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도 6월 16일 - 침례를 받자(마3:13-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6-16 |
첨부파일: 침례를 받자 (2).hwp(21K) |
침례를 받자(마3:13-17)
예수님이 침례를 받았음을, 4복음서에 다 기록했다(마3:13-17, 막1:1-8, 눅3:1-18, 요1:19-28). 침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밝혀주는 말씀이다. 유언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침례를 베풀라고, 유언을 남겼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제자인데, 제자가 된 증거로, 침례를 받으라 했다. 침례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신자들의 첫 순종이다.
침례가 너무도 중요하기에, 신자는 받아야 한다. 동로마의 정교회는, 지금도 침례를 베풀고, 서로마의 천주교는 침례를 ‘세례’로 바꾸고, 세례를 받음(領洗, 가장 요긴한 세례)라 하는데, 이는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며, 중생을 주입시키고 보존한다.”고 말한다.
서로마는 미신적 수단으로 바꾸고, 머리에 물을 붓거나 뿌리는, 이방종교 형태로 바꿨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약 500년이 되는데, 아직도 침례를 행하지 않고, 세례를 행하는 천주교회의, 잘못된 구습을 따르는 교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세례와 침례는, 형식만 다를 뿐, 내용이 같다고 말한다.
1. 침례(浸禮)와 세례(洗禮)는 같은가?
(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말씀(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세례는 머리에 물을 뿌린다. 물을 뿌림은(ㅎ란티스모스, ㅎ란티조)다(히9:13; 19, 21-22). 침례는 몸이 물에 완전히 잠긴다. 물에 잠김은(밮티스마, 밮티조)다. 밮티조는 밮토에서 파생됐는데, ‘옷감을 염색하기 위해서 잠근다. 하나 되다, 멸망시키다’라는 뜻이다.
원문에서 예수님은 (밥티존테스)“침례를 베풀라”고 말씀했다. 따라서 한글성경에, 세례를 바르게 번역하려면, 침례로 번역해야 한다. 중국과 한국어 성경만 세례이고, 나머지는 침례다. 일본은 ‘밮트스마’가 그대로 사용되어 있고, 영어성경도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뱊티즘(baptism)이라고 했다.
(2) 예수님도 침례를 받았다(13-14).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6上)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라고 했다. 예수님은 침례(밥티스이스)받았다. 유대인은 지금도 물속에 잠기는 침례의식을 하는데, 이 의식을 (미크베)라고 하며, (카바)라는 말에서 왔다. “함께 묶는다. …의 도움을 기대하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로 ‘하나가 됨, 소망, 연합’이 된다.
유대인들은 물이 안 닫는 곳이 없도록, 손가락도 벌리고, 겨드랑이도 붙이지도 않고, 완전히 잠겼다가 나온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다. 예수님은 침례를 소중히 여겼고, 마지막 유언 지상명령에도, 침례를 주라고 했다. 사도들도 침례를 강조했다.
(행1:21-22) 초대교회는 가룟 유다 대신, 사도를 뽑는 조건으로, 침례받은 자라야 했다. 지금도 그리스 정교회(Orthodox, 전통, 정통)는 침례만 인정한다. (행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침례 받을 때, 믿는 자, 제자로 인정했다. 교회 일원이 된다. 따라서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침례를 받아야 한다. 퀘이커교도나 구세군은, 침례를 포기한다.
2. 세례와 침례의 내용적 차이
어떤 부분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세례의 ‘洗’자는 씻을 세자다. ‘죄에서 깨끗이 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해, 물을 뿌린다(기독교강요).
그러나 침례의 “浸”은 잠기어 스며들어, 하나 됨이다, 연합의 뜻이다. 이를, 예수님께 대입하면,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로, 죄를 인정하고 죄에서 돌아서겠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죄인에게 필요한 의식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를 씻는 세례를 받았다면, 예수님도 죄가 있는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단이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할 때,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때 예수님은 (15)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했다. 그래서 요한이 허락하고,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침례를 받았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의를 이룬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침례를 통해서 잘 설명된다.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 되어, 우리 죄를 짊어진 사건이, 침례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이튿날 나오자, 요한은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구약은 우리 죄를 짊어진 속죄제물을, 어린양이라고 했다. ‘어린양’(암노스)은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제물이다.
구약 시대에는 죄진 사람이 어린양에게, 자기 죄를 전가시켜(옮기게) 하고, 그 양을 죽였다. 요한은 그 제물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포했다. 예수님은 원래 죄가 없으신 분인데, 이렇게 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침례를 받았다. 인간으로 와서, 인간과 하나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졌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이처럼 대속물이 되려고, 침례를 받았다. 우리의 모든 죄가, 그냥 용서받은 것이 아니다. 속죄양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음으로, 우리와 연합되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침례는 복음의 핵심내용을 잘 보여준다.
(롬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침례는 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물속에 들어가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물속에서 올라올 때,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부활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침례는 복음을, 확실히 몸으로 체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세례가 아니라, 침례를 써야만 마땅하고, 그렇게 행해야만 한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고, 죽고, 부활함으로, 우리의 죄를 청산했음을 믿는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사랑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침례를 받아야 한다. 신자의 침례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원리다. 그리스도께 연합함과(고전12:13), 순종함을 상징한다. 그러니 침례 받는 시간이, 얼마나 복된 시간인가? 침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침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3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① 하늘이 열리고 ②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그 위에 임했다. ③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을 아들로 인정했다(16-17).
예수님이 침례를 받았을 때, 구속을 위한 길이 열렸기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인 예수님이, 인간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3. 침례가 왜 세례로 바꿨는가?
성경은 침례를 말하고, 예수님도 침례를 받았다. 초대교회도 침례만 베풀었다. 2C에 사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자,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하여,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가 나타났다.
로마가톨릭의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고, 그 다음,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대조하기에, 믿는 사람은,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막1:4) “죄사함을 받게 하는 침례”라 했기에, 죄사함을 침례가 준다고 생각해서, 침례를 받지 못하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잘못된 가르침으로, 침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침례를 꼭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이나 병자들에게는, 침례를 베풀기 곤란해서, 2세기 디다케(12 사도들의 교훈서)를 보면, 침례를 실시할 수 없는 경우, 물을 부으라고 해서, 침례를 할 수 없을 때, 다른 방법을 가르쳤다. 3C의 씨프리안은, 죄를 씻는 것은, 물의 양이 아니니, 세례도 좋다고 하며, 세례를 허용했다.
그러나 8세기까지 교회들은, 주로 침례를 실시했다. 8세기 중반에 로마교회의 법왕, 스데반 3세가 영을 내려, 침례대신 세례를 줘도 좋다고, 정식으로 공포했다. 1311년 라벤나 회의에 모인, 로마교회 대표들은 세례만 실시하고, 침례를 실시하면 사형하기로 결의하여, 많은 성도들을 핍박했다. 그 후 세례만 행했다.
16C에 종교개혁이 일어나,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이유로, 세례를 행했다. 그들을 도와주는 영주들이,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경에는 침례로 되어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세례를 계속 행했고, 아직도 세례를 실시하는 교회들이 많다.
성경적인 침례에서 벗어나자, 침례교도들은 주님과 연합으로, 회개의 표시로, 침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고 하면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다. 성경이 말하는 침례는 ‘예수님을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한 자는, 그 신앙을 침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신자는 자기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는다(막1:4-5). 따라서 침례는, 전에는 내가 죄인이었지만,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만인에게 공포하는 선언이다. 침례식은 결혼식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물론 결혼식을, 꼭 해야만 부부는 아니다. 결혼식을 치르지 않아도, 호적에 올라가면, 결혼이 성립된다. 같이 사는, 사실 혼도 있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지 않아서, 결혼사진이 없다면, 의심받을 수 있다. 정말 사랑하면, 결혼으로 하나 됨을 인정하듯이,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선포하고, 하나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진정 믿는다면, 사랑은 고백되어야 한다. 그 고백이 진실이라면, 침례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와, 주님과 연합하겠다는 고백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할 수 없기에, 침례교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아세례는,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침례 받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어린아이도 행하게 된다. 침례교인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자, 천주교회와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유아세례를 무시한다고, 많은 사람을 무참하게 죽였다. 성경에 유아세례는 없다.
침례의 대상은, 반드시 믿는 신자라야 한다. 그러므로 유아나 불신자는 침례의 대상자가 될 수 없다. 그런 일은 없지만, 만일 침례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침례를 더욱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직접 베풀고 받으라고 말씀한 침례는, 세례와 똑같지 않다. 뜻도 형식도 분명히 다르다.
침례는 예수님과 연합을 말하기에, 신비롭다. 죽고 사는 경험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병든 자들이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를 해도, 감기도 들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을 읽어 보라. 많은 사람이 침례를 통해, 변화되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로, 침례에 생명을 걸었다. 이슬람 지역에서는, 침례를 행하면, 공격을 한다. 요즘 옛날에 결혼식을 제대로 못했거나, 결혼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면서, 앙코르 결혼식, 리마인드 웨딩을 하는 분이, 얼마나 많은가!
진정한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례나, 침례를 받았다면, 올바른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확신을 다시 가지고, 행하기 바란다.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첫 걸음이, 바로 침례다.
(눅7:30)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그의 침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하나님께 불순종의 모습이, 침례를 받지 않은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감격과 기쁨을 느끼는, 분들이 되기 바란다.
"
이전글 : 2019년 6월 9일 - 맥추 감사절 | |
다음글 : 2019년 6월 23일 -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1-9)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