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6월 2일 -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23:13-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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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23:13-17)
6월은 호국, 애국의 달이다. 6월 6일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현충일”이다. 6월 25일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인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함으로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이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99만 명의 인명피해와, 천만 이산가족이 생겼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이런 만행을 잊고 살고 있거나, 잘못 가르치고 있다. “6.25는 내전이다. 실패한 통일전쟁이다. 전쟁 주범이 미국과 주한 미군이다.”라고,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나 6.25전쟁은, 내전도 아니고, 통일전쟁도 아니고,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3인이 공모해서, 공산주의 영향력을, 동아시아에서 확대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자, 유엔군의 즉각적인 참전에 맞서서, 중공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바르샤바 동맹군이 개입한 국제전이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즉각적인 긴급회의를 열어, 이렇게 발표했다.
북한군의 무력 남침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에게 “전투행위의 즉각 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그래서 비극이 일어났는데, 이런 비극을 오히려, 북침이라며 잘못된 교육으로, 이런 비극을 잊는다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
또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나라나, 공동체이든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미국은 5월 마지막 월요일이, Memorial Day, 즉 Remembrance Day다. 가정마다 국기인 성조기를 게양하고, “We‘ll never forget you.”(우리는 결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당신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나라와,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6.25 후에, 전몰장병들의 유가족들과, 상이군경들을 방치해서, 상인군인이 분노하여, 질서를 어지럽혔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라가 너무 어려워서, 그들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주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이미 북한군에 의해 흡수되었거나, 지금 북한처럼, 자유도 없고, 인권도 없었을 것이고, 아오지 탄광이나,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라가 잘 되려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과, 그의 가족들을 높이 받드는 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전통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젊은 분들에게 물었더니, 6.25에 대해서, 학교에서 배워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하니, 정말 큰 문제라고 느꼈다. 공산주의는 정말 안 된다. 그들은 4가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산화되면, 제일 먼저, 교회를 때려 부순다. ②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 같이 잘 살자면서, 자기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③ 생명의 귀중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구소련에서 2천만, 중국의 마오쩌둥 치하에서 6500만, 베트남에서 1백만, 북한에서 2백만,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하에 2백만, 동구 공산정권하에 1백만, 아프리카에서 1.5백만, 등등 총 1억 명을 학살했다. 공산주의는,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는 동물이요, 도구에 불과하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표어를 가지고 있다.
④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 같이 잘살자는 미명하에,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미명하에 보수 권력, 보수 재벌, 보수 언론, 보수 교회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런 내용을 잊어서는, 역사는 또 되풀이 된다.
오늘 말씀 (삼하 23장)에는, 다윗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다윗과 함께 충성을 다했던, 장군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삼하23:8上)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로 시작하면서, 나라를 세우고, 적군이 침략해 들어왔을 때, 목숨 걸고 지킨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다.
성경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함은, 후손들에게 그들의 희생과 충성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도,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려는, 아름다운 마음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1. 목숨 건 헌신(13-15).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다. 그 때에 블레셋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어,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이, 적군에게 둘러 싸였다.
전쟁 중에 다윗은, 지금 블레셋 진영에 있는,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 했다. 블레셋이 점령하고 있는 땅이었기에, 물을 떠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옆에 있던 이름 없는 세 장수가, 다윗의 이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세 장수는 한마음이 되어, 경계가 삼엄한 블레셋 적진으로, 목숨을 걸고 달려갔다. 세 용사가 칼을 휘두르며 쳐들어갔다. 두 용사가 적들을 막고 있는 사이에, 한 용사가 신속히 그 우물물을 퍼서, 쏜살같이 돌아와, 그 물을 다윗에게 바쳤다.
(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다윗이 그냥 탄식조로 던져 본 말인데,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물을 퍼 온 것을 보고, 감격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실 수 없었다. 다윗에게는 많은 군사가 있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있는데, 자신만 물을 마신다는 것은, 부끄러웠다. 그 물은, 세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길어온, 그들의 피나 다름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물을 길어 와서, 왕을 섬기자,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와 같다면서, 마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전부 부어드렸다. 그리고 다윗은 이들을 사랑하고, 용사의 자리에 앉혔다.
이 일로 인해, 다윗과 하나님의 나라는, 든든히 세워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목숨을 내놓고, 전투에 임하고 있는데, 왕이라고 해서 특권을 누리면, 안 될 일임을 다윗은 알고 있었다. 결국 다윗의 이런 위대한 리더십이, 가나안을 통일하고,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호국선열들은 모두가, 자신의 생명을 민족과 나라를 위해, 내어 놓은 분들이다. 그들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수많은 호국선열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혈통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분들의 공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 호국정신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타깝다. 후손으로서, 사람으로서, 결코 그들의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 1347년 도버해협을 양쪽에 두고, 두 나라, 즉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치열했다. 그 유명한 백년전쟁 이야기이다.
1년 가까이 영국은, 프랑스의 북부도시, 칼레를 맹공격했다. 어느 날 프랑스의 그 마을은, 더 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 결국 백기를 들었다. 영국은 그 동안 끝없이, 맹렬히 저항하던, 칼레 주민들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했다. 그 때 칼레 마을 전체가, 이미 불타고 있었다.
항복사절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로 갔다. 그리고 자비를 구하였다. 그러나 영국왕은, 그 동안 수많은 영국 군사가, 죽은 것이 생각나서, 살려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항복 사절들은, 결사적으로 매달리자, 왕은 차츰 누그러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다. 칼레 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칼레의 시민을 대표하는 6명은, 교수형에 사용할 밧줄을 목에 걸고, 맨 발로 걸어, 내 앞에 나와야 한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때 용감하게 나선, 6명이 있었다. 모두 그 도시의 핵심인물이며, 축복을 누리던, 부유한 귀족이었다.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위스타슈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희생을 자원하였다.
“장 데르, 자크 드 위상, 장 드 피에네, 피에르 드 위상, 앙드레 당드리에”가, 자기 목에 밧줄을 매고 앞으로 나왔다. 죽기를 각오한 맨 발이었다. 그러나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임신한 왕비가 살려주라고 간청함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렸다.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 시는ㅡ 조각가 로댕에게 그 용감한 6명 동상을, 세우라고 하였다. 그래서 칼레시민들을 위한, 기념동상 6명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이 오늘까지 남아 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라는 동상이다. 이들의 희생정심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면이, 바로 “잊지 않는 마음”이다. 잊지 않는 마음에서 “역사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을 기록해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 기념비를 세우게 한다.
2. 기념비를 세우고 잊지 말라.
이 이야기는 성경에, 두 번 나온다. 본문에도 나오고, (대상11:15-19)에도 나온다. 글자 한 자 틀림없이 똑같이 나온다. 구약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누가 보아도 감동적인 이야기다.
다윗을 위해 목숨 걸고 충성한,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고두고 귀감이 된다. 역사를 이렇게 본 사람에게도 감동이고, 저렇게 본 사람에게도, 귀감이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구약 성경에 두 번 기록하고, 잊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내용들은 무엇인가?
① 에벤에셀 기념비다(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미스바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성회를 열었다. 블레셋이 그 소식을 듣고 쳐들어왔다. 속수무책인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했다. 하나님은 블레셋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혀서, 혼비백산케 하여, 마침내 이스라엘에게 패하게 만들었다.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고,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취하여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고 에벤에셀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의 도움을,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다.
② 열 두 개의 돌(수4장).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을 때다. 범람하던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한 하나님은, 요단강 바닥의 열 두 개의 돌을 취하여, 요단강 바닥과 길갈에, 세우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한다.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하나님이 홍해를 말리고, 요단강 물을 쌓아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한 은혜를, 잊지 않게 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너무 잘 잊고 산다. 목숨을 걸고, 믿음을 전해준 분들도, 목숨을 걸고 기도해 준, 분들이 있는데, 잊고 산다. 목숨을 걸고, 충성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은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사건도 잊지 말아야 하지만, 호구선열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연계되어, 인간에게 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낳아서 기르느라 희생한,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명령한다. 어느 가정이든, 나라든,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이 있기에, 보존되고 발전해 왔다.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그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다. 지구상의 수많은 종족들이 있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사라진 종족들이 많다. 우리나라 주변에도, 많은 종족들이 있었지만 사라졌다. 나라들도 생겼다가 없어진 나라도 많은데, 작은 반도지만,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왔다.
참 놀라운 일이다. 기적이다. 주변에 강대국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비록 950여회의 외세의 침략이 있었지만, 잘 버티며,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발전한 것은,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쳤던, 위대한 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는 일제 36년 동안, 민족이 수치를 당할 때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들이 있었기에, 나라를 되찾았다. 지난 6.25전쟁에서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 만 명의 전몰장병들이 있었기에, 이 땅의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그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피를 바친 호국선열들을 잊지 말자.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자.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하여, 순교한, 믿음의 선조들을 잊지 말자.
우리를 낳아서 기르느라, 삶을 다 바쳐 희생한, 부모님들의 은혜를 입지 말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죽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눅22:19下)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요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잊지 말자. 예수님의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그들의 희생과 죽음을, 아름답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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