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3월 31일 - 성경의 권위를 세운 예수님(막7:9-1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3-31 |
첨부파일: 성경의 권위를 세운 예수님.hwp(21K) |
성경의 권위를 세운 예수님(막7:9-13)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예수님을 살폈다. 마침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명백하게, 장로들의 전통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예수님을 비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했다고 비난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내세웠지만, 예수님은 성경을 내세웠다.
예수님은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인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 보였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세웠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믿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
1. 바리새인의 문제점을 지적한 예수님(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지키는 전통을 “장로들의 전통”(5)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전통”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한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① 그들이 지키는 전통은, 사람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과는 달리, 장로들의 전통, 그들의 전통은, 결코 절대적인 권위나, 구속력을 가질 수 없었다.
② “장로들의 전통”이라면, 모든 책임이 장로들과, 조상에게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탓이 아니다. 조상 때부터 그렇게 해왔다.” 그들이 이런 핑계를 대지 못하게, 예수님은 아예 그들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핑계 삼아,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
본래 장로들의 전통은, 성경을 보호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울타리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그래서 울타리 역할을 하는 전통에 가리어, 그 안에 있는 성경이, 제대로 보이지를 않게 되었다. 그들의 구전된 전통을, 모아놓은 것을 ‘미쉬나’(반복)라고 한다.
이 미쉬나를, 더 자세하게 풀이한 것을 ‘게마라’(보완)라고 한다. 이 두 가지, 곧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친 것이, 이른바 탈무드(배움)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잘 씻어야 한다.” 이것은 미쉬나이다. 이런 규정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사람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로들의 전통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손을 잘 씻는가? 적어도 달걀 한 개 반, 분량의 물이 필요하다. 그 물을 위에서 부어서, 손을 비비면서 씻어야 한다. 단 그 물이, 손목 아래로 내려가면, 부정해지기에 안 된다. 이런 것이 바로 게마라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전부 모아서, 항목별로 나누어 체계화한 것이 ‘탈무드’다.
우리나라 시중에 나온 탈무드는, 율법적인 내용은 없고, 재미있는 내용만 간추린 것이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20여권이 넘게 방대하다. 또 예루살렘 탈무드도 있고,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다. 아무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도, 더 권위 있게 여겼다.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전통을 어기면, 성경을 어긴 것보다, 벌이 더 크다고 했다. 성경에도 없는 무거운 짐들을, 전통으로 묶어서, 사람의 어깨에 지웠다(마23:4). 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보호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렸다. 전통을 성경보다도, 더 위에 두었다. 사람이 만든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을 바라보려 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사람들의 말 듣기를 좋아했다. 한 마디로 초점이, 잘못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자.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2.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예수님(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출20:12上)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으로, 모세가 기록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9)이라고 불렀고, 또 “하나님의 말씀”(13)이라고 했다.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했다.
모세가 기록했든지, 이사야가 기록했든지, 다른 사람이 기록했든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같은 내용을 담은 (마15:4上) “하나님이 이르셨으되…”라고 했다. 같은 뜻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의 권위를 확고하게 세웠다.
(신12: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지키고, 행해야만 한다. 따라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여기에 무슨 변명이나, 핑계가 있을 수 없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경에 있는 또 다른 말씀을, 추가로 인용했다. (출21: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예수님은 언제나, 성경만이 절대적이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가, 받아야 할 벌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만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그와 같이 벌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죄 값을 치르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함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며, 순종해야 한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서, 일할 수 없을 때는, 자녀는 물질로 부모님을 봉양해야 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계명을 어길 경우, 중한 벌을 받음도 알았다. 그러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하였다. 그들은 성경과는 다르게 행하며, 또 성경과는 다르게,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지키는, 잘못된 전통 때문이었기에, 예수님은 그릇된 전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들의 전통 가운데, “고르반” 제도가 있었다. 히브리어로 고르반은 “예물”을 뜻한다. 이를 해석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졌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가진 재물을 고르반,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기로 서원했다면, (민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하나님께 한 서약은,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다.
이제 부모가 나이 들어,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서, 부모님이 와서, 그에게 물질적 도움을 요청했다. 그 때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것은 고르반이 되어서, 제가 드릴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신앙에서 나온 관습이, 사람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한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고르반 제도를 악용했던 것이다. 가끔 성전에 올라가서 “이것은 고르반”이라면서, 조금씩 하나님께 바치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그 나머지는 자기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고르반이라는 전통을, 만들어낸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고르반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사람들로부터 못된 자식이라는, 질책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예수님은 이들의 전통이 얼마나 사악한지 보여주었다. 그들은 무엇이라도 고르반이 되면, 그것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하도록, 아예 금지해버렸다.
하나님이 부모보다 더 크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부모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들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려고, 자기합리화 시키는 하나의 핑계요, 구실에 불과할 뿐이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의 계명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고르반 전통을 만들어서 “네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 “네 부모를 공경하면, 안 된다.”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렸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그들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언했다.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멀었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경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는 헛된 경배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면서, 성경 말씀을 붙들고, 성경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 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는, 참 예배가 될 것이다.
3.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다고 꾸짖은 예수님(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이들은 조상들로부터, 잘못된 전통을 이어 받아서, 그대로 지켰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그 그릇된 전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주면서, 남들도 그 어그러진 전통을, 그대로 지켜 행할 것을 강요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8).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다(13). 점점 더 그 도가, 심해졌다. 이러한 일을 많이 행했다.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일을 빈번했다. (막2장)을 보면, 그런 예가 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타인의 곡식밭에 들어가서, 손으로 이삭을 딸 수 있다.
(신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여기에 날에 대해서는, 예외 규정이 없다. 안식일이더라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타인의 곡식밭에 들어가서, 손으로 그 이삭을 딸 수 있었다.
따라서 제자들이 한 행동이, 성경에는 위배되지 않아도,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다. 제자들의 행동이, 자신들의 전통에, 어긋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출34:21中)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안식일에는 거두는 일, 곧 추수하는 일을 쉬어야 했다.
바리새인들은,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전통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 때 제자들의 행동은, 여러 가지로 안식일을 범한 것이다.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에 해당했다. 그것을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에 해당했다. 지푸라기들을 버린 것은, 키질에 해당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다. 제자들은 성경에 위배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인위적으로 만든 전통에, 제자들이 어긋난 행위를 했다고, 심통 부렸다. 성경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신들의 전통을 엄청나게, 많이도 만들었다.
그들의 전통이, 성경과 상충이 되는데도, 전통이 전부인 줄 알고, 그들의 전통만 고집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결국 유대교는, 하나님 말씀을 폐하는 종교요, 성경의 권위를 짓밟는 종교였다.
결론은 자명하다. 유대교는 거짓종교였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정죄하고 심판했고, 유대교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교회를 세웠다. 예수님은 그의 교회로 하여금, 성경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도록 했다. (빌3:5) 바울도 바리새인이었다. 장로들의 전통에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완전히 달라졌다. 철저하게 회개했다. 그래서 (빌3:8)을 보면, 과거의 자랑거리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다. 물론 그 가운데, 그가 이전에 힘써 지키려했던, 장로들의 전통도 들어있었다. 그 뒤로 바울은, 오직 성경만 힘써 전하며, 가르치기를 고집했다.
그는 성경의 능력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처럼, 성경의 권위를 확고히 세웠다. 우리는 어떤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오래 된 교회일수록,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람의 역사를 자랑하지 말자.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자랑하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친히 역사함을 자랑한다.
또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도, 절대적일 수 없다. 전통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이며, 영원불변하다. 그러므로 전통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꼭 붙들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다가 망했다. 이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믿자. 성경 말씀을, 순금보다 더 사모하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기자.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내린다.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으며, 예수님 안에서 복되게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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