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내용
•홈  >  말씀과찬양  >  설교내용
  제  목 : 2019년 7월 21일 - 사천 명을 먹인 예수님(막8:1-10)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07-21
  첨부파일:   사천 명을 먹인 예수님.hwp(21K)

사천 명을 먹인 예수님(8:1-10)

 

본문은 72어라는 이적이다. 예수님이 이방 땅에서 행한, 마지막 이적을 기록했다. 갈릴리호수가에 모인 이방인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이적을 행하여, 모두를 배부르게 먹였다. 예수님이 이방 땅에 있는 동안,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기를 원했을까?

한 마디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를 시켰다. 예수님은 이방 땅으로 가서, 이방 여자를 구원했다. 장애인들을 다 고쳐주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배불리 먹여주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임을 깨닫고, 이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했다.

1. 무리를 불쌍히 여긴 예수님(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그 무렵에 예수님은, 이방 땅에서 활동하던 때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각종 장애가 있는 자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앉혔다. 예수님은 그들의 장애를, 온전하게 고쳐주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이렇게 말씀했다.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사흘을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 모인 사람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일전에 벳새다 빈들에, 큰 무리가 모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다.

지금은 남자만 사천 명이었다(15:38). 차이점은 지난 벳새다 빈들에 모인 큰 무리는, 유대인이었다. 반면에, 이번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큰 무리는, 이방인이었다. 이번에도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하면, 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갈릴리 호숫가의 광야에서, 사흘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왔어도, 동이 났을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사흘을 굶는다고, 죽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렇게 굶은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있었.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도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겼다. 예수님은 일전에, 벳새다 빈들에 모인 유대인을, 불쌍히 여겼다.

마찬가지로 이 때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똑같이, 불쌍히 여겼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이방인에게 적대심을 품었다.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면서, 아예 이방인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로 그와 같은 환경에서,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만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도, 똑같이 불쌍히 여겼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주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 때, 예수님은 이방의 무리를 불쌍히 여겼나?

예수님만이 참 생명과, 풍성한 삶을 줄 수 있음을 말한다.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예수님은 그들이 처한, 힘든 상황을 이해했기에,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무리들이 처한 어려운 상태를, 4가지로 설명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나 지났다(2).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광야이기에, 먹을 것이 없었다(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광야는 낮에는 뜨겁고, 밤이면 추웠다. 근처에 사람들이 사는 집이 없었기에,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는, 놀라운 일들을 지켜보느라, 예수님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굶은 채, 집으로 간다면, 그들은 길에서 기진할 것이다(3). 지금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열광하느라고, 허기진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가는 길에, 맥이 다 빠지고 말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형편을, 살피고 있다.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3). 데가볼리는, 열 개의 도시로 이루어졌다. 갈릴리호수에서 가까운 곳도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곳도 있었다. 따라서 멀리서 온 사람들이, 굶고 간다면, 가는 길에 그들은 더욱 기진할 것이다. 예수님의 긍휼은, 제한이 없다. 예수님의 마음은,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다.

예수님은 유대인도 불쌍히 여기고, 이방인도 불쌍히 여긴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나아오면, 예수님은 그의 필요를 알고, 불쌍히 여기고, 그의 필요를 채워준다. 예수님의 긍휼은, 넓이도 무한하고, 깊이도 무한하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서, 한 이방 여인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해주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 또 갈릴리 호숫가에서, 사람들이 데리고 온, 장애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전부 고쳐주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들이 일생 동안 짊어지고 가야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없는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 모두를 배부르게 먹였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까지도, 넉넉하게 공급해주었다. 크고도 영원한 것부터, 일상의 사소한 것까지, 모든 면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우리의 문제를 다 해결해준다.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이다.

2. 무리를 배부르게 한, 능력의 예수님(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이 왜 이렇게 물었는가? 제자들이 벳새다 빈들에서 행한, 예수님의 이적을 잊고 있었는가?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때의 일을 잊어버릴 수 없다. 그들의 질문에서 배부르게를 주목해야 한다. 단순하게 사람들을, 먹이는 일이 아니다. 배부르게 먹이는 일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먹이면, 배부르게 먹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때가 언제였나?

벳새다 빈들에서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이와 같은 대답을 했다. 이 때 제자들이 한 대답의 의도는, 이와 같았다. “주여, 우리는 할 수가 없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곳에 모인 무리가,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예수님이 원하면, 얼마든지 그 곳에 모인 무리를, 배부르게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이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배부르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세상의 구주임을, 밝히 보여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이 몇 개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일곱이라고 했다. 이 때 예수님은, 생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벳새다 빈들에서, 떡과 생선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한 것을 기억했다.

(6-7)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이는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통해서도, 큰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적을 베풀어서, 그들을 배불리 먹였다. 이 때 예수님이 행한 이적을 일곱(7) 과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했다. 벳새다 빈들에,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했다. 그 때는 봄철이어서,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했지만, 이제는 여름철 햇볕에, 잔디가 다 말랐기에, 그냥 땅에 앉게 했다.

떡 일곱 개를 가졌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떡, 일곱 개를 예수님에게 드렸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받아서, 손에 쥐었다. 보잘것없는 것도, 예수님께 드리면, 예수님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다시 안겨준다.

축사했다(유카리스테-사스). 이는 예수님이, 떡 일곱 개를, 축복기도 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그 떡을 먹는 무리를, 축복했다는 뜻도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언제나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떡을 떼었다. 이는 식사를 알리는 신호다. 우리나라도 어른이 숟가락을 들면, 그 때부터 온 가족의 식사가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이때도, 예수님이 떡을 뗌으로, 드디어 식사가 시작된다.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주게 했다. 떼어 나눌 때, 더 큰 은혜를 입게 됨을 보여주었다.

떡을 제자들에게 주었다. 이때의 주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이다. 계속 반복해서 주었다. 그러니까 이 때, 이적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떡을 창조했다. 그래서 무리가 배부르기까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주었다.

준 떡을 제자들은 무리에게, 나누어주게 했다. 예수님은 전능하기에,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귀하게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도 귀하게 쓰기 원한다.

생선도 그와 같이 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고, “축복하셨다”(율로게사스)했다. 그러나 그 의미도,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무리가 떡과 생선을 곁들여서 맛있게 먹도록 했다. 감사할 때, 이적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벳새다 빈들에서, 유대인들을 위해, 떡과 생선을 창조했다. 또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이방인들을 위해, 떡과 생선을 창조했다. 이와 같은 일은, 예수님만이 할 수가 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령을 채워준다.

3. 무리를 흩어 보낸 예수님(8-9).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사흘이나 광야에서 있었기에, 사람들은 매우 허기졌을 것이다.

이 때 허기를 면할 정도가 아니라, 모두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의 긍휼은 항상 풍성하며, 예수님의 역사는, 언제나 온전하다. 다 배불리 먹고 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남은 조각을 거두었다. 일전에 벳새다 빈들에서, 예수님은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지 말라고 했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이번에도 남은 조각을, 버리지 않고, 다 거두었다. 그런데 벳새다 빈들에서는 남은 조각은, 열두 바구니였다. 이때 남은 조각은, 일곱 광주리다. 어디가 더 많이 남았나? 일곱 광주리이다. 왜 그런가? 바구니와 광주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바구니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그 용량이 광주리보다 적다. 반면에 광주리는, 이방인이 들고 다니는 것으로, 유대인의 바구니보다는, 그 속에 들어가는 양이 훨씬 더 많다. (9:25)을 보면, 바울이 광주리에 담겨, 다메섹을 탈출했다. 그러니까 이방인의 광주리는,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크다.

따라서 이번에 거둔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는 저번에 거둔,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보다도, 더 많은 양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미 사흘이나 광야에서 있었다. 따라서 저번보다, 더 많은 양의 음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배부르게 먹게 하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나 거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며칠 동안 먹을 양식을, 한꺼번에 공급하지는 않았다. 오직 일용할 양식만 공급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할 수가 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 때 모인 무리의 수는, 약 사천 명이었다. 물론 그 수에는, 여자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다(15:38).

전체의 수는, 일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 엄청난 양의 떡과 생선이,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9-10)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그 곳에 모인 무리를, 흩어 보냈다. 그들은 함께, 광야에서 사흘을 보냈다. 그 동안 예수님은 그들이 데리고 온 장애자들을, 다 고쳐주었다. 또한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기진하지 않도록, 예수님은 그들을, 배불리 먹였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말씀했을 것이다.

영 육간에, 그들의 필요를 다 채워준 후에, 그들을 흩어 보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서편에 있는, 달마누다 지방으로 갔다. 그 곳은 갈릴리 게네사렛 땅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 곳은 마가단지경이라고도 불렸다(15:39).

아무튼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동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방 지역을 두루 다녔다가, 이제 다시 갈릴리로 되돌아왔다. 그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방 땅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예수님이 이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기에, 그 이후 그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우리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또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온,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심정을 가진 우리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날개 밑에 거하자. 우리도 주님처럼,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 바란다. 주님은 주님을 찾는 사람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주님 앞에 나오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기 바란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를 받았으니,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예수님의 향기를 만방에 널리 퍼뜨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

  이전글 : 2019년 7월 14일 - 귀먹고 말더듬는 자를 고친 예수님(막7:31-37)
  다음글 : 세상에 빛, 예수님(막8:11-13)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