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5월 26일 - 성령 충만한 삶의 특징(행4:13-20)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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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한 삶의 특징(행4:13-20)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한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살라는 말이다. 우리의 영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다. 늘 다른 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 영이, 어떤 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 영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반드시 악한 영에게, 지배를 당하게 된다. 악한 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영이다. 죄를 짓도록 만드는 영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영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나요? 교회에 나와 앉아 있다고, 성령과 관계 맺고 있다고, 단언하지 말라.
본문은 우리가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때, 몇 가지 특징들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이 특징들을 보면, 내가 성령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악한 영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이 있다(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믿으면, 환난당하는 때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 붙들림 받은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을 이기는, 담대함이 나타난다.
느부갓네살 왕은, 큰 금신상인 우상을 세워놓고, 엎드려 절하라고 한다. 모든 백성들은, 신상 앞에 다 절하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지금이라도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협박했다.
(단3:17-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해서, 그들을 풀무불 속에 집어 던졌다. 3사람을 불에 던져 넣었는데, 4사람이 거기에 동행하며, 그 불 가운데서도, 눈썹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협을 받고서도,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담대했다.
순교역사를 보면, 열두 사도와 초대 교인들은, 하나같이 순교했다. 목 베어 죽고, 불에 타 죽었지만, 그 중의 누구 하나,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두려워하는 자가 없었다. 한국의 침례교회 순교자들 가운데 김영관 목사님의 이야기다. 공산당이 김영관 목사님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라 했지만 거절했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당에서 그를 두들겨 팼다. 그러나 그는 찬송했다고 한다. 주님을 위해 능욕 받음을 기뻐했다고 한다. 공산당들이 분에 못 이겨, 대나무 칼로 그의 피부, 껍질을 벗겨 죽였다. 김영관 목사님은, 꿋꿋하게 죽어갔다. 무엇이 이렇게 담대하게 했을까?
(히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한 다음,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하고, 히브리 기자는 이런 결론을 맺는다.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성령으로 지배받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담대함이, 그 속에 있다고 가르쳐 준다.
사도들은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디서, 이런 담대함을 얻었을까?
(1) 올바른 지식을 가질 때 담대하다(13中).
“…학문 없는 범인(안로포스)으로 알았다가” 이 말은 베드로가, 글을 몰랐다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 전.후서를 썼으니, 그는 글을 알았다. 자기들과 같이, 전공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잘 이야기하는지에 대해 놀랐다는 말이다. 이들의 담대함은, 올바른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지식에서 나왔다. 왜 담대했는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면, 담대해질 수 있다. 성경을 통해, 세상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두려움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다.
우리의 담대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온다.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 안에 담대함이 찾아온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현대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두려움이다. 질병과 사고에 대한 두려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혹시 내 사업이 부도나지 않을까? 사고가 나지 않을까?
아름다운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이 행복이 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아프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따를 때, 쓸데없는 세상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마지막이고, 절망이라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우리 몸은 장막 집인데, 장막집을 떠나게 되면, 영원한 장막집이 있다고 했다. 장차 영원한 집에서 살게 되는데, 죽음은 영원한 장막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히 이 땅을 떠나가기 원한다고 했다.
(2) 주님과 동행할 때, 담대해진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담대해진다.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십자가를 몸에 품고 다니거나, 목걸이로 걸고 다닌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동행은, 그런 동행이 아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과 같이 먹고 자며, 동행했다. 그런데도 그는 두려워서, 죄를 범했다. 로마 군인이 칼을 들이대고 “너 예수 알지?”하고 물은 것도 아니다. 어린 계집종이 와서 “너 예수와 함께 있었지, 그와 한패다.”라고 했는데, 두려워서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러던 그가, 여기서는 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나? 베드로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이 임하여, 이제 성령님과 날마다 동행하게 될 때, 이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을 얻었다. 걱정, 근심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
(3) 믿음의 체험이 있을 때 담대하다(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간증을 들어보면, 관념적인 믿음일 때가 많다. 체험적인 믿음이 없다.
그래서 담대하지 못하고, 믿음대로 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들었고, 성경도 많이 알지만, 나의 체험이 없다. 사도 베드로가 그랬다. 주님과 함께 다닐 때에, 소경이 눈뜨는 것을 보고, 또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그는, 관념적으로 믿었을 뿐이다. 시험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담대해질 수 있었다.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야기였다. 베드로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하고,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를 일으켰더니, 그가 일어났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는 이런 체험을 가지고 있는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체험이 없는 사람이다. 성경 읽으면 그저 좋아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속에서,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켜 본 적이 있는가?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남편이, 내가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돌아온다. 도저히 끊을 수 없던 나쁜 습관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끊어지는 역사가 나타난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실패해야 하나?
병이 찾아오면 낙담하고, 사업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불평하고, 서로 원망하며,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을 받고,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어떤 위험에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15-17)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의 주님, 성령으로 충만하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전했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을 받고 살아서, 세상을 이기기는 사람들,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이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올바른 지식을 가질 때, 주님과 동행할 때, 믿음의 체험이 있을 때, 주어질 수가 있다. 그래서 담대한 모습이, 우리에게 넘쳐나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를 홍수같이 몰아가기를 원한다.
2. 성령으로 충만하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18-19).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살아감이 힘이요, 능력이다. 왜 죄를 짓는가? 하나님 앞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는다. 요나가 그랬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간다.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선원들이 묻는다. “너 때문에 풍랑이 온 것 같은데, 당신 도대체 누구요?” 그가 대답한다. “나는 천지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자다.” 우리도 이렇게 살 때가 많다. 하나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우리는, 하나님을 소경으로 안다. 은밀히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죄를 짓는다.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에 타협한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혹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지 않는가? 사람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가? 혹시 돈 앞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돈 앞에는 신앙이고, 무엇이고 필요 없으면 안 된다. 얼굴이 환해져서 물어보면, 돈이 잘 벌리고 있는 것이다. 울상을 하고 있으면, 사업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옳은가를, 묻고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옳은 줄 믿는다. 이왕에 눈치를 보려면, 하나님의 눈치를 보기를 바란다. 성도는 사람의 눈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3.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산다(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 세상에는 2가지의 삶이 있다. ① 쫓기면서 사는 삶 ② 부름 받아 사는 삶이다.
쫓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늘 쫓긴다. 일, 돈, 환경, 시간에 쫓긴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늘 바쁘다. 늘 만족이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간다. 내가 환경을 지배하기보다, 환경이 나를 다스린다. 돈과 시간이 나를 다스리고 늘 쫓긴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아가다가, 쫓겨서 죽는다.
그러나 부름 받아 사는 삶은, 능동적인 삶이다. 목표가 있는 삶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른, 부르심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서, 구원했을 땐, 내게 준 소명이 있다. D.L 무디는, 많은 사람이 무시하는 구둣방에서, 남의 구두를 꿰매면서도, 하나님의 소명을, 한 번도 잊지 않고 살았다.
“주님! 내가 사는 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인 줄 압니다. 주님이 마지막 떠나면서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무디는 이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구두를 꿰매면서도, 그 사명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무디의 설교원고를 보면, 읽기가 힘들다. 철자법이 틀리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을 변화시키는, 부흥사가 되었다. 너무 못 배워서, 목사 안수도 못 받은 그였지만, 부흥사가 되어 미국을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부름 받은 삶이다.
바울은 (행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지금 성령과 교제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준 소명이 있나?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둔 이유를 아는가? 그 이유를 이루기 위해,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부름 받은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을 유유하게 살아간다.
소명을 아는 사람은,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분별한다. 오늘 말씀이 우리 지표가 되어,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부름 받은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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