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7월 14일 - 귀먹고 말더듬는 자를 고친 예수님(막7:31-3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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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먹고 말더듬는 자를 고친 예수님(막7:31-37)
예수님이 계신 곳에, 사람들은 항상, 여러 종류의 장애자들을 데리고 왔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다 고쳐주었다. 그 가운데, 귀 먹고, 말도 더듬는 자를 고친 사실만을, 대표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귀도 열어서, 말씀을 듣고, 혀도 풀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 갈릴리 호수에 이른 예수님(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예수님은 두로(바위)에서 나와, 다른 해변 도시 시돈(낚시질하다)으로 갔다. 그 후에, 데가볼리로 갔다.
데가볼리는 “데가”는 데카(열)을 말하고, “볼리”는 폴리스(도시)다. 그러니까 “데가볼리”는, 말 그대로 “열 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곳이며, 갈릴리 바다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데가볼리는 수리아의 총독이 통치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지역이며, 데가볼리도 이방 지역이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그들의 신들, 바알과 아세라와 아스다롯을 섬겼던 것처럼, 데가볼리 사람들은, 헬라의 신들, 곧 제우스와 헤르메스와 아데미 등을 섬겼다. 예수님이 시돈이나 데가볼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이적들을 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성경이 그런 기록들을, 생략했을 수 있다(요21:25).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복음을 전해야 했기에,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다. 이제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해서,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 (마15장)에, 이때의 상황이, 좀 더 자세히 설명되었다.
(15: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큰 무리가 각종 장애가 있는 자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앉혔다. 예수님은 장애자들을 다 고쳐주었다. 예수님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의 친구가 되었다.
(15: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마9:8)께 영광을 돌렸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왜냐하면 이들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데가볼리 사람들은, 헬라의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헬라의 신들이, 놀라운 권능을 행한 적이 없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눈앞에서, 놀라운 권능들을 행했다. 이방의 신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이미 데가볼리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직접 갈릴리로 와서,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주님이다.
뿐만 아니라,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서, 예수님이 그에게 행하신 큰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했다(막5:20). 따라서 예수님의 소문은, 데가볼리 지방에도 널리 퍼져있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그 곳으로 오자, 데가볼리 사람들은 각종 장애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2. 귀머거리를 고친 예수님(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귀가 먹었고 말을 더듬는, 2중장애를 사람이 나온다.
아마 어릴 때, 심한 병이나 사고로, 듣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 했던 말을, 어느 정도 기억했지만, 정작 말을 하려면 더듬었다.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었고,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불행한가?
그러던 중에,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사람들은 그를 예수님의 발 앞에 앉히고, 예수님이 그에게 안수해서, 그의 장애를 고쳐주기를 간구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되, 다소 특이한 방법으로, 그가 가진 장애를 고쳐주었다.
(33-34)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님이 이 장애인을 고치기 위하여 행한 일들을, 7가지로 상세하게 설명했다.
①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났다. 지금까지 그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소홀히 여기지 않고, 중요한 사람처럼 따로 만나주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면서, 깊은 연민과 특별한 관심을 표현했다.
②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었다. 그의 양 귀가 먹었음을 알고, 예수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음으로, 그의 양 귀를 열어주겠다는 뜻을, 그에게 전했다.
③ 예수님은 침을 뱉었다. 이는 자상한 표현이었다. 당시에는 사람의 침을 이용해서, 치료하는 법들이 많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묻혀, 그의 장애를, 고쳐주겠다는 뜻을 그에게 전했다.
④ 예수님은 그의 혀에, 손을 대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도, 장애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침이 묻은 손가락을, 그의 혀에 대었다. 이로써 그 사람이 가진, 언어 장애를 고쳐주겠다는 뜻을 표했다.
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의 능력이, 주술적인 행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밝혔다.
⑥ 예수님은 탄식했다. 예수님은 그의 슬픔과 아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꼈다. 귀 먹은 사람은 시각이 고도로, 발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이, 탄식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마음 아파하는 사랑의 모습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⑦ 예수님은 “에바다”라고 했다.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귀와 입이 열리라고 명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 사람이 온전하게 들으며, 온전하게 말을 하도록 명했다.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님은 그저 “에바다”라고 한 마디, 말씀만 했을 뿐이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의 귀가 열렸다. 그래서 전혀 듣지 못하던 사람이, 온전하게 듣게 되었다.
귀머거리가 듣게 된 것만 해도, 놀라운 이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이적은, 그 사람의 혀가 풀려서, 그의 말이 분명해졌다. 정상인의 말을 하게 되었다. 들을 수 있다는 것과,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우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들의 말을, 전혀 할 수 없다. 그런데 본문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더듬던 말을, 분명하게 했다. 남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남들도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저것은 하늘이고, 이것은 땅이다”라고 일러주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문장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정상인의 언어 능력을, 순간적으로 획득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이적인가? 마치 오순절에 방언의 역사와 같이, 온전히 말하고 듣는,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님이 “열리라.”고 말하자,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온전하게 듣게 되고, 온전하게 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이적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3. 사람들에게 경고한 예수님(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전혀 들을 수 없던 사람이, 온전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듣고 싶은 것들이 많았겠는가?
제대로 말할 수 없던 사람이, 온전히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했다. 예수님의 경고가, 그에게는 아주 고민스러웠을 것이다. 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경고했나? 한 마디로 복음의 내용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한 일을 전파하더라도, 기껏해야 예수님이 병을 고친 일이나, 큰 이적을 행한 일 정도를, 전파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진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와 주님으로 오셨다. 성경은 주, 예수를 강조한다.
(행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따라서 복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포함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직은 예수님이 행한 일을, 전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뒤에는 달랐다. 그 때는 복음의 내용이, 완성되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은, 비로소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막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했다. (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그런데 본문 (36下)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1장)을 보면, 나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도, 역시 그러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예수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한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행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자기 생각대로 판단해서 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요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했다, 참 제자의 모습은, 예수님이 명하는 대로 순종하며, 행하는 데서 나타난다.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 우리는 복음의 일부만을 전하지 말고, 온전한 복음,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바르게 전해야 한다.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이유가 밝혀진다. 심히 놀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한 이적을 보면서, 너무나도 감탄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서 한 말은 2가지다. ①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잘했다고 감탄했다. (마15: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때 예수님은, 벙어리를 말하게 하고, 장애인을 온전하게 했다. 또 예수님은,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맹인을 보게 했다.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은 완벽했다. 예수님은 모든 장애인을, 바로 그 자리에서, 완전하게 고쳐주었다. 예수님이 행한 이적이, 놀랍고도 완벽함을 보면서, 모든 것을 잘했다고 감탄했다.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이적을 행했는가? “에바다, 곧 열리라.”고 말씀했듯이,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적들을 행했다. 귀머거리에게 행한, 여러 행동들은, 듣지 못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애정 어린 관심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창1장)을 보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빛이 있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니까, 빛이 있었고, 그 빛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천지창조가 다 끝난 후에,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을 보니까,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완벽하게 창조한 것처럼, 예수님도 말씀으로, 사람의 기관들을, 완벽하게 창조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눈과, 새로운 다리, 새로운 청각기관과, 새로운 발성기관을 온전히 창조했다. 그래서 (요1:1-3),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며,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으로, 창조의 이적을 행했다. 즉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②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원문에는 못 듣는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이 복수형이다. 그 곳에는, 귀머거리들과 벙어리들이 여럿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곳에는, 절름발이들과 맹인들과, 다른 장애인들도 역시 있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고침 받은 귀머거리 한 사람만, 대표로 상세히 말씀했다. (사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처럼 예수님은, 장애인들을 온전히 고쳤다. 이로써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해졌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온 그리스도이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해결하고, 부활했다.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행하는, 창조의 역사를 날마다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어야, 진정한 복음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이런 은혜를 널리 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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