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7월 7일 - 세상의 구주인 예수님(막7:24-30)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7-07 |
첨부파일: 세상의 구주인 예수님.hwp(21K) |
세상의 구주인 예수님(막7:24-30)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소테르 : 요4:42, 요일4:14)다. 구원자라는 말이다. 유대인의 구주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다.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할 것을, 구약성경에서 분명히 밝혔다. (사42:6中)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메시아가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고 했다.
(사49:6下)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몹시 경멸했다.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며, 이방인의 몸에 닿으면 자신들이 더러워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는 아예 신체접촉 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지만(요4:22), 유대인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을 통해, 모든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했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자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1. 이방 지역으로 간 예수님(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지금까지 예수님은, 갈릴리의 여러 촌을 두루 다니며 사역했다.
예수님은 이제 이방지역, 두로 지방으로 갔다. 두로는 지중해의 해변 도시로,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약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두로는, 그 위의 다른 해변 도시, 시돈과 더불어, 베니게에 속했다. 베니게, 곧 페니키아는, 지금 레바논을 말한다.
(7:31)을 보면, 예수님은 두로에서, 시돈으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데가볼리 지방으로 갔다. 그 후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오른편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이방 땅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정도, 이방지역에서 지냈을 것이다.
본문처럼,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이방 두로 지방으로 갔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먼 이방 땅으로 갔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나? 아니다. 예수님이 두로나 시돈에서, 또 데가볼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없다. 두로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했다.
이 때 이방 땅으로 들어간, 이유와 목적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 곳에서 사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 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이와 같은 시도를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한적한 곳, 벳새다 빈들로 갔다.
그러나 벳새다 빈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오병이어로 모두 배불리 먹여주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게네사렛 땅으로 가자, 그 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모든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고쳐주었다.
이렇듯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고자 했다. 이방인 나라인, 로마의 통치에서, 또한 이방인인, 분봉 왕 헤롯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랐다.
이두매 사람, 곧 에돔의 피가 흐르는 분봉 왕 헤롯은, 침례 요한을 목을 베어 죽였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침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해서, 예수님마저 죽이기를 원했다. 또 그 당시 유대교의 주축을 이루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여 없앨 수 있는, 빌미를 찾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종교를 정면으로 배격했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예수님은, 따로 제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했기에, 제자들을 데리고, 이방 땅으로 갔다.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했지만, 숨길 수는 없었다. 유대인들이 두로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할 일이다. (3: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예수님의 소문은 이미, 두로 지방에도 널리 퍼져있었다.
본문의 여자도, 그 때 갔던 두로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 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놀라운 능력도, 보았을 것이다. (마15:22)처럼,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이 자기 지방으로 왔다는 소문을 듣고, 얼른 찾아왔을 것이다.
2. 이방 여자를 용납한 예수님(25-26).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 여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말 그대로, 그 여자의 어린 딸에게 온갖 더럽고, 악한 짓을 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예수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린 적이 있었다(막5:22).
회당장 야이로는, 유대인이고, 그 여자는 헬라인이다. 알렉산더가 세상을 제패한 이래, 헬라 문화가 온 세계에, 꽃을 피웠기에, 성경은 종종 이방인을, 헬라인으로 표현한다. 그 예로,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롬1:16下)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했다.
헬라인은 이방인을 말한다. 성경에 유대인과 헬라인을, 서로 대조해서 사용될 때, 헬라인은 유대인을 제외한, 전체 이방인을 말한다. 그 여자는 이방인이었다. 그 중애 수로보니게 족속이다. 수로보니게는, 수로와 보니게를 합친 단어다. “수로”는 수리아를 의미하고, “보니게”는 베니게를 의미한다.
두로는 베니게에 속한 도시다. 그런데 로마가, 베니게를 점령하고 난 뒤, 로마는 베니게를 보다 넓은 지역인, 수리아에 속하게 했다. 그래서 수로보니게라는 말이 생겨났다. (마15:22)은, 그 여자를 가나안 여자라고 불렀다.
유대인 회당장 야이로도, 헬라인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자도,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세상의 구주이기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예수님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경배하면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기를 간구했다.
그 여자는 자기 족속이, 대대로 믿어온 신들,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에게, 간구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과거의 헛된 우상들을 다 버리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곧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경배하며 간구했다. “간구하다”는 미완료형이다.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계속 반복하며 간구했다.
계속되는 간구에도, 예수님이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마15:23).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여자에게 대답해서,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대답했다. 그 여자의 계속되는 간구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는가?
이는 예수님에게,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며, 능력이 없었기 때문도 아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그 여자의 믿음을 견고히 하려고, 그를 시험했다.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먼저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에,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했다. 예수님이 그 여자의 간구를 매정하게 거절한 것처럼, 여길 수 있다. 또 비유 가운데 “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경멸하며 부르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방인들은 개와 같이, 더럽고 부정하다고 여겼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간구할 때,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더니, 예수님의 대답 속에 “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이방인 여자는, 모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구원할 의향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려고, 계속 시험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었다.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었지만, 빨리 베다니로 가서, 고쳐주지 않았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계속 미루었다.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함이었다(요11:15). 마찬가지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듯했지만, 결국 다 떠나갔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서,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을, 가르쳐주려 했다. 물론 예수님의 대답은, 매정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방인의 구원을 배제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먼저”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원의 순서를 말한다.
구원이 먼저는 유대인에게다. 그리고 난 뒤에 헬라인, 이방인이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했다.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수로보니게 여자의 대답은, 정말 놀랍다. “아니, 유대인이면 다예요? 당신들은 뭐가 그리 잘 났다고, 우리를 더러운 개처럼 취급하나요?”그 여자는 입을 삐쭉거리면서,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그 여자는 매우 신앙적인 대답을 하였다.
“주여 옳소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이제는 더 이상, 바알이나 아세라, 아스다롯이, 그의 주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변함없는 그의 주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조금도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 동안, 더러운 개와 같이, 더러운 우상들을 섬긴, 이방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비유를, 그대로 받았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께 간구했다.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달리, 여자는 자신을 낮추면서, 오직 예수님의 긍휼을 구할 따름이었다. 이 때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올바르게 이해했다. 상아래 있는 개들이 먹는, 부스러기라고 해서, 상에 앉은 아이들이 먹는 것과, 종류가 다르지는 않다.
똑같은 상에 차려졌다. 똑같은 음식, 똑같은 떡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 똑같다. 믿음의 대상도 같다. 구원의 길도 같다. 예수님 이외의, 다른 이로써는 구원받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이해했기에,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계속 간구했다.
3. 이방 여자를 구원한 예수님(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의 말을 기뻐했다. (마15:28)에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여자가 큰 믿음의 말을 한 것을, 기뻐했다. 믿음이 크다 작다는 것은, 상대적인 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했지만, 종종 그들에게, 믿음이 작다고 나무랐다.
마땅히 큰 믿음을 가져야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 믿음이 작다는 책망을 받았다. 반면 수로보니게 여자는 이방인이다. 그는 성경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도 없었다. 주변에는 우상들만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기뻐하는, 신앙적인 말을 해서, 믿음이 크다는, 칭찬을 받았다.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이제 더 이상, 바알이나 아세라나, 아스다롯이, 주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만 그의 주가 되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롬10:9-1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교만하게 자기의 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겸손하게,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그리고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긍휼을 구할 뿐이었다. 또한 믿음이 확고했다. 예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냉정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계속 예수님께 간구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 예수님이 심한 듯 말씀했지만,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자존심이다. 그냥 한번 웃어주면, 모두 즐겁고 좋을 텐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끝없는 분쟁에 말려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존심 때문이다. 좋았던 인간관계가, 순간에 깨지는 것도, 자존심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특히 부부간에는, 정말 자존심 따위는, 내세울 처지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어렵게 될 때가 많다. 어쩌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내뱉은 말을, 자존심 내세우느라 “수습”하지 못하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다. “미안해. 내가 참 바보야!” 그러면 될 것을, 그렇게 못한다.
태어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와 같이 “처음으로” 돌아가면 된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 되는 것이 “자존심”이다. 주님 앞에 자존심을 버려야, 구할 수 있다. 자존심을 넘어가야, 올바른 믿음이 될 수 있다. 자존심을 넘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자, 순종하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수로보니게 여자는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을 믿었다. 겸손히 예수님만 의지했다. 견고한 믿음이 승리한다. 이와 같은 믿음을 보고,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했다.
또한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도 들어주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구하는 것을 받았다. 찾는 것을 찾아내었고, 두드린 것이 열렸다.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에 돌아갔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순종했다.
자기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워있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귀신이 그의 딸에게서 나갔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다. 시간과 공간도 초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예수님이 가지 않았지만, 그 아이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완전히 내쫓아주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다. 수로보니게 여자를 구원한 예수님은, 나도 구원했다.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한 예수님은, 나의 믿음도 견고하게 한다. 그의 간구를 들어준 예수님은, 나의 간구도 들어준다. 여자가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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