,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이 되었다. (6:7) 말씀을 보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 당시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돌이켜서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

그래서 그들도, 어둠에서 벗어나, 빛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어둠에 속하지 말고, 빛에 속하자. 어둠은 결국 버림받게 된다.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계속 머물면, 망할 수밖에 없다. 어둠은 어둠을 부른다. 생명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조명하고, 생명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생명의 예수님께 나오기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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