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6월 23일 -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1-9)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6-23 |
첨부파일: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hwp(21K) |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1-9)
먼저 “보니 엠”의 “Rivers of Babylon”(https://www.youtube.com/watch?v=UB4OKEYqCCc)을 들어보자. 디스코 풍의 신나는 노래다.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모르고, 리듬에 맞추어서, 그냥 신나게 불렀다. 그런데 이 노래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 노예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부른 노래였다.
노예 복장을 하고, 디스코 풍으로,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왜 그럴까? 회개가 있고, 기다림이 있는 슬픔은, 희망이 있다. 소망이 있는 고난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부른 노래다. 6월은 현충일과, 6.25 사변일이 있어서,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국경은 없지만, 조국과 나라는 있다. 우리는 6.25를 맞이하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성경적인 애국을 생각해야 한다. 애국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애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을 한다. 성경적인 애국은 무엇일까?
1. 나라를 생각하며 우는 것이다(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망했고, 포로로 끌려간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성전을 잃었으며, 언어와 자유를 상실했다.
바벨론의 정복자들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와, 바벨론 강변에서, 가혹한 일들을 시켰다. 바벨론은 흑암이었고, 군사들의 채찍과, 고함 소리만 있었다.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처지를 생각하니 너무 안타까웠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고, 성전은 불타 없어졌기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울었다. 느헤미야는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듣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울었다(느1:4). 예레미야 선지자도, 예수님도, 조국을 위해 슬퍼하며 울었다.
느헤미야는 조국과, 동족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단순히 울지만 있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기도했다. (느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의 울며 기도했는데. 그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였고, 민족의 회복을 위한 기도였다.
우리나라도 6.25 전쟁 때, IMF와 같은 경제적인 위기 때,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교회에서, 골방에서, 산에서, 토굴에서, 기도원에서, 밤을 새우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무엘처럼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황폐하게 된, 현실을 보고서 울었다. (2-3)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살 때, 바벨론 강변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았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수금을 타면서, 흥을 돋울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울한 마음으로,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놓고, 처량한 보습으로 앉아 있었다.
포로가 된 그들은, 마치 강변에 심겨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같았다. 환난의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암울한 현실을 보고, 기뻐할 수 없었다. 더 안타까운 일은, 바벨론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유대 왕의 두 눈을 뽑은 채로, 사로 잡아갔고,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갈 때, 허리와 목에 줄로 묶어서 짐승처럼 끌고 갔다.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는데, 바벨론 사람들은, 유대 음악가들에게, 연주하도록 요청했다. 과거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복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마음껏 경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다. 익은 곡식을 풍성히 거두고, 기쁨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 성전을 무너뜨리고, 조국을 짓밟고,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기쁜 연주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바벨론 사람들을 ① “우리를 사로잡은 자” ②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라고 불렀다. 바벨론 사람들은, 피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굶주린 이리처럼, 유대와 유대 백성들을, 짓밟고 탈취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부르라고 했다.
시온의 노래는, 신성한 노래,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사용된 종교음악인데, 바벨론 사람들은, 유대인을 조롱하기 위해, 그들에게 거룩한 노래를 연주하도록 요구했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유대 음악가들은, 도저히 거룩한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인데, 하나님을 조롱하기 위해, 연주하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자신들의 죄로 인해,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음악은,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거룩한 노래를, 결단코 이방인 앞에서, 부르기를 거부했다.
2. 잘못을 돌아보는 아픔(5-6).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이방인의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잊었던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잊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따라서 바벨론 관리들 앞에서, 거룩한 시온의 노래를 부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이제 다시, 세상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을 잊거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잊고, 거룩한 백성들의 의무를 저버렸다. 그러나 포로생활을 통해, 다시는 세상에 취해서, 거룩한 성을 잊지 않기로 맹세했다.
시온에 평안히, 거할 때에는, 시온과 성전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거룩한 성과 성전을 잃고 난 후에, 비로소 시온과 성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전에, 시온에 있는 성전에서, 마음껏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지 못했다.
악기를 연주하며, 마음껏 거룩한 노래를 부를 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거룩한 성과 성전을 떠나, 이방인의 땅에 살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시온과 성전에, 나라와 교회를 대입해서 읽어보라. 나라와 교회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방인의 땅에 살면서, 시온을 잊고, 이방 문화에 동화됨을, 배교행위로 간주했다. 이제는 하나님과 시온에 대해, 일편단심으로 충성하기로 했다. 바벨론의 화려함에 빠져,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그의 손의 재주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이방 땅에서,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서약했다.
자신이 시온을 잊는다면, 재주를 잃고, 혀가 입천장에 붙는, 불구자가 되어도 좋다고 선언했다. 비록 바벨론에 살았지만, 거룩한 성 시온을 기억하며, 살기를 원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 일본도 우리 국민에게, 신사 참배와, 일본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어기면서, 그들의 요구를 따랐다. 그러나 소수의 애국지사들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들은 일본 신을 찬양하고, 일본에게 충성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더 원했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예수님의 성화에 침을 뱉고,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는 말도 했다. 이러한 아픔이 있었는데, 잊고 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인가! 우리도 지난날, 총과 탱크로 쳐들어와, 죽였던 비극을 잊고 산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의 역사 앞에, 눈물 지울 수밖에 없다. 역사를 잊으면 반복된다.
애국은 다시는, 이런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가 중요하다. 따라서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시온을 기억하고, 울어야 했던 이유는, 하님을 반역하고, 패역한 죄 값으로 받은, 서러움을 자복하며, 회개하는 기도의 눈물이었다.
조국을 생각하며, 울며 기도해야 했던 것이다. 회개의 운동이, 진정으로 나라를 구원하는 운동이다. 회개하지 않는 백성은 망한다. 사울 왕이 회개 못하고 망했다. 헤롯도 회개하지 못하고 죽었다. 바로도 회개하지 못하고 망했다. 가룟 유다는 회개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는 회개하여, 믿음의 사도가 되었다. 개인도 국가도,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회개하는 길만이, 이 민족이 사는 길이다. 회개운동은 이 민족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영성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애국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거울을 봐야, 얼굴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말씀 앞에 서야, 자신의 왜곡된 인생과 생활을, 교정할 수 있다. 말씀을 따르는 자라야, 바른 가치관을 남길 수 있다. 잘못된 모습을 보아야, 죄를 회개할 수 있다. 6.25의 아픔을 잊으면, 우리는 망한다.
3. 하나님이 대신해서 갚아준다(7-9).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유대를 멸망시킨 두 나라, 즉 에돔과 바벨론에 대해, 보복을 선언하고 있다. 오바댜를 보면, 이스라엘의 형제의 나라, 에돔이 한 일이 나온다. 에돔은 바벨론이 유대를 침략했을 때에, 그들을 돕지 않았다.
오히려 바벨론 편에 서서, 유대의 멸망을 도왔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예루살렘이 심판 받던 날에, 에돔이 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형제 나라인 에돔이, 유대의 멸망을 슬퍼 하기는 커녕, 기뻐한 일은 악한 일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짓밟히던 날에, “그 성의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고 외쳤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해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기를 원했다. 야곱과 에서는, 한 형제였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일로 인해, 오랫동안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에서의 후예 에돔인들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죄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갚아주겠다고 했다. 자기를 짓밟은 바벨론도 미웠지만, 형제의 멸망을 기뻐한, 에돔의 행위에, 더욱 배신감을 느꼈다. 에돔인은 유대가 약해진 틈을 타서,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물건을 약탈했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쫓아가서 죽였다(옵1:11-14).
에돔인들은 유대 나라가 침략 받자, 그들을 세상에서 완전히, 말살시키려고 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께, 에돔의 악한 행위를 기억하고, 약속한대로 그들의 악한 행위를, 갚아 달라고 했다. 하나님은 형제를 배신하고, 원수의 편에 서는 일을, 가증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면 받아주지만,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는다면, 원수가 된다. 아무리 김원봉이, 애국지사로 싸웠다고 하더라도, 이북으로 도망가, 남침하는데 앞장선 자가, 어떻게 유공자가 될 수 있는가?
성도들은, 원수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남이 어려움을 당할 때,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직접 유대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기원하였다.
바벨론을 “너 멸망할 딸 바벨론”이라 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한, 잔인한 행동으로 인해 멸망할 것을 알았다. 바벨론이 이웃 나라에게 행한 그대로, 그들에게 갚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바벨론은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고, 무참히 짓밟았다. 재산을 약탈했으며, 성과 성전을 파괴했다.
그러므로 바벨론을 향해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선언했다. 바벨론 군사들은, 나라들을 파괴하고, 부모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바위 위에 메어쳐서 죽였다.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하나님이 보았기에. 그들이 행한 그대로, 갚아 줄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나라를 사용해서, 바벨론을 심판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군가를 세워서 바벨론의 악행을 갚아줄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역사를 보면, 바벨론을 멸망시킨 나라는 페르시아였다. 그때에 바벨론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악행에 대해 보응을 받았다.
하나님은 유대인이 범죄 할 때,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바벨론을 사용했다. 그러나 바벨론이 악행을 저지르자, 하나님은 그들도, 다른 나라들을 통해서, 엄히 심판했다. 원수를 내가 갚으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신다. 내가 갚으려고 하면, 또 다른 원수들을 낳게 된다.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정복되었던,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고,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시켰다.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하나님이 이 나라, 이 땅을 지켜주고, 우리 민족의 가슴에,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고, 은혜의 강물이 흐르도록, 지금은 기도할 때다. 그래서 다시는 이 땅이, 범죄로 타락하여, 결국 전쟁에 망해, 울부짖는 일이나, 피 흘리는 일이나, 아무도 돌볼 수 없는 시체가, 들판이나 길바닥에 뒹구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자유를, 이제 우리는, 조국과 자유를 잘 지켜내야 한다. 아름다운 조국강산과 아름다운 문화를 멋있게 가꾸어서, 후손들에게 전수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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